외국성지순례기

성자로 거듭 태어난 흉적 앙굴리말라

담마다사 이병욱 2018. 2. 14. 00:00


성자로 거듭 태어난 흉적 앙굴리말라

(인도성지순례 20)

 

 

 

스라바스티를 향하여

 

룸비니에서 스라바스티(기원정사)까지는 150키로미터의 거리로 4시간에서 5시간 걸립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인도에서 속도를 내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진주선원 인도성지순례팀은 룸비니순례를 마치고 이른 오전 서쪽 방향에 있는 스라바스티로 향했습니다.

 

 



2018 1 5일 일정은 빠듯합니다. 네팔 룸비니에서 럭나우까지 가야 합니다. 이동시간이 대부분입니다. 도중에 기원정사라 불리우는 스라바스티가 있습니다. 인도성지순례에서 가장 마지막 코스에 해당됩니다. 이동 중에 약 한시간 가량 기도문을 독송하는 등 예불의식을 했습니다.

 

룸비니에서 서둘로 출발했습니다. 마치 쫒기듯이 출발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것은 룸비니에서 스라바스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지운전기사의 운전실력으로 인하여 늦은 점심시간 무렵에 도착했습니다.

 

파완 펠리스 호텔(Pawan Palace Hotel)에서

 

 인도의 경우 인프라가 열악하여 마땅히 식사할 곳이 없습니다. 주로 성지 부근에 있는 호텔을 이용합니다. 점심은 스라바스티 가까운 곳에 있는 파완 펠리스 호텔(Pawan Palace Hotel)에서 해결했습니다 호텔의 협조로 인도요리사가 미리 준비해온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파완펠리스 호텔에서 불상을 보았습니다. 다른 호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 스라바스티라는 불교성지 부근에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호텔 정원에는 꽃이 피어 있습니다. 이름 모를 과일도 주렁주렁 열려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겨울이지만 인도에서 건기는 봄날씨입니다.

 










앙굴리말라 스투파에서

 

순례팀은 기원정사를 순례 하기 전에 먼저 앙굴리말라 스투파에 갔습니다. 앙굴리말라 스투파는 앙굴리말라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탑이라 합니다. 그런 앙굴리말라가 흉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또 한편으로 장로입니다. 앙굴리말라의 극적인 인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극악무도한 연쇄살인자일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구원 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대사람들이 스투파를 건립했을 것입니다.

 

앙굴리말라 스투파는 기원정사에서 약 1.3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메인 코스인 기원정사를 순례하기에 앞서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먼저 순례했습니다.

 


 


 

앙굴리말라 스투파는 주변이 온통 나무와 초지로 되어 있습니다. 정글가운데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숲 가은데 붉은 벽돌 유적이 우뚝 솟아 있는데 기원정사 순례를 하면 의례 찾는 곳으로 되어 있습니다.

 


 



앙굴리말라 스투파에 올랐습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온전한 형태로 있었을 때는 당당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스투파는 평지에 돌출 되어 있어서 작은 동산같습니다. 스투파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순례팀은 스투파 꼭대기에 자리 잡았습니다. 삼귀의와 오계 등 빠알리 예경을 했습니다. 그리고 앙굴리말라 스투파에 적합한 경을 독송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앙굴리말라의 경(M86)’입니다.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

 

흔히 유일신교를 구원의 종교라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주를 믿음에 따라 창조주로부터 구원받는 타력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구원은 자력에 따른 것입니다. 다른 것에 의지 하지 않고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여 스스로 구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극악무도한 살인자일지라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앙굴리말라가 대표적입니다.

 

앙굴리말라는 폭주하는 자동차와 같았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살인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연쇄살인자를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도 세존이시여, 나는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M86)라고 말할 정도이었습니다.

 

앙굴리말라를 멈추게 할 사람은 부처님 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부처님은 앙굴리말라가 다니는 길에 갔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달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온 힘을 달려도 보통 걸음으로 걷고 있는 부처님을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초월적인 힘, 즉 신통을 쓴 것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마치 런닝머신에서 달리기 하는 것처럼 부처님을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앙굴리말라는 수행자여, 멈추어라. 수행자여, 멈추어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M86)라 했습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마치 폭주하는 기관처럼 미쳐 날뛰는 살인마에게 뭇삶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고 한 것입니다.

 

살아 가면서 멈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미친듯이 앞으로만 달려갑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영화가 있듯이, 대부분 감각적 욕망으로 폭주합니다. 앙굴리말라는 폭력으로 폭주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을 만나서 폭력을 멈추었습니다. 부처님이 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재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라며 말씀 했기 때문입니다.

 

앙굴리말라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 났습니다. 폭력을 멈춘 것입니다. 극적인 변화를 가져 오게 한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선근(善根)이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극악 무도한 연쇄살인자였지만 진리를 받아 들일 성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라는 부처님의 말 한마디에 멈춘 것입니다.

 

이전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멈추면 보인다고 합니다. 좌선 하기 위해 앉아 있는 것도 멈추는 것입니다. 멈추어서 호습을 관찰 했을 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멈추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멈춤에 익숙하지 않는 자들은 5분을 버티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멈추었을 때 평화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완전히 멈추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 와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전과는 180도 다른 삶입니다. 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뀐 것입니다. 연쇄살인자에서 공양받아야 마땅한 아라한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극적인 변화에 대하여 앙굴리말라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내가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인하여 당신이 잘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되길 바랍니다.”(M86)

 

 

앙굴리말라가 탁발 나가서 출산이 임박한 여인에게 한 말입니다. 여기서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āriyāya jātiyā jāto)”(M86)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귀한 태어남은 빠알리어로āriyāya jāti’를 말합니다. 고귀한 태어남은 성자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앙굴리말라는 완전히 멈추었기 때문에 범부에서 성자로 족보가 바뀐 것입니다.

 

폭력을 완전히 멈추고, 욕망을 완전히 멈추고, 분노를 완전히 멈춘 앙굴리말라는 거듭 태어났습니다. 거듭 태어났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얼굴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이전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거듭태어남을 말합니다.

 

출가하면 거듭태어난다고 합니다. 출가하면 가족에서 떠나고 세상에서 떠납니다. 출가하면 이전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거듭태어남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족과 인연이 끊어졌다고 하며 세상과도 인연이 끊어 졌다고 말합니다. 얼굴은 이전과 똑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앙굴리말라도 그랬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이전에는 연쇄살인자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만나서 완전히 멈추었습니다. 그 결과 이전의 앙굴리말라는 죽었습니다. 그 대신 새로운 앙굴리말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고귀한 태어남입니다. 그래서 경에서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yatoha bhagini, āriyāya jātiyā jāto)”라 한 것입니다.

 

부채없이 음식을 즐긴 앙굴리말라

 

앙굴리말라는 고귀한 존재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아라한이 된 앙굴리말라가 읊은 게송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와 테라가타에 실려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예전에 나는 흉적으로서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Thag.880)

 

예전에 나는 손에 피를 묻히는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존재의 통로를 끊고

내가 귀의한 것을 보라.” (Thag.881)

 

이와 같이 나쁜 곳으로 이끄는

많은 악업을 짓고

아직 그 업보에 맞딱뜨리지만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긴다.(Thag.882)

 

 

앙굴리말라는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긴다.(anao bhuñjāmi bhojana)”고 했습니다. 이 말은 네 가지 즐김 중에 자기 것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왜 자기 것인가? 아라한은 공양받아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시주가 보시한 음식을 복전으로서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성자가 되지 않은 자가 음식을 먹을 때 유산을 즐긴다고 합니다. 승단에 들어 온 자가 음식을 먹을 때 부처님의 남겨 주신 유산을 먹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계행을 지키며 정진하는 학인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빚진 것처럼 먹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승단에 들어 왔지만 계행도 지키지 않고 공부를 게을리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흔히 하는 말이 밥값도 못한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최악은 음식을 도둑질 하듯이 즐기는 자입니다. 승단에 들어 온 자가 사방승가의 유산을 차지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돈이 되는 절을 차지하여 이익을 취하는 승려들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앙굴리말라는 부채 없이 음식을 즐겼습니다. 복전으로서 음식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음식의 주인은 자기인 것입니다. 아라한은 모든 오염원이 소멸되어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자기의 것을 자기가 먹기 때문에 부채 없이 음식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앙굴리말라 수호경

 

앙굴리말라는 흉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권에서는 앙굴리말라와 관련된 이야기는 수호경으로도 활용됩니다.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 탁발 나갔다가 이상임신과 난산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는 한 여인을 보고, 그 여인과 태아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이를 앙굴리말라 수호경이라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매여, 저는 고귀한 태생으로 거듭난 이래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 되길 바랍니다.”

 

자매여, 저는 고귀한 태생으로 거듭난 이래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 되길 바랍니다.”

 

자매여, 저는 고귀한 태생으로 거듭난 이래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 되길 바랍니다.”

 

 

경은 세 번 반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출가이전의 죄악 때문에 주저하자, 부처님은 출가하여 고귀한 가문에 태어난 이후의 청정을 기초로 하여, 이와 같이 자매여, 저는 고귀한 태생으로 거듭난 이래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게 한 것입니다. 앙굴리말라는 흉적으로서가 아니라 번뇌가 부수어진 아라한으로서 말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이렇게 말하자 여인은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아이는 즉시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앙굴리말라 수호경은 부처님 당시부터 수호경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임신과 출산시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사방에 끝없는 평원이

 

앙굴리말라 스투파 위에 올랐습니다. 평지에 돌출 되어 있어서 오르니 사방이 다 보입니다. 차만 타고 다닐 때와 전혀 다른 광경입니다. 이렇게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지평선을 볼 수 있습니다.

 

 










 

앙굴리말라 스투파 주변은 개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나무도 있고 숲도 있고 황무지도 있습니다. 사방에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산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앙굴리말라 스투파 꼭대기에서 바라본 인도평원은 사방으로 광활합니다. 가슴이 탁 트인 듯 후련합니다. 부처님도 이렇게 넓은 평원을 거닐었을 것입니다.

 





 

2018-02-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