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체로보트가 아니다, 정평불 월정사 워크숍
자유의지가 없다는데
“자유의지는 정말 없는 겁니까?”뜬금없이 출간회장에서 누군가 던진 질문입니다.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박사의 ‘정신과 의사의 체험으로 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출간회장에서의 일입니다. 책의 내용과 전혀 관계 없는 질문입니다. 이에 전현수박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없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자유의지는 분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전현수박사의 불교TV 마음테라피 강연을 보면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블로그에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없지만 생체로보트처럼 살 순 없다.(2017-11-2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강연을 녹취하여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정의평화불교연대 워크숍에서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 4월 21일과 22일 양일간 월정사에서 춘계사찰순례와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모두 20명이 참여한 이 행사는 회원들간의 친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학술토론도 겸한 것입니다.
도착 당일 늦은 오후 큰방에 모였습니다. 상임대표 이도흠교수가 준비해온 논문 ‘4차 산업혁명과 불교’를 생각했습니다. 논문에는 놀라운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정말 논문대로 라면 우리들은 단지 프로그램된 ‘생체로보트’에 불과합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접합니다. 최근 EBS에서 본 4차 산업혁명 이야기를 보면 약간 황당무계(荒唐無稽)하기도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예측하고 추론하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무장한 학자가 달변으로 거침 없이 말 했을 때 ‘정말 그럴까?’라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ena)
4차 산업혁명 이야기를 들으면 인류의 미래는 비관적입니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정반대로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 말씀이 떠 오릅니다.
“깔라마들이여, 당신들이 미심쩍어하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의심스러운 것은 미심쩍은 일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A3.65)
부처님 당시에는 사상의 혼란기였습니다. 소위 육사외도라 하여 갖가지 견해가 난무하여 어느 것이 진리인지 일반사람들은 분간하기 힘들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해도 함부로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를 분석하면 10가지에 달합니다. 그 중에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ena)’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상태에 대한 분석’에 끄달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과학적 분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빠알리어 아까라빠리비딲까(ākāraparivitakka)라는 말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빠알리어 아까라(ākāra)는 ‘a mine’의 뜻으로 ‘광산’ 또는 ‘광물’을 뜻합니다. 다름 아닌 물질입니다. 빠알리어 빠리비딲까(parivitakka)는 ‘reflection; consideration’의 뜻으로 ‘분석’을 뜻합니다. 따라서 아까라빠리비딲까(ākāraparivitakka)는 ‘상태에 대한 분석’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라고 번역했습니다. 멋진 이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실험도구를 사용하여 밝혀진 것은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이 있습니다. 매월 둘째와 넷째주 금요일 저녁에 전재성박사 서고에서 열립니다. 지난번 강독모임 때 ‘깔라마의 경(A3.65)’을 강독했습니다. 전재성박사는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ena)’에 대하여 오늘날 과학적 이론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거의 대부분 곧이곧대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 하지 않았음에도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믿는 맹신의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 된 것만 믿는 자도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라고 하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깔라마의 경에 따르면 ‘상태에 대한 분석’에도 끄달리지 말라고 했으므로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전재성박사는 과학적 이론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깔라마의 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문제는 과학적 발견사실도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실험도구를 사용하여 밝혀진 것은 100% 올바른 관찰이라 볼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과학은 물질에 바탕을 둔 학문입니다. 특히 실험도구를 사용하여 물질을 관찰하고 분석합니다. 이와 같은 분석기법으로 인류는 수 많은 과학적 원리를 발견했고 놀라운 발명품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물질에 기반한 것입니다. 물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오로지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오로지 물질에 대한 것
부처님 당시에 유물론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물질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단멸론(斷滅論)’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S24.5)라고 주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물질로 구성된 몸이 무너져 죽으면 물질에서 파생된 정신도 죽어서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과학적 발견은 실험도구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실험도구는 시대에 따라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문명이 발전됨에 따라 실험도구도 정교해집니다. 이와 같은 실험도구의 변화는 이전에 과학적 사실이 때로 뒤집어 지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비일비재입니다.
지금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라 하더라도 좀더 정교한 실험도구를 사용한다면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ena)’에도 끄달리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이라는 잣대로 파악 했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는 부정됩니다. 부처님이 설한 업(kamma)과 업의 작용(kamma vipaka: 業異熟)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과학적 탐구는 오로지 물질에 대한 것만 해당됩니다.
자유의지는 환상이라고
오늘날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수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연을 통해서 또는 TV를 통해서 미래 사회 예측에 대한 이야기를 접합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자유의지’입니다. 대부분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두뇌를 연구하는 것도 물질을 탐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질위주의 과학에서는 자유의지가 부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과학을 탐구하는 사람들, 특히 뇌를 연구 하는 학자들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다’라고 단언합니다. 이에 대하여 수 많은 실험데이터를 제시합니다. 정평불 월정사 세미나에서 이도흠 교수의 논문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벤저민 리벳은 자유의지에 관한한 유명한 실험을 통하여 피실험자들이 결정을 내리기 1000분의 350초 전에 뇌에 이미 신호가 떳음을 밝혀 자유의지가 뇌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이도흠교수, 4차 산업혁명과 불교)
전현수박사도 불교TV 강연에 따르면 1886년 ‘헤르만 헬름홀츠’의 뇌실험 이후 현재까지 내린 결론은 한마디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실험도구를 이용하여 연구해 본 결과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아 채기 전에 이미 상당 수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 냈다는 것입니다.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 중 상당수는 앞서 뇌 속에서 무의식중에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행위 하기 전에 먼저 뇌에서 알아차려 결정을 내리는데 그 ‘결정대로’ 따른 것일 뿐이라 합니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환상이라 합니다. 뇌가 한 것처럼 느끼지만 그 전에 이미 과정이 있어서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아름다운 환상이다.”라든가, “자유의지는 착각이다.”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프로그램된 생체로보트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자유의지가 없는 생체로보트에 불과하다면 여러가지 사회적 도덕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범죄문제를 하나의 예로 들었습니다. 살생한 자에게 죄를 물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정말 인간이 생체로보트에 불과하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 도덕적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수행을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정념스님 방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다음 날도 이어졌습니다. 정평불 순례팀은 상원사와 적멸보궁을 순례 한 다음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방에 모였습니다. 정념스님과 차담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전날 자유의지에 대한 세미나가 화재에 올랐습니다. 이도흠 교수가 세미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박경준 교수는 3종외도설을 인용하여 자유의지론이 부당함을 설명했습니다.
초기경전에 삼종외도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숙명론(pubbekatahetuvāda), 존우론(issaranimmānahetuvāda), 무인론(ahetuvāda)입니다. 이 세 가지 설은 모두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행위와 행위의 과보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전생탓으로 돌린다든가, 모든 것을 창조주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원인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삼종외도설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게 되면 상견과 단견이라는 양극단에 빠져서 현생 뿐만 아니라 내생도 고통스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삼종외도에 대하여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무작설(無作說: akiriya)’이라 하여 연기법으로 강력하게 비판 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머리털로 만든 옷의 경(A3.135)’에 따르면, 부처님은 스스로 작론자(作論者: kiriyavādin)라 했습니다. 이는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라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과거칠불 등세상에 출현 하신 모든 부처님들의 한결 같은 가르침은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라는 것으로 모두 ‘작론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체로보트가 아니다
행위와 행위의 과보,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면 숙작인론, 존우론, 무인론과 같은 무작론자가 됩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면 외도의 사상이 됩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착각이다’라거나.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하다’라고 자유의지 무용론을 주장한다면 대개 물질에 기반을 둔 과학론자들입니다. 부처님 당시 유물론자들과 맥을 같이 합니다.
유물론자들은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S24.5)라 하여 행위와 행위의 과보,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화생하는 뭇삶도 없다.”(S24.5)라 하여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게 됩니다.
무작론자들에게는 오계를 준수하여 도덕적인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수행을 하여 해탈과 열반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물질에서 파생된 정신도 죽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어서 지금 이순간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면 그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삼종외도설은 최악의 견해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견해는 결국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양극단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기법에 따르면 양극단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아무리 자유의지무용론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물질을 탐구하는 과학자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실험도구를 이용하여 과학적 이론을 발표화지만 그 실험도구 역시 물질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물질을 탐구하는 신종 유물론자들이라 볼 수 있는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는 생체로보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 놓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영역’입니다. 정신영역에서는 실험도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체로보트가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실험도구를 이용하여 물질을 관찰하지만 정신은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정교한 이론으로 자유의지는 착각’이고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깔라마의 경에 따르면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ena)’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A3.65)
2018-04-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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