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자타(自他)가 이익되는 삶을 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8. 5. 11. 09:17

 

자타(自他)가 이익되는 삶을 위하여

 

 

깃발을 만들었는데

 

깃발을 만들었습니다. 녹색바탕에 흰색으로 코끼리가 그려져 있는 깃발입니다. 코끼리 그림 아래에는 역시 흰색으로 정의평화불교연대라고 쓰여 있습니다. 5 10일 보신각 촛불법회에 등장한 정평불 깃발입니다.

 




깃발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디자인 된 것을 맡기면 10만원 이내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른바 낙싯대형 깃발로서 접찰식입니다. 등산용 지팡이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깃발을 늘이면 10미터 가량으로 3층 높이입니다. 끈을 세 군데 묶으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 됩니다. 문제는 고정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보신각 광장에는 깃발꽃이대가 설치 되어 있습니다. 아마 보신각 광장에서 집회가 많이 열려서 일 것입니다.

 

 



깃발처럼 홍보효과 있는 것 없습니다. 높이 치솟은 깃발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바람에 휘날리면 해당단체를 알리는데 만점입니다. 그래서일까 재작년 광화문촛불에서는 무수한 깃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만든 깃발은 휴대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낚시가방처럼 길죽한 가방이 있어서 봉을 접어 넣으면 됩니다. 어깨에 맬수도 있어서 이동도 편리합니다.

 

나의 깃발을 쳐다 보라

 

깃발은 예로부터 전장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무수한 깃발이 등장합니다.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을 식별할 수 있는 방법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깃발의 경(S11.3)’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기 있습니다.

 

 

벗들이여, 하늘 사람들이 전쟁에 말려들어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생겨난다면, 그때 나의 깃발을 쳐다 보아라. 그대들이 나의 깃발을 쳐다볼 수 있다면,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S11.3)

 

 

초기경전에 따르면 옛날에 신들과 아수라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들의 제왕 제석천이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 하늘사람들에게 한말입니다.

 

경에 따르면 여러 개의 깃발이 등장합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날 때 깃발을 보면 사라질 것이라 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삼보의 깃발이 등장합니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의 공덕을 생각하면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질 것이라 합니다.

 

깃발모습만 보아도 용기를 잃고

 

초기경전 도처에서 깃발은 등장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전사에 대한 비유의 경(A5.75)’이 있습니다. 수행승을 전사에 비유한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다섯 가지 전사의 유형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전사는 흙먼지가 이는 모습은 견디지만, 깃발의 모습만 보아도 용기를 잃고 전의를 상실하고 견디지 못하고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전사는 이와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번째 전사들이 세상에 있다.”(A5.75)

 

 

전장에서 어떤 전사는 적의 흙먼지만 이는 것을 보아도 전의를 상실합니다. 설령 그것을 견디어 냈다 하더라도 적의 깃발만 보면 싸울 의욕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설한 것은 배움이 허약한 수행승이 배움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감을 말합니다.

 

수행승에게 있어서 깃발은 감각적 욕망의 대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승이 탁발나가서 최상의 미모를 가진 여인을 보았을 때 그것을 보고 용기를 잃고 의도를 상실하고 견디지 못하고 청정한 삶을 계속할 수 없다.” (A5.7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정의평화불교연대 깃발은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단체명이 말해 주듯이 정의와 평화의 깃발입니다. 정의는 담마()를 말하고 평화는 닙바나(涅槃)을 뜻합니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정의는 가르침을 뜻하고 평화는 열반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르침대로 살면 지극히 평화로움에 이름을 말합니다.

 

불교인들은 가르침대로 삽니다.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침대로 산는 것은 법답게 사는 것을 말하고, 여법하게 사는 것을 말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은 정의롭게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국민들은 충격에

 

정의평화불교연대는 가르침대로 정의롭게 살아갑니다. 약칭 정평불에서 정의의 깃발을 들었을 때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자들은 긴장할 것입니다. 현재 조계종 총무원 권승들이 그렇습니다.

 

5 10일 보신각에서 촛불법회가 다시 열렸습니다. 작년 일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10차례 가량의 촛불법회 연장선상입니다. 작년 10월 이후 8개월만에 불교인들이 다시 광장에 모였습니다. 이번에는 피디수첩이 제기한 설정스님과 현응스님이 이슈가 되었습니다.

 




촛불법회를 진행한 사회자는 지금 총무원장은 자격을 상실했습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불교인들은 대부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총무원장과 교육원장 관련 추문이 공중파로 방영되었을 때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작년 불교인들이 불교적폐청산을 외쳤을 때 이미 거론 되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찻잔속의 폭풍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만의 리그를 더 공고히 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것과 같습니다. 오로지 이익에 눈먼 자들이 기득권을 지켜 내려 하다가 불교인들은 물론 국민적 공분을 사게 되었습니다.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작년 불교인들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를 수용했더라면 이지경까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150명 가량 모인 불교인들은 저녁 8시 반이 되자 조계사로 행진했습니다. 그들을 두렵게 할 깃발도 함께 했습니다. 싱그러운 오월의 밤하늘 공기는 부드러웠지만 일주문 앞은 마치 남북이 대치한 것처럼 긴장이 넘쳐 흘렀습니다. 그러나 작년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작년에는 마치 벽에 대고 소리친 것처럼 답답했으나 이번에는 여유롭습니다.

 




다급한 것은 그들입니다. 큰 죄를 짓고 마치 숨어서 눈치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공중파방송의 영향이 큽니다. 교계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눈하나 꿈쩍 하지 않던 그들이 이제 납작 업드려서 눈알만 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승단추방죄를 저지를 자들에 대한 자비는 없습니다. 그들이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자타(自他)가 이익되는 삶을 위하여

 

종교단체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나 절 일에 매우 적극적이고 열성적입니다. 남을 위하는 아름다운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했을 때 이는 여법하게 사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나 절은 도피처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체나 조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활동가들도 해당될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자신도 이익이고 타인도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같은 케이스입니다. 부처님이 보살로 살 때 남을 위해 희생을 많이 했습니다. 자타까을 보면 남을 위해 스스로 먹이가 되는 장면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보살행을 했습니다. 그것은 무상정등각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사람이나 정반대로 타인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경우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은 자타(自他)가 이익 되는 삶입니다. 자신의 이익은 물론 사회적 정의도 실천하는 삶, 이것이 정의평화불교연대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2018-05-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