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발우(木鉢盂)가 허용되지 않는 이유
서울 한복판에서 탁발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암적색 가사를 수한 테라와다불교 빅쿠들이 탁발하는 장면은 뉴스감입니다. 탁발문화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입니다.
지난 6월 16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서울분원인 담마와나선원 개원식이 있었습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 빅쿠들이 탁발행사를 했습니다. 이제 교단이 성립된지 9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국불교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테라와다불교 빅쿠들은 늘 발우를 들고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이동중에 늘 발우를 앞으로 하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왜 나무발우는 안되는가?
테라와다빅쿠들이 들고 있는 발우는 어떤 재질로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느낌에는 가벼운 플라스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면 나무로 된 목발우일 것으로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율장소품을 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소품 ‘사소한 일의 다발’을 보면 발우(patta)에 대한 계율이 있습니다. 인연담으로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발우와 관련하여 신통대결 펼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발단은 이렇습니다.
“한때 라자가하 시의 부호가 값비싼 전단수의 나무심을 지닌 전단목을 얻었다. 그러자 라자가하 시의 부호는 이렇게 생각했다.
[부호]
‘내가 이 전단목으로 발우를 조각해서 만들어, 조각들은 내가 사용하고 발우는 보시하면 어떨까?’”(Vin.II.112, 율장소품, 사소한 일의 다발, 전단목으로 만든 발우)
전단목은 향의 재료가 되는 고급목재입니다. 부호가 고급전단목을 향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수행자들에게 발우로 만들어 줄 것을 생각합니다. 엄청나게 값어치가 나가는 발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부호는 “수행자나 바라문이나 신통자재한 거룩한 님이라면, 주어진 발우를 내려서 가져가 보시오.”라 했습니다. 이에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외도의 스승이 모두 등장합니다.
가장 먼저 뿌라나 깟싸빠가 나타나서 “장자여, 내가 신통자재한 님입니다. 나에게 발우를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도스승인 뿌라나 깟싸빠는 신통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대나무 끝에 묶여 있는 발우를 신통으로 가져 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후 등장하는 외도 스승은 차례로 막칼리 고쌀라, 아지따 께싸깜발린, 빠꾸다 깟짜야나, 싼자야 벨랏티뿟따, 니간타 나타뿟따에 이르기 까지 어느 누구도 신통으로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때 부처님의 상수제자 중의 하나인 마하 목갈라나가 존자 삔돌라 바라드자와와 함께 라자가하 시에 탁발하러 갔습니다. 삔돌라 바라드자와가 전단목 발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목갈라나에게 신통으로 가져 올 것을 말했습니다. 이에 목갈라는 바라드와자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러자 바라드와자는 신통으로 공중으로 날아 올라가 대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전단목 발우를 가져 왔습니다. 이로 보았을 때 외도스승의 신통이 부처님의 제자보다 형편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간단한 신통조차 부릴 수 없음을 경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삔돌라 바라드와자가 신통으로 발우를 가져 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바라드와자 뒤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그것도 왁자지껄하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소문이 부처님 귀에게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드와자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은 후에 다음과 같이 훈계했습니다.
[세존]
“바라드와자여, 그대는 적절치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알맞지 않고,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부당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한 것이다. 바라드와자여, 어찌 그대는 비속한 나무로 만든 발우 때문에 재가자들에게 인간을 뛰어넘는 원리로서의 신통변화를 보여주는가? 바라드와자여, 예를 들어 여인이 비속한 마싸까 한 푼 때문에 속치마를 보여 주듯, 바라드와자여, 이와 같이 그대는 비속한 나무로 만든 발우 때문에 재가자들에게 인간을 뛰어넘는 원리로서의 신통변화를 보여주었다.” (Vin.II.112, 율장소품, 사소한 일의 다발, 전단목으로 만든 발우)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입니다. 외도의 스승도 신통 부릴 수 없는데, 바라드와자가 신통으로 고급 전단목 발우를 차지한 것에 대하여 여인의 치마비유를 들어 호되게 질책합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재가자들 보는 앞에서 신통을 부리는 것에 대하여 여인이 치마를 들어 올리는 것과 다름 없음을 말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재가자들에게 인간을 뛰어넘는 원리로서의 신통변화를 보여 주어서는 안된다. 보여주면 악작죄가 된다. 수행승들이여, 그 나무로 만든 발우를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수행승들의 연고에 섞은 향료로 나누어 주어라. 나무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지난다면 악작죄가 된다.” (Vin.II.112, 율장소품, 사소한 일의 다발, 전단목으로 만든 발우)
부처님은 전단목으로 된 발우를 부수라고 했습니다. 부수어서 가루로 만들어 전단목의 본래 용도인 향료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나무로 만든 발우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철발우와 도자발우만 가능한 이유
부처님은 나무로 만든 발우를 금지했습니다. 그러자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금은으로 만든 발우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는 율장소품 ‘사소한 일의 다발’ 발우(patta)편에 나오는 계율입니다.
발단은 이렇습니다. 율장소춤에 따르면 “한 때 여섯 무리의 수행승(六群比丘)이 갖가지 금으로 만들거나 은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녔다.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다.” (Vin.II.112)라 되어 있습니다.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 수행승들이 황금발우를 들고 다녔을 때 당연히 비난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찌 여섯무리의 수행승들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는 재가자들어처럼 갖가지 금으로 만들거나 은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닌단 말인가?”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부처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부처님은 육군비구를 불러 놓고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들은 적절치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알맞지 않고,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부당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어찌 그 어리석은 자들이 갖가지 금으로 만들거나 은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음과 같이 훈계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금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은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진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묘안석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수정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청동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유리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주석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납으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구리로 만든 발우를 갖고 다녀서는 안된다. 갖고 다니면 악작죄가 된다. 수행승들이여, 두 가지 발우 쇠로 만든 발우와 도자로 만든 발우를 허용한다.” (Vin.II.112, 율장소품, 사소한 일의 다발, 전단목으로 만든 발우)
율장을 보면 수범수제(隨犯隨制)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법이 다 그렇습니다. 먼저 잘못된 행위가 따르고 이어서 계율이 만들어지는 형식입니다. 발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처음에는 목발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단목으로 만든 발우’항목을 보면 신통변화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로 나무로 된 발우를 금했습니다. 이어서 금발우와 은발우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으로 고급발우는 금지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허용된 것은 철발우와 도자발우(흙발우)입니다.
플라스틱발우라면
테라와다불교 빅쿠들은 아침마다 탁발 나갑니다. 발우를 어깨끈으로 고정하여 앞으로 들고 다닙니다. 율장의 가르침대로라면 철이나 도자로 된 발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철이나 도자는 매우 무거울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현대라면 가벼운 프라스틱일지 모릅니다.
만약 부처님이 프라스틱 발우를 보았다면 무엇이라 할까? 부처님은 열반에 들면서 “아난다여, 내가 간 뒤에 승단은 원한다면 사소한 학습계율은 폐기해도 좋다.”(D16.123)라고 했습니다. 현시대에 플라스틱발우가 적합하다면 철발우와 도자발우는 폐기해도 될 것입니다.
“값비싼 동 발우와
화려한 황금 발우를 버리고,
흙 발우를 얻었으니,
이것이 제이의 관정이다.”(Thag.97)
2018-06-28
진흙속의연꽃
'율장의 가르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장은 재가불자의 필독서, 경전사보기 불사운동을 해야 (0) | 2018.07.31 |
---|---|
팔정도라는 뗏목으로, 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자 (0) | 2018.07.19 |
경율론이 아니라 율경론, 교계가 지속되는 이유 (0) | 2017.07.24 |
잘 경청할 줄 알아야 (0) | 2017.01.18 |
재벌 3세의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0) | 2016.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