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라는 뗏목으로, 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자
“현명한 님들은 다리를 만들어서
작은 못들을 버리고 큰 강을 건넌다.
사람들이 뗏목을 엮는 동안,
현명한 님들은 이미 강을 건넜다.”(Vin.I.230)
이 게송은 율장대품 약품의 다발에 나옵니다. 부처님이 빠딸리가마에서 갠지스강을 건너 밧지족의 영역에 들어 간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게송은 디가니까야의 ‘마하빠리닙바나의 경(D16)’과도 병행하고, 우다나의 ‘빠딸리가마의 사람들의 경(Ud.83)’과도 병행합니다.
게송에서 “현명한 님들은 이미 강을 건넜다. (Tiṇṇā medhāvino janā)”라 했습니다. 이 말은 주석에 따르면 “고귀한 길에 대한 앎의 슬기를 갖추었기 때문에 현자로서 뗏목없이 저 언덕에 이미 건너가 서있는 깨달은 님들과 깨달은 님들의 제자들을 말한다.”(UdA.424)라 했습니다.
빠딸리가마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2018년 1월 인도성지순례를 한 바 있습니다. 그때 당시 날란다에서 쿠시나가라로 향하는 길에 파트나(Patna)를 경유했습니다. 파트나는 갠지스강 하단에 있는 큰 도시입니다. 빠딸리뿟따라 하여 마가다국 말기의 수도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우리아왕조 수도이기도 한 유서깊은 도시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빠딸리뿟따의 기원이 되는 빠딸리가마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나중에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는 빠딸리뿟따라는 부처님 당시에는 빠딸리가마라 하여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마을이 나중에 크게 성장할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 초기경전에 등장합니다. 이와 관련된 구절을 보면 “이곳은 고구한 지역으로 무역로가 있는 한, 빠딸리뿟따 시라고 하는 재화가 모이는 으뜸가는 도시가 될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빠딸리뿟따 시에 불에 한 장애, 물에 의한 장애, 반목에 의한 장애의 세 가지 장애가 있을 것이다.”(Vin.I.229)라고 예언합니다.
부처님은 빠딸리가마가 대도시로 성정할 것을 예연했는데 동시에 세 가지 장애도 예언했습니다. 이에 대한 우다나의 주석을 보면 “도시의 일부는 꺼질 줄 모르는 불로 상실되고 일부는 갠지스강의 물이 넘쳐 상실되고 일부는 이러저러한 사람의 중상모략 등의 영향으로 갈라진 인간의 내적인 분열로 상실된다는 뜻이다.”(UdA.422)라 되어 있습니다.
세 왕조의 수도 빠딸리뿟따
파트나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습니다. 5세기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왕이 빠딸리뿟따라는 이름으로 세운도시입니다. 마가다국은 16대국 중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로서 기립밧자라는 이름을 가진 산곡성에서 시작했습니다.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기립밧자라 합니다. 산곡성에 나와 바로 인근의 평야에 자리잡은 도시가 초기경전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라자가하입니다. 마가다국은 라자가하를 수도로 삼아 번영했는데 아자타삿투 시대에 갠지스강 유역의 드넓은 평원으로 옮겼습니다. 그 도시이름이 부처님이 예언한대로 빠딸리뿟따라 합니다.
빠딸리뿟따는 마우리아와 왕조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마우리아와 왕조를 마가다국의 두 번째 왕조라고도 하는데 BC 3세기와 2세기 초까지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후 4세기에 굽타왕조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차츰 쇠퇴하여 7세기는 황폐화 되었고 완전히 잊혀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현재 파트나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인구는 91만명 가량됩니다.
인도순례 당시 파트나를 지나 갠지스강을 건넜습니다. 차창으로 보기에 강폭이 무척 넓었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마가다국과 밧지국의 국경이 되는 강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경을 보면 “밧지 족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을 축조하고 있었다.”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빠딸리가마는 무역로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 부처님이 오셨는데 큰 강을 쉽게 건넌 것에 대하여 게송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빠딸리가마라는 작은 마을은 나중에 빠딸리뿟따라고 하는 대도시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히 발전할 것 같았던 도시도 마가다국, 마우리아왕조, 굽타왕조 수도가 되면서 번영하였으나 불교의 쇠락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항에 대하여 부처님은 “불에 한 장애, 물에 의한 장애, 반목에 의한 장애의 세 가지 장애가 있을 것이다.”(Vin.I.229)라고 예언했습니다.
미혹한 상태로 죽음을 맞으면
부처님은 빠딸리가마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여 재가자들을 위해 법문했습니다. 수행승들이 아닌 재가자들에 대한 법문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계행의 공덕에 대해 법문했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행을 지니고 계행을 지키는 자는 큰 재산을 얻게돤다.
계행을 지니고 계행을 지키는 자는 선한 명성을 얻게 된다.
계행을 지니고 계행을 지키는 자는 당당하고 떳떳하다
계행을 지니고 계행을 지키는 자는 미혹하지 않은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다.
계행을 지니고 계행을 지키는 자는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Vin.I.229)
여기서 계행이라 하면 오계를 말합니다. 재가자에게 있어서 오계는 학습계율입니다. 지키기 힘들기 때문에 평생동안 받아 지녀 배우고 익히고 학습해야 합니다. 그래서 ‘계행을 지니고 계행을 지키는 자(Sīlava sīlasampanna)’라 합니다. ‘계행을 지니는 자(sīlava)’의 뜻은 “계행을 실천함으로서 계행을 지니는 자”를 말하고, ‘계행을 지키는 자(sīlasampanna)’의 뜻은 “청정하고 원만하게 계행을 준수하는 자”를 말합니다.
계행에 대한 다섯 가지 이익 중에서 네 번째 “미혹하지 않은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다.”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는 “미혹한 상태로 죽음을 맞는다.”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음의 침상에 누우면, 계행을 지키지 않은 행위들이 집적되어 전개되면서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눈을 뜨고는 이 세상을 보고 눈을 감고는 저 세상을 본다. 네 가지 괴로운 운명이 행위에 따라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백 개의 창에 찔리고, 타오른 불길에 불타는 것과 같다. 그는 ‘멈추어라. 멈추어라.’라고 외치며 죽는다.”(UdA.417)
아비담마에 따르면 임종시에 업과 업의 표상, 그리고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내세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죽음 직전에 지옥불을 보았다면 지옥에 날 것입니다. 더구나 ‘멈추어라. 멈추어라.’라고 외치며 죽는다고 했는데 악처의 표상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는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빠딸리가마라는 작은 마을에서 재가자들을 위한 법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16대국은 서로 대립하며 전쟁을 불사했습니다. 갠지스강을 사이에 두고 마가다와 밧지는 갈렸습니다. 부처님은 마가다를 지나 밧지로 건너가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갠지스강이라는 큰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마침 강물이 크게 불어 강둑까지 차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뗏목을 엮어서 강을 건너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천이백오십명의 제자들은 쉽게 강을 건넜습니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마치 힘 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이 갠지스 강의 이쪽 언덕에서 모습을 감추고 저쪽 언덕에 수행승들의 무리와 함께 나타났다.”(Vin.I.228)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게송에서 “사람들이 뗏목을 엮는 동안, 현명한 님들은 이미 강을 건넜다.”라고 했습니다.
피안으로 건너 가서 서 있는 자
큰 강을 사이에 두고 이 언덕(Orimaṃ tīraṃ)과 저 언덕(Pārimaṃ tīraṃ)이 있습니다. 그런데 물살이 거세어서 건너가기 힘이 듭니다. 이와 같은 거센 물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폭류를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있어야 합니다. 초기경전에서 뗏목은 팔정도를 의미합니다. 뗏목을 엮어서 네 가지 폭류를 지나 저 언덕에 도달하면 피안, 즉 열반입니다. 그래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 되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넓은 물이라는 것은 네가지의 거센 물결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 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두렵고 위험한 이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개체를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안온하고 평온한 저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열반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가지의 고귀한 길이다. 그것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한다는 것은 바로 정진과 노력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S35.238)
경에 따르면 이 언덕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라 했습니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다면 폭류를 건너서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저 언덕에 도달하려면 팔정도를 닦아야 합니다. 초기경전에서 팔정도는 뗏목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팔정도를 닦은 자만이 저 언덕,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에 대하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을 말합니다.
팔정도라는 뗏목으로
초기경전에서 부처님과 천이백오십명의 제자는 아라한을 뜻합니다. 모두 저 언덕으로 간넌 자들입니다.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서 저 언덕에 우뚝 선 자들이기 때문에 뗏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뗏목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려고 하는 자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유신견을 타파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남아 있는 번뇌를 모두 소멸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도로서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말합니다. 이때 팔정도라는 뗏목으로 저 언덕에 도달하는데, 저 언덕에 도달하면 더 이상 뗏목은 필요치 않습니다. 아라한의 단계입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모두 아라한이므로 뗏목 없이 갠지스강을 건너 저 언덕에 우뚝 섰습니다.
“저 언덕에 도달한 사람들,
사람들 가운데 매우 적으니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 언덕에서 매우 분주하네.
진실로 바르게 설해진 가르침을
원리에 맞게 따른다면,
저 언덕에 도달하리.
뛰어넘기 힘든 죽움의 왕국을 건너.”(S45.34)
2018-07-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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