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율장은 재가불자의 필독서, 경전사보기 불사운동을 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8. 7. 31. 08:56

 

율장은 재가불자의 필독서, 경전사보기 불사운동을 해야

 

 

참으로 이상합니다. 한국불교 스님들은 세상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스님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인 물질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지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불교 종단에서는 총무원이라는 정부조직을 만들어 감투를 쓰고 있습니다. 종회라는 이름으로 국회를 모방한 조직을 만들어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주지스님은 절 살림을 하며 통장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유튜브를 보면 스님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트로트를 구성지게 그것도 얼굴에 온갖 감정을 실어서 구수하게 노래합니다. 스님이 막춤을 춥니다. 스님이 그림을 그립니다. 스님이 요리를 합니다. 한국스님들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본업 보다 부업에 더 열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합니다. 스님이기에 스님 프리미엄으로 돈벌이 하는 것입니다.

 

스님이 되어 소유하고 부업에 열중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율장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경장을 보고 율장을 본다면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부끄러운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스님이 될 때에 비구계 또는 비구니계를 받았음에도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면 사실상 반승반속(半僧半俗)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세상것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반승반속은 문자그대로 반은 승려이고 반은 속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반승반속은 승려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세속인이라 볼 수 있을까? 미국에서 흑백간의 인종갈등은 심각합니다. 흑인 피가 한방울만 섞여도 흑인으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이를 피한방울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백인처럼 생긴 흑인이 흑인의 대열에 끼여 운동하는 모습이 이를 증명합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역모혼(逆母婚)’이 있습니다. 고대인도에서 상층카스트의 여자가 하층 카스트의 남자와 결혼하면, 여자는 하층계급으로 전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를 깍고 승복입은 승려가 세상사람들도 하찮게 여기는 부업에 전념한다면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승려가 승려의 본분사에 집중하면 승려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승려가 세상것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샌다면 그는 승려가 아니라 머리깍은 세속인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반승반속(半僧半俗)의 무리들은

 

반승반속의 무리들은 불자들의 귀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의지처도 될 수 없고 피난처도 될 수 없습니다. 이득을 탐하는 무리들은 곳간을 털어가는 도둑놈들과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세상것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반승반속의 무리들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1)오랫동안 처참한 곳의 고통을 받기 때문에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2)자기에게 시물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큰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3)여러 해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4)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처럼 [승과 속의] 둘 모두로부터 제외된다.

(5)비구라고 주장하지만 비구가 아닌 것이 마치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6)마치 모든 사람들의 적인 것처럼 항상 동요한다.

(7)마치 죽은 시체와 함께 살 수 없는 것처럼 그와 함게 살 수 없다.

(8)비록 배움 등의 덕을 가졌더라도 동료 수행자들의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나니

마치 화장터의 불이 바라문들의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9)수승한 법을 증득할 수 없나니 마치 장님이 색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10)정법에 대해 희망이 없나니 마치 천민의 아들이 왕위에 희망이 없는 것과 같다.

(11)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고통스럽다. 불의 무더기의 가르침(火聚經, A.iv.128-34)에서 설한 그런 괴로움을 받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제1장 계, Vism1.154)

 

 

반승반속의 무리들은 기본적으로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들입니다. 출가해서는 안될 자들이 생계를 위하여, 또는 도피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행위하는 것이 세속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반승반속은 승려라기 보다 세속인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라 했습니다. 또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 같아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라 했습니다. 이런 인간에게 공양해보았자 아무런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는 세상

 

반승반속의 무리들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합니다. 이른바 명리승(名利僧)’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날리고 동시에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말합니다. 또 이런 자를 명자승(名者僧)이라고도 합니다. 이름만 스님일 뿐 하는 행위는 세속의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말합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불행하게도 명자승들로 넘쳐납니다. 반승반속의 무리들이 종권을 장악하고 요직에 앉아서 매일 곳간을 털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도둑들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큰도둑을 큰스님으로 착각하여 공양하고 보시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가 왜 지경이 되었을까?

 

오늘날 한국불교는 극도로 타락한 상태입니다. 그렇게 된데에는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때문입니다. 정법은 사라지고 비법만 횡횡합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있지만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율장이 있지만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무지하기는 재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에 가면 스님이 매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열심히 하세요라는 말입니다. 스님이 하는 말을 믿고 기도만 열심히 할 뿐입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들의 건강과 안위에만 관심있을 뿐입니다. 절에 10, 20, 30, 아니 평생을 다녀도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 했는지 모릅니다. 설령 경전공부를 한다고 해도 금강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스님들과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관계를

 

재가불자들은 반승반속의 무리들에게 공양도 하지말고 보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승반속의 무리들은 사실상 재가자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공양하고 보시한다는 것은 재가자에게 보시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계를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하여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 보듯 해야 합니다.

 

재가불자들은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초기경전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빠알리니까야입니다. 요즘은 빠알리니까야가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그것도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습니다. 각자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됩니다. 반승반속의 무리들에게 공양하고 보시하느니 초기경전에 투자하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반승반속의 무리들에게 돈을 주면 그 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수 없지만 초기경전을 사 놓으면 집안의 가보가 됩니다.

 

재가불자들이 깨어 나야 합니다. 스님을 너무 믿어서는 안됩니다. 스님들과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너무 가까이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불자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은 삼보입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입니다. 승가라 하여 스님들의 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여법한 승가를 말합니다.

 

재가불자들도 율장을 보아야

 

재가불자들은 율장도 보아야 합니다. 율장은 경장 못지 않게 재가불자들에게 필독서입니다. 율장대품을 보면 불교교단의 성립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율장소품을 보면 승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흥미있게 접할 수 있습니다. 율장비구계와 율장비구니계를 보면 수행승들이 얼마나 계를 지킬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에서 율장은 금서나 다름 없습니다. 어느 율사스님은 율서 머리말에 재가자가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남방 테라와다불교권에서는 빅쿠들이 재가들에게 율장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재가자들이 율장공부를 하면서 얼마나 힘겹게 계를 지키는가를 보여 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은 율장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율장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율장은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가 번역해 놓은 율장대품, 율장소품, 율장비구계, 율장비구니계, 이렇게 네 권의 번역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부기라 하여 부록 하나만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율장이 중요할까?

 

경장과 논장을 잃어 버려도 율장만 있으면

 

흔히 빠알리 삼장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율장, 경장, 논장 중에 어떤 것이 가장중요할까?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계율의 위대한 의취는

품행이 방자한 자들에게 행복을 가져오니

악한 욕망을 지닌 자를 제어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자를 섭수한다.

 

2)

교계를 포함하는

일체지의 승리자의 활동경계로

다른 것이 없는 결계.

안온하여, 잘 시설된 것으로 의혹을 떨첬으니,

 

3)

율장안의 다발과

부수와 논모 가운데

의취에 따라 행하는

착하고 건전한 님은 이치에 맞게 실천합니다.

 

4)

소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가

소떼를 보호하지 못하듯,

계행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가 제어를 수호할 것입니까?

 

5)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

 

(크나큰 다발 후렴시, 율장대품 Vin.I.98)

 

 

다섯 번째 게송을 보면 경전과 논서를 잃어 버려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승가가 유지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승가의 맥이 단절된다면 가르침의 바퀴도 굴러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장에는 반드시 계율에 대한 가르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장에는 계율이 성립되기 까지의 과정이 실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율장대품을 보면 승가의 성립과정이 설명되어 있는데 가장 처음 나오는 대목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경장에 실려 있는 내용이 상당부분 중복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경장과 논장을 잃어 버려도 율장만 있으면 교단이 존속된다고 했을 것입니다.

 

경전사보기 불사운동을 해야

 

최근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기존 네 권의 율장번역서를 합본화 하는 작업을 금년 하반기에 착수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부록이라 볼 수 있는 부기도 새로 번역되어 추가됩니다. 모두 합하여 3천 페이지 분량이 될 것이라 합니다. 이런 일을 후원할 율사스님도 이미 있다고 합니다. 아마 내년에는 합본 율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합본화된 율장이 출간되면 스님들이 모두 한권씩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틈나는 대로 열어 보고 공부해야 한국불교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율장은 스님들 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에게도 필독서입니다. 스님들은 재가불자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이 율장과 경장과 논장을 많이 아는 것은 한국불교를 위해서 매우 바람직합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전국적으로 경전사보기 불사운동을 해야 합니다.

 

 

2018-07-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