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름을 남기려 하는가? 밤하늘의 이름 없는 별이 되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이 말은 유교에서 하는 말입니다. 현세적이고 현실적 이익을 중시하는 유교에서는 사후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개인 보다는 가문을 더 중요시하게 여깁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는 비난받습니다. 죽어서도 가문을 명예를 생각합니다. 이름을 남기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것입니다.
유명인들은 죽어서도 이름을 남깁니다. 그것은 산 자들에 의해서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백명인 사람과 만명인 사람하고는 차이가 날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천명을 만나기 힘들다고 하는데 만명, 아니 전국민에게 기억이 남을 정도이면 사람들의 기억속에 살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름 없이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 그가 인연 맺는 일부 사람들만이 기억할 뿐입니다. 가족이라 해도 세월이 흘러가면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사라지고 없지만 그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이름도 남기지만 흔적도 남깁니다. 길이 남을 책이나 위대한 예술작품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책을 쓰는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서 돌이나 쇠붙이에 새겨 넣기도 합니다. 절에 가면 돌기둥에 적혀 있는 시주자명단이나 종에 새겨진 명문 같은 것입니다.
본능으로만 살아 간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때 되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잡니다. 먹는 것과 번식하는 것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축생과 다름 없는 삶입니다. 축생들은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늘 굶주려 있기 때문에 먹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축생들이 악착같이 먹는 이유는 생존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큰 이유는 번식일 것입니다. 자신과 닮은 새끼를 낳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짝짓기를 하여 개체수를 늘려 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축생들에게 부여된 사명일 것입니다.
요즘 종종 유튜브에서 새의 부화나 동물의 출산에 대한 것을 봅니다. 유튜브에서는 태어남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수많은 동영상이 있습니다. 특히 강아지가 태어나는 장면을 보면 인간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됩니다. 인간과 다른 점은 한배에서 열마리 가까운 새끼들이 태어난다는 점입니다.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들이 필사적으로 어미 개의 젖에 매달립니다. 어미개의 배에는 두 열로 여러 개의 열 개 가량의 젖꼭지가 있습니다. 열마리의 새끼들이 젖꼭지를 빠는 장면을 보면 생명의 기적을 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어미개가 위대한 창조자처럼 보입니다.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은 어미의 젖을 빨며 두 주만 지나면 귀여운 모습으로 급격하게 성장합니다. 새끼들이 더 자라면 어미 반만 해져서 어떻게 한배에서 나왔는지 생명에 대한 경이가 일어납니다. 새끼들은 먹는 것이 일입니다. 끊임 없이 먹고 무럭무럭 커 나갑니다.
새끼들은 꼬리를 흔들며 어미의 젖을 향하여 달려 듭니다. 어미는 매번 젖 달라는 새끼들이 부담스러웠는지 달아납니다. 도망가는 어미개를 새끼들이 우르르 쫓아 갑니다. 먹고 번식하는 축생을 보면서 ‘이것이 축생의 삶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장면은 보여 주지 않습니다.
인간이 식욕과 성욕으로만 살아 간다면 축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축생과 구별되는 것은 생각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심이라든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여자를 찾지 말고 등불을
부처님이 우루벨라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서른 명의 지체 높은 공자들이 부인을 동반하여 부처님이 계시던 숲으로 놀러 왔습니다. 그 중에 한명은 기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기녀가 재물을 가지고 도망가버렸습니다. 공자는 부처님이계신 숲에 이르러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여자를 보았습니까?”(Vin.I.23)라며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공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에게 어떠한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 (Vin.I.23)
부처님은 여자를 찾지 말고 자기자신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나(我)’라는 존재의 근원을 찾자는 말은 아닙니다. 만일 부처님이 나를 찾자고 이야기 했다면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과 위배됩니다. 부처님은‘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라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대하여 의문하는 것은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 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찾는다’라 한다면 자신 안에서 참나를 찾게 될 것입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참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공자들에게 ‘자기자신을 찾아라’라 한 것은 주석에 따르면 “자기자신은 등불에 비유된다.”라 했습니다.
열한가지 불(火)에 대하여
부처님이 공자에게 여자를 찾는 것 보다 자신을 찾는 것이 더 급한 일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자신은 나(attā)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관용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자와 대비하여 나를 찾으라 했지만 가르침의 등불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등불과 관련하여 법구경에 “오, 어찌 웃고, 어찌 즐기는가? 언제나 세상은 불타고 있고, 그대들은 어둠에 덮여 있는데,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Dhp146)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웃고 즐기는 공자에게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에 따르면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불타고 있다.”(S35.28)라 했습니다. 그런데 법구경 주석(DhpA.III.103)에 따르면 열한가지 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탐욕, 성냄, 환상, 질병, 늙음, 죽음, 슬픔, 비탄, 절망, 과도한 노력을 말합니다. 차이가 나는 것은 ‘환상’과 ‘과도한 노력’입니다.
왜 과도한 노력이 파탄을 초래하는가
과도한 노력이 왜 열한가지 불에 해당되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경이 ‘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입니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너셨습니까?” (S1.1)라며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흐름을 건넜습니다.”라고 답합니다.
폭류를 건너려면 머물고 애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인생의 폭류를 건너는데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았다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합니다. 더구나 애쓰지 않는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잘못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라 했습니다.
공자가 여자를 찾는 것은 환상과 과도한 노력에 따른 것입니다. 폭류에서 애를 쓰면 쓸수록 빠져 들고 말 것입니다. 번뇌에 가득한 자가 과도한 노력을 했을 때 폭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고 말 것입니다.
여덟 가지 의혹에 대하여
공자가 재물을 가지고 달아난 여자를 찾는 것은 환상과 과도한 노력일 것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과 함께 환상의 불과 과도한 노력의 불에 불타는 열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갈애와 무명에 덮인 공자에게 부처님은 자기자신을 먼저 찾으라 했는데, 이는 무명을 밝히는 등불을 찾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공자에게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 (Vin.I.23)라 했습니다. 이 말은 법구경에서 “그대들은 어둠에 덮여 있는데,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Dhp146)와 같은 말입니다. 자기자신은 참나가 아니라 등불을 말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등불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여덟 가지 무지 때문이라 합니다.
법구경주석에 따르면 여덟 가지 무지는 여덟 가지 의혹으로 설명됩니다. 여덟 가지 의혹은 ‘부처님에 대한 의혹, 가르침에 대한 의혹, 참모임에 대한 의혹, 생성에 대한 의혹, 소멸에 대한 의혹,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혹, 연기에 대한 의혹, 조건적으로 일어난 것들[緣生]에 대한 의혹’(DhpA.III.78)을 말합니다.
의혹과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M16)에서는 네 가지로 설명됩니다. 즉, 스승에 대한 의심, 가르침에 대한 의심, 참모임에 대한 의심, 배움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런데 법구경 주석에서는 ‘소멸에 대한 의혹,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혹, 연기에 대한 의혹, 조건적으로 일어난 것들[緣生]에 대한 의혹’이 더 있습니다. 이러한 의혹은 번뇌만 야기할 뿐입니다. 특히 법에 대하여 의심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여자를 찾는 공자에게 자기자신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을 찾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여자를 찾아 헤매는 공자에게 부처님은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등 쉬운 가르침부터 설했습니다.
개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깁니다.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한 사람들 속에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유사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인물은 많지 않습니다. 자손과 주변 사람들을 제외하고 기억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것도 백년이 지나면 완전히 잊혀집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책을 내려 하고 돌에 새겨 놓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이름을 남긴 다는 것은 축생과는 다른 것입니다. 축생들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축생들은 잡아 먹히는 것으로 생이 마감됩니다. 적어도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생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 밖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개가 새끼들을 낳아 젖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식욕과 성욕에 따라 본능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개를 보면 한편으로 측은한 느낌이 들어갑니다. 어쩌다 개로 태어났을까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개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개의 행실을 닦는 자의 경’(M57)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개나 소와 같은 동물은 말도 못하고 사유도 못하기 때문에 번뇌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번뇌 없는 개처럼 살면 청정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외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개처럼 멍멍하고 개처럼 사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이름 없는 별이 되어
흔히 혐오스런 것에 대하여 개의 비유를 합니다. 개와 관련된 갖가지 욕설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개만도 못한 인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개는 사람을 속이거나 도둑질 하지 않습니다. 주인 말을 충실히 듣고 따릅니다. 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람 못지 않은 위안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오계를 어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 하는 등 사람만이 저지를 수 있는 악업을 지었을 때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개처럼 사는 자에 대하여 “그는 행위한 대로 태어납니다.”(M57)라 했습니다. 개의 흉내를 내는 자는 개의 행위에 적합한 업을 지었으므로 개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또 오로지 먹고 번식하는 일에만 열중한다면 동물적 삶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행위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최악은 개만도 못한 삶입니다. 살생을 하고 도둑질 하는 등 오계를 어겼을 때 역시 그 행위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날 것입니다.
개를 보는 것은 혐오스럽습니다. 그러나 개는 살생, 도둑질, 거짓말 등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개로서 업이 다하면 이전 생에 선업을 지어 놓은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선처에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 태어나 개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개만도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개처럼 살면 개가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이름을 날려야 하지만 더 좋은 것은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남이 알아 주지 않아도 됩니다. 이 세상에 와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 가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밤하늘의 이름 없는 별이 되는 것입니다.
2018-11-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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