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정의로운 삶(Dhammacariya)을 위하여, 설조스님 단식 39일차 7.28 보신각 토요촛불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8. 7. 29. 10:29

 

정의로운 삶(Dhammacariya)을 위하여, 설조스님 단식 39일차 7.28 보신각 토요촛불법회

 

 

찜통 같은 무더위의 나날에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입니다. 벌써 몇 일째 인지 모릅니다. 온도와 습도가 높은 나날입니다. 온도만 높고 습도가 낮다면 살만합니다. 열대지방이 아무리 덥다하더라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서늘합니다. 그러나 온도도 높고 습도도 높았을 때 그야말로 찜통더위가 됩니다. 요즘 한국의 날씨는 연일 찜통 같은 무더위의 나날입니다.

 

습도가 높았을 때 불쾌지수가 올라갑니다. 여기에 온도까지 높아서 온도와 습도가 쌍끌이할 때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럴 때는 집에서 가만 있는 것이 낫습니다. 찬물에 샤워를 하고 살랑살랑 부는 선풍기 앞에 앉아 있으면 이런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을 접어두고 찜통 같은 현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조스님 단식현장에 오는 사람들입니다. 또 매주 두 번 열리는 촛불법회에 참석하는 불교인들입니다.

 

어쩌다 세상에 나오니

 

오늘도 걷는다마는으로 시작되는 옛날 유행가 가사가 있습니다. 촛불법회가 열리는 날이면 정평불깃발이 든 길쭉한 가방을 메고 종각행 전철을 탑니다. 찜통 같은 날씨이지만 전철에 들어가면 서늘합니다. 전철 밖은 지옥이고, 전철안은 천국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무더운 여름날, 열대야의 계절에 에어컨이 있는 집은 천국이지만, 오로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하여 지내는 사람에게는 지옥인 것과 같습니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삶입니다. 이전에는 사회에 대하여 무관심했습니다. 내가 없어도 사회에 관심을 가지며 사는 사람들이 꾸려 나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집과 일터만을 왕복하는 단조로운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과 가족을 제외한 일에 신경 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어쩌다 세상에 나오니, 오프라인에 나오니 해야 할 일이 많아 진 것입니다.

 

요즘 일주일에 두 세 차례 귀가 하는 시간은 자정에 가깝습니다. 지난주의 경우 수요일에는 설조스님 외호모임, 목요일에는 7.26목요촛불, 금요일에는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 토요일에는 7.28촛불법회가 있었습니다. 한주에 네 번 자정 안팍의 시간에 집에 들어갔습니다.

 

찜통 같은 더위 불쾌지수가 극에 달합니다. 자정 무렵에 귀가하면서 대체 내가 무슨 짓 하는 거지?”라며 자문해 보기도 합니다. 남들은 일이 끝나면 가족과 함께 쾌적하고 안락한 저녁을 갖는데 불교개혁운동 한다고 하여 찜통 같은 더위와 싸우는 자신을 돌아 보게 됩니다.

 

설조스님 단식 39일째 되는 날

 

설조스님 단식 39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날 7.28 촛불법회가 보신각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한달 하고도 9일 째 되는 초인적인 단식입니다. 그럼에도 노장은 여전히 꼿꼿합니다. 한치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런 모습인 불교를 접하고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이런 스님이 있다는 것이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저녁 6시가 되자 보신각 광장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듭니다. 불과 일이십분만에 보신각 광장이 꽉 찼습니다.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찾아 온 불교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투성이인 도심에서 열섬으로 인하여 가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 저녁입니다. 바람 한점 불지 않아 끈적끈적 한 것이 불쾌하기 그지 없습니다. 남들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렇게 시간을 내서 일부러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보신각 광장이 꽉 차면 천명

 

보신각 광장이 꽉 차면 천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날 7.28촛불법회에는 전국각지에 온 불자들이 천명 이상 된 것 같습니다. 스님들은 이삼십명 가량으로 얼마 되지 않습니다. 조계종 적폐청산과 개혁이 스님들이 당면한 자신들의 문제임에도 참여가 매우 저조합니다. 승려대회를 8 23일 하겠다고 하는데 정말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정도입니다.

 



 

 

출재가역할분담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느 스님은 천명이나 되는 대중 앞에서 승려복지제도를 말했습니다. 스님들을 승려대회에 참여 시키기 위해서는 승려복지제도를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정투명화입니다. 단순하게 장부를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출가와 재가의 역할 분담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재가역할분담론은 승가에서는 오로지 수행과 포교만 담당하고, 재가에서는 재정과 운영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출재가역할분담론이 불교개혁의 핵심임에도 이를 스님들이 말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치 재가에서 모든 것을 가져 갈 것이라는 오해를 사기 때문이라 합니다.

 



 

승려복지를 말한다면 동시에 출재가역할분담론도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재가자의 참여명분이 됩니다. 이제까지 촛불법회가 매주 몇 달 동안 열렸는데 참가자는 대부분 재가자입니다. 만일 이번 승려대회를 열어 종권이 바뀐다면 과연 출재가역할분담론은 실현될 수 있을까? 또 예전처럼, 재가자는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해봅니다.

 



  

축제분위기 같은 촛불법회

 

확실히 많이 모여야 신이 납니다. 이날 보신각 광장에는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불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어느 불자는 울산에서 올라 왔습니다. 작년 스님들 단식현장에서 보았던 불자입니다. 블로그 친구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설조스님 단식 39일 째를 맞이 하여 도반과 함께 KTX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또 처음으로 촛불법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면 설조스님 단식이 있었는지 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불교신문과 불교방송에서 전혀 보도를 하지 않으니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날 7.28 보신각촛불법회는 축제분위기였습니다. 민중가수 이수진님이 바꾸어야 해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 모두 따라 부르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대의 구리 빛 얼굴에 흐르는 굵은 땀방울

아무도 손을 내밀어 닦아주지 않았네.

 

하지만 그대여 이젠 기다릴 수만은 없어

시간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으니.

 

세상의 참된 주인아 이젠 그대 눈을 떠야 해.

자신을 위해 이 세상을 위해 자리를 박차고 뛰어야 해.

 

이제는 바꿔야 해 모두 다 바꿔야 해

우리를 가두었던 그 썩은 모든 것들을 부숴버려야 해.

 

이제는 바꿔야 해 모두 다 바꿔야 해

그대와 나의 열정과 운명을 걸고.”

(이제는 바꾸어야 해, 이수진 노래)

 

 

수십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전국에서 올라온 불자들의 모습이 환해 보였습니다. 조계사불교대학학생들과 조계사신도들도 참여 했습니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참여한 단체로 포교사단도 있습니다. 총무원직할이라 볼 수 있는 단체의 반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대불련과 대불청에서는 깃발이 여러 개이어서 기세를 올리는 듯합니다. 이런 변화는 놀라운 것입니다. 불과 한달 전만 해도 고작 정평불과 참여불교재가연대 등 몇 개 단체회원 사오십명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에 균열이

 

며칠 사이에 큰 변화가 감지됩니다. 그것은 분위기 반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철옹성 같은 그들만의 리그에 균열이 가는 것 같습니다. 항상 외치는 구호가 설정퇴진 자승구속입니다. 설정스님은 총무원장에서 퇴진하는 것이 확실시 됩니다. 자승스님도 방재시스스템 비리 등으로 인하여 구속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참여자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 고생한 보람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스님, 단식을 멈추어 주십시오!”

 

이날 법회는 오후 6시에 시작해서 밤 9시 반경에 끝났습니다. 무려 3시간 반동안 끈적끈적한 날씨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보신각에서부터 행진을 하여 조계사를 한바퀴 돌아 설조스님 단식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천명이나 되는 대중이 조계사와 총무원을 포위하듯이 둘러싸며 설정퇴진 자승구속을 외쳤습니다. 대중들은 차도에 앉았습니다.

 

이날 마지막 중요한 행사는 설조스님 단식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 읍소하듯이 스님, 단식을 멈추어 주십시오!”라며 연신 외쳐댔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단식을 중단할 의향이 없음을 여러 가지 우회적은 이야기로 말했습니다.

 



 

정의로운 삶(Dhammacariya)을 위하여

 

한국불교는 권승들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치 힘센 자가 구역을 장악하여 이권을 차지하듯이, 마찬가지로 머리깍고 승복입은 권승들이 돈이 되는 사찰을 장악하여 매일 곳간을 털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다수 스님들과 불교인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침묵한다면 도둑들은 더욱 더 활개를 칠것입니다. 스님들과 불자들은 도둑들의 눈치를 보며 도둑들이 하자는대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들은 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초기경전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해서 물리쳐야 한다.”(D16)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 실려 있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스님이 한말이라 해서 모두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면전에서 반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스님이 한말을 경장과 율장을 열어 보아서 대조하라는 것입니다. 대조해서 맞으면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물리치라고 했습니다.

 

권승들의 행태를 보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경장과 율장에서 금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했을 때 도둑들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들은 도둑을 물리치고자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체하는 악한 욕망에 사로잡혀있고, 수행의 초원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 그 쌀겨들을 날려버려라.”(Stn.281)라고 말씀 하신 가르침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의로운 삶(Dhammacariya)’입니다.

 

적극적 참여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도둑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촛불법회에 참여하는 것은 정의로운 삶입니다. 촛불법회에 참여한 자들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정의파라 볼 수 있습니다. 끈적끈적하고 찜통 같은 더위를 무릅쓰고 열기나는 아스팔트에 앉았을 때 자부심을 느낄지 모릅니다. 또 한편으로 안락만 추구하는 자들을 원망할지 모릅니다.

 

촛불법회에 참여하는 자들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일부로 시간을 내서 돈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여도 지나고 나면 뿌듯한 추억이 됩니다. 그런데 나와야 할 사람이 나오지 않을 때 분노의 감정이 일기도 합니다. 모임이 다 끝났을 때 나타나는 자를 보았을 때도 비슷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아예 참여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의 불자들을 생각할 때는 나는 너희들과 달라!”라 할지 모릅니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 참여 했을 때 적극적 참여파가 있고 소극적 참여파가 있습니다. 적극적 참여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소극적 참여자는 불만의 대상입니다. 최근 몇 달 동안 조계종적폐청산을 위한 촛불에 빠짐 없이 참가했습니다. 정평불 사무총장이라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매번 빠지는 사람이나 거의 끝날 때 나타나는 사람을 보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아예 참여하지 않은 일반사람들 보다 더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자만(mana: )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왜 자만이 문제인가?

 

자만은 탐, , 치와 함께 제거해야 할 불선심입니다. 테라가타에 “다섯을 끊고 다섯을 버린 뒤 그 위에 다섯을 더 닦고 다섯 가지 염착을 마침내 극복하면 거센 흐름을 건넌 수행승이라고 불리운다.(Thag.15)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여기서 다섯을 버림은 오상분결로서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 비물질계에 대한 탐욕, 자만, 흥분, 무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만은 왠만해서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만은 탐진치와 달리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없어집니다. 아라한이 되어야 자만이 사라집니다. 그런 자만은 대개 내가 누군데또는 내가 누군데 감히로 나타납니다. 사장이라면 내가 명새기 사장인데라는 자만이 있습니다. 스님이라면 내가 스님인데라며 스님상을 세울 것입니다. 도와 과를 성취하여 아나함이 되었다면 내가 아나함인데라며 미세한 불선심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자아에 기반을 둔 자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세 가지 자만이 있습니다.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에 따르면 “세 가지 교만 곧,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 (Tisso vidhā: seyyo'hamasmī'ti vidhā. Sadiso'hamasmī'ti vidhā, hīno'hamasmī'ti vīdhā.)(D33) 라 했습니다. 자만에도 우월, 동등, 열등이라는 세 가지 자만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만은 기본적으로 자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사장이라면 자신을 사장이라는 직함과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그가 박사라면 내가 박사인데라며 자신을 박사라는 명칭과 동일시합니다. 그가 수행자라면 내가 수행하는데라며 수행하지 않는 자를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매번 촛불법회에 참여한자는 찜통 같은 무더위에 몸과 마음은 힘들어도 도덕적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아에 바탕을 둔 자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행자의 자만을 보면

 

도덕적 우월감에 바탕을 둔 자만은 어떤 것일까?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여 뛰어나다고 보는 자만은 우월적 자만중에서도 우월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월중우월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고행자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어느 출가자가 고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행을 크게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자만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 (Smv.999-991)라 합니다. 재가자의 경우라면 “내가 오계를 지키고 팔계를 지키고 포살일을 준수하는데 나 같은 자 있으랴?”라는 자만일 것입니다.

 

촛불법회에 나가는 것은 고역입니다. 찜통 더위에 남들은 편안히 쉬고 있는데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있다보면 이유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또 한편으로 누가 나같이 매번 촛불법회에 나오는가? 누가 나 같은 자가 있으랴?”라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는 고행자자의 우월중우월의 자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향후 한국불교에 큰 변화가 감지됩니다. 이런 조짐은 설조스님 단식현장에서 며칠 전부터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가시적인 효과로 설정스님 진퇴 관련 기자회견을 들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촛불법회에 참석한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견고한 범계승의 카르텔에 균열내기였습니다.

 

불자들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매번 목요촛불을 통하여 불교적폐청산을 외쳤습니다.마침내 범계카르텔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다음 달 초헌법적인 승려대회가 열린다면 개혁은 완성될 것입니다.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것을 불자들이 해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자만일 것입니다.

 

금강경에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긴 주되 티내지 말고 주라는 것입니다. 이는 아상(我相)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만에는 우월적 자만도 있지만 열등감도 자만입니다. 물론 동등감도 자만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면 자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식현장의 봉사자들과 촛불법회 참여자들을 매번 현장에서 만납니다. 그들에게서 내가 참으로 착한 일 하고 있다.”라는 아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아상이 있다면 이런 찜통 같은 무더위에 굳이 나와서 땀흘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상을 내려 놓았기에 오늘도 내일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할 뿐입니다.

 

 

2018-07-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