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암베드까르의 공정한 사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8. 8. 12. 23:56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암베드까르의 공정한 사회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로 생겼을까? 외모에 대하여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만인 사람도 있습니다. 왜 나의 성향은 이런 것일까? 외모 못지 않게 사람들 성향은 다릅니다. 왜 이렇게 사람마다 차별이 있을까?

 

 

바라문 청년이여,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업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업자성정견을 말씀했습니다.

 

업이 자신의 주인

 

정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입니다. 출세간적 정견은 팔정도에서 정견에 해당되는 사성제를 뜻합니다. 세간적 정견은 업이 자신이 주인이라는 업자성정견이 해당됩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M1170’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올바른 견해인가? 수행승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간적 정견은 ‘번뇌의 영향을 받는 것(sāsavā)’이라 했습니다. 탐진치 등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정견을 말합니다. 그래서 “보시도 있다. 제사도 있다. 공양도 있다. 선악의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등으로 표현되는 세속적 정견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간적 정견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함으로서 성립됩니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 하면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라 하며 빠알리어로 깜마삿깟따딧티(kammassakatādiṭṭhi)라 합니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안다면 얼굴이 서로 다름을 알게 되고 성향 또한 서로 다름을 알게 됩니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알게 된다면 윤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나 불가촉천민이 된다면 대단히 억울할 것입니다. 정평불의 8월 정평법회에서는 불가촉천민출신 암베드까르의 불교개종운동에 대한 박경준 교수의 법문이 있었습니다.

 




불가촉천민출신 암베드까르

 

암베드까르에 대하여 극히 상식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8월 법회를 통하여 암베드까르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대략 알 수 있었습니다. 불가촉천민출신으로 태어나 갖은 수모를 겪은 암베드까르에게 있어서 사회의 관습과 제도는 불합리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법문자료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암베드까르는 사회와 개인의 고통이 개인적인 요인보다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사회정의를 중시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비참함은 인간에 대한 불공정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오직 정의만이 이 불공정과 비참함을 제거할 수 있다.”(암베드까르, 이상근 옮김, 203p)

 

 

태어나 보니 불가촉천민이었다면 대단히 억울할 것입니다. 암베드까르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가촉천민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사회가 크게 잘못된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평생 상놈으로 살아 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출생에 따른 신분제도는 대단히 불합리 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암베드까르는 윤회설을 그다지 믿지 않았습니다. 윤회설은 힌두교의 교리가 유입된 것이라 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암베드까르는 교리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창작한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불가촉천민

 

암베드까르의 최대 관심사는 사회의 불공정과 불합리에 대한 해소였습니다. 자신이 불가촉천민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계급을 정당화 하는 듯한 윤회설을 믿지 않았고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새롭게 창작하기도 하는 등 열린 경전관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불가촉천민은 분명히 업자성정견과 관련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사람의 경(S3.21)’에 따르면 부처님이 빠세나디왕에게 대왕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비천한 가문인 짠달라의 집이나 죽세공의 집이나 사냥꾼의 집이나 수레를 고치는 집이나 청소부의 집이나 또는 가난한 집에 태어납니다.”(S3.21)라며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짠달라는 불가촉천민을 뜻합니다. 부처님은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그는 신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나쁜 일을 합니다.”라 했습니다. 전생에 악업을 지으면 그 업에 대한 과보로 악처에 나거나 인간과 같은 선처에 나더라도 낮은 지위의 가문에 태어남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짠달라와 같은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는 것은 업과 업의 과보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힌두교의 교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비록 불가촉천민일지라도 행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업을 지으면 어둠에서 빛으로 가듯이 선처에 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또 지금 여기에서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장사치가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왕이 됩니다.(stn651-652)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승(navayāna) 또는 신불교

 

불가촉천민출신 암베드까르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최대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제도와 관습과 인습을 바로 잡아서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불교 본연의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힌두교로부터 불교로 개종하는 불교개종운동을 펼쳤습니다. 이처럼 암베드까르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 불교에 대하여 신승(navayāna) 또는 신불교라고 합니다. 또 힌두교에서 신승불교로 개종한 불교신자들에 대하여 신불교도라고 합니다.

 

삼보는 이보(二寶)만 있는

 

어느 사회나 모순과 위선과 거짓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함에도 대부분 침묵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삼귀의문에서 승보개념이 정립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승보에 대하여 스님이라 합니다. 물론 스님 앞에 거룩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거룩한 스님들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삼보 중의 하나인 승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한국불교에는 삼보는 없고 이보(二寶)만 있다고 합니다.

 

한국불교가 개혁하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삼귀의문에서 승보개념부터 바로 잡는 것입니다. 승가를 스님으로 하는 한 처음부터 잘못 된 것이 됩니다. 이렇게 잘못 된 체로 5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너무 세월이 오래 되어서일까 불자들은 물론 스님들까지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승보를 스님으로 본다면 승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어 불자들로 하여금 이귀의(二歸依)하게 만들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삼보는 없고 이보만 있는 셈이 됩니다. 이는 제도가 잘못 된 것입니다. 오늘날 암베드까르가 있다면 사회정의 실현의 차원에서라도 바로잡기 운동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때 스님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탄생하게 됩니다. 부처님과 동급으로서 계급입니다. 본래 삼귀의에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는 동급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교단이기 때문에 부처님과 가르침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승들의 커뮤니티는 모두 부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승가의 자리에 스님을 놓았다면 부처님과 동급이 되어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암베드까르는 과학에 바탕을 두어 경전을 재해석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불가촉천민과 같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 보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베드까르의 열린 경전과 과학적 접근은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사회정의를 중시하다 보니 지나치게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심지어 창작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어서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설령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 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앗살라야나의 경(M9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쌀라야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쌀라야나여, 만약에 귀족가문, 왕족 가문,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이 사라수, 사라라수, 전단수, 또는 발담마수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있고, 광채와 광명이 있어, 바로 그 불꽃으로만 불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도 개 먹이통, 돼지 먹이통, 세탁통이나 엘란다 나무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없고, 광채와 광명이 없어, 그 불꽃으로는 불을 만들 수 없습니까? (M92, 전재성님역)

 

 

태생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바라문들에게 부처님은 땔감의 비유를 했습니다. 어떤 땔감에서도 불이 붙고 그 불의 형태는 모두 똑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바라문이 고급 전단향나무에 불을 붙인 것이나, 불가촉천민이 돼지먹이통에 불일 붙인 것이나 불의 화염과 광채와 광명은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모든 불의 형태는 재료에 관계없이 동일함을 말합니다. 어떤 땔감을 사용해도 불의 형태는 변함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라 말씀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땔감에서든지 불이 붙듯이, 불가촉천민일지라도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라도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출가자도 재가자도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라도 지혜로워 질 수 있습니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든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 앞에 평등합니다.

 

 








2018-08-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