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면 다친다, 중생은 늘 중생의 입장에서 보고 말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8. 9. 10. 13:19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면 다친다, 중생은 늘 중생의 입장에서 보고 말하고

 

 

사람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재미있습니다. 대부분 험담이기 쉽습니다. 사람을 안주 삼아 회자(膾炙)할 때 사람들은 눈이 빛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것일까?

 

재판거래 의혹으로 벌써 몇 달째 지리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정부에서 사법부 최고수장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 최고통치자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해 거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과연 판사는 판결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인격자라 볼 수 있을까?

 

호불호(好不好)와 쾌불쾌(快不快)에 따라   


사람이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만에 하나 오류가 있다면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업이 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호불호(好不好)와 쾌불쾌(快不快)에 따라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Tadantara ko jāneyya aññatra tathāgatena. Tasmā tihānanda mā puggalesu pamāikā ahuvattha, mā puggalesu pamāa gahittha. Khaññatihānanda puggalesu pamāa gahanto. Aha vā ānanda puggalesu pamāa gaheyya, yo vā panassa mādiso.

 

“그러나 여래를 제외하고 그 차이를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A6.44, A10.75)

 



 

이 경은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두 번 나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여섯 모음과 열 모음에 실려 있는 미가쌀라의 경(A6.44, A10.75)’이 그것입니다. 이 경에 대하여 자아와 자만에 기반하여 사람을 평가하면(2017-07-14)’라는 제목으로 번역비교한 바 있습니다.

 

번역비교 과정에서 탈역과 잘못된 번역을 발견했습니다. 탈역과 관련하여 빠알리성전협회 번역문에서는 “Tadantara ko jāneyya aññatra tathāgatena”가 번역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이를 글에서 지적했습니다. 이번에 통합본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그러나 여래를 제외하고 그 차이를 누가 알겠는가?”라는 문구가 추가된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번역 비교글에서 지적된 것이 적용 되었을 때 기쁨을 느낍니다. 특히 탈역을 찾아 내기 어려운데 이를 번역비교하면 드러납니다. 니까야를 한번역서에 의존하기 보다는 두 번역서에 의존하면 여러 모로 얻는 것이 많습니다. 또한 번역이라는 것이 반드시 한사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과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완성해가는 합작품임을 실감합니다.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을 가졌을 때

 

사람에 대한 평가는 부처님만이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부처의 경지에 오른 성자만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범부들이 범부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려 했을 때 잘못된 판단이기 쉽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본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가 그렇습니다.

 

부처님 당시 여신도 미가쌀라는 자신의 아버지인 뿌라나와 삼촌인 이씨닷따를 평가했습니다. 아버지 뿌라나는 계행을 잘 지켜 청정한 삶을 살아 불환자가 되어 천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삼촌인 이씨닷따는 계행이 청정하지 못했음에도 역시 불환자가 되어 천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미가쌀라는 이것이 자신이 판단했을 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청정한 삶을 산 사람과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산 사람이 모두 불환자가 되어 천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이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범부는 한쪽 면만 보고 다른 쪽 면을 보지 못합니다. 미가쌀라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삼촌 이씨닷따는 계행이 청정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지혜가 있었습니다. 일시적인 해탈의 성취가 있어서 악처로 떨어지지 않고 불환자가 되어 천상에 태어났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말라.”라 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사람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이 평가 했을 때 오류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개입하면 잘못 평가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미가쌀라는 자신의 주관적 판단으로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최대의 욕은

 

사람을 평가하면 다치기 쉽습니다.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되돌아 옵니다. 사람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했을 때 비난 받기 쉽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평가한 미가쌀라에 대하여 아난다여,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 어리석고, 슬기롭지 못하고, 아낙의 지혜를 지닌 어리석은 여자는 누구인가?”(A6.44, A10.75)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최대의 욕은 무엇일까?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에 따르면 어부의 아들 사띠(sati)가 부처님에게 들은 것이라면서 사람들에게 “의식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M38) 라고 떠들고 돌아다녔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해석하여 나를 잘못 대변하고, 스스로를 해치고 많은 해악을 쌓는다.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M38) 라고 사띠비구를 나무랐습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최대의 욕은 이 어리석은 자여! (te moghapurisa)”입니다. 어리석다라고 말하는 것은 최대의 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는 자신의 판단으로 사람을 평가하여 부처님에게 어리석은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 (A6.44, A10.75)라 했습니다. 자아에 입각한 자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자아와 자만에 가득 찬 자가 자신의 주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잘못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사람의 다양성에 대해 아는가?

 

미가쌀라는 계행이 청정한 삶을 살다 죽은 아버지가 불환자가 되어 천상에 태어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계행이 청정하지 못한 삼촌이 똑같이 불환자가 되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계행 하나만 놓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미가쌀라에게 사람의 다양성에 대하여 어떠한 앎을 지니고 있는가? (Ke ca purisapuggalaparopariyañāe?)”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난다여, 뿌라나가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씨닷따가 그러한 계행을 성취했더라도, 뿌라나는 이씨닷따의 삶의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삶의 길을 갔을 것이다. 아난다여, 이씨닷따가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뿌라나가  그러한 계행을 성취했더라도, 이씨닷따는 뿌라나의 삶의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삶의 길을 갔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고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A6.44, A10.75)

 

 

아버지의 길과 삼촌의 길은 달랐던 것입니다. 아버지 뿌라나는 계행이 탁월했고, 반면에 삼촌 뿌라나는 지혜가 탁월했습니다. 아버지의 기준으로 본다면 삼촌은 계행이 청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미가쌀라는 삼촌의 지혜가 탁월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계행은 눈에 보이지만 삼촌의 지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재가여신도 미가쌀라는 사람을 제대로 보지 하고 사람의 다양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계행이 청정하지 못해도 견해가 바르고 일시적으로도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다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선처에 태어납니다. 미가쌀라의 삼촌 이씨닷따가 그랬습니다. 미가쌀라는 사람의 다양성(purisapuggalaparopariya), 즉 사람들의 근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한쪽 면만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두 사람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고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A6.44, A10.75)

라 했습니다. 재가여신도 미가쌀라는 사람의 다양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정어(正語)를 생활화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이면 남 말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재미 있는 것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개 험담이기 쉽습니다. 그래서일까 팔정도에서는 “1) 거짓말을 하지 않고 2) 이간질을 하지 않고 3)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4)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언어라고 한다.”(S45.8)라 했습니다.

 

정어(正語)를 생활화 하지 않으면 이간질 하고 꾸며대는 말 하기 쉽습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을 안주로 했을 때 구업 짓는 것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아난다여, 그것에 대하여 평가하는 자가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그 성품이 있고, 저 사람에게도 그 성품이 있다. 어째서 그들 가운데 하나는 열등하고 하나는 탁월한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오랜 세월 불익과 고통이 된다.” (A6.44, A10.75)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자가 자신의 판단으로 이 사람에게 그 성품이 있고, 저 사람에게도 그 성품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열등하고 탁월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근거로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자아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잘못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더구나 그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가 개입되었을 때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자아에 기반을 둔 판단은 우월과 동등, 열등이라는 자만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여기에 분노와 탐욕이 개입되었을 때 미가쌀라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기 쉽습니다. 정어를 생활화 하지 않으면 그에게 오랜 세월 불익과 고통이 된다.”라는 가르침으로 귀결됩니다.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면 다친다

 

판사는 사건을 판결합니다. 여러 자료를 취합하고 증거를 확보하여 나름대로 판결을 내립니다. 그렇다고 판사의 판결이 완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판사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아와 자만으로 가득 찬 자라면 공정한 재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재판거래 의혹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중생은 늘 중생의 입장에서 보고 말하고 판단합니다. 자아관념을 가진 범부가 범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자아개념을 가진 중생이 자아개념을 가진 중생을 평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깨달은 자만이 중생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관념을 내려 놓은 성자는 자아를 기반으로 한 중생들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인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Ud.64, S3.11, A4.192)라 했습니다. 범부들이 깨달은 자를 알아 보기 어려움을 말합니다.

 

자아에 기반하면 어떤 판단도 정확하게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정확한 판단은 자아를 내려 놓았을 때 가능합니다. 자아를 버린 무아의 성자만이 가장 정확하게 사람에 대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를 제외하고 그 차이를 누가 알겠는가?”(A6.44, A10.75)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A6.44, A10.75)라 했습니다. 자아에 기반하고 자만에 가득 찬 자 범부는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범부가 사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평가하면 다칩니다.

 

 

2018-09-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