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공덕짓기에 좋은 날, 담마와나선원 까티나축제 법요식
까티나행사 탁발장면
일단의 수행승들이 무리를 이루어 일렬로 지나갑니다. 검붉은색 계통의 가사가 대부분이지만 짙은 노랑색 게통의 가사도 보입니다. 그들은 맨발입니다. 그날 아침 서울의 날씨는 영상 8도로 쌀쌀했습니다. 더구나 비가 내린 후라 기온은 평소보다 더 내려간 상태이었습니다.
탁발승들이 저 멀리서 걸어 오자 신도들은 차례로 줄지어 서서 준비한 것을 발우에 집어 넣습니다. 이날 음악씨디 열장을 보시했습니다. 발우에 들어간 것은 부피가 있기 때문에 옆에 시중을 드는 사람에 의해 다시 꺼내져서 따로 보관됩니다. 신도들은 합장을 하고 고개를 깊이 숙여 지극한 존경의 예를 표합니다. 까티나 행사에서 탁발하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율장정신대로
2018년 10월 28일 일요일 오전에 한국테라와다불교 담마와나선원 까띠나축제 법요식에 참석했습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이 좋은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 열린 것도 참가이유입니다. 경주나 울산 등 먼 곳에서 열리면 이동시간도 길도 비용도 많이 들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의 절반이 모여 사는 수도권에서 행사가 열린다면 부담 없이 참가할 수 있습니다.
까티나행사에서 맨발의 탁발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명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것은 한국불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조계종에서는 탁발하는 것이 승려의 위의(威儀)를 해친다하여 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종 거리에서 탁발하는 승려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 가게나 불쑥 들어가서 목탁을 치는 행위를 보면 여법하지 않아 보입니다.
까티나행사에서 본 탁발장면이 ‘보여주기식’일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이런 행사에 대하여 ‘퍼포먼스한다’거나 ‘쇼한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설령이 그것이 쇼일지라도 한국적 현실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여법한 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탁발정신입니다. 탁발할 수 있는 환경은 되지 않지만 율장정신만은 잊어 버리지 않겠다는 것과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정신을 말합니다.
겉모습보다 내용이 더 중요
담마와나선원은 올해 5월에 개원했습니다. 4월에 현재의 자리인 청파동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전에는 장충동 우리는함께 빌딩 6층에 있는 ‘우리는 선우법당’을 활용하여 활동했습니다. 이번 까티나축제에 참가함으로 인하여 또 한번 인연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가할 때마다 기록을 남겼습니다.
담마와나선원은 매우 작습니다. 상가겸주택이라 볼 수 있는 3층짜리 작은 건물에 세들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비좁기 그지 없습니다. 법당이라 볼 수 있는 너른 홀은 아파트 거실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날 까티나축제 법요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약 30명 가량인데 밀도가 높아 꽉 찬 느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서울에 거점을 확보했다는 의미에서 한국테라와다불교 입장으로 보았을 때 매우 소중한 공간이라 생각됩니다.
종교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종교시설물을 보면 저절로 경외감이 일어납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고딕식 성당, 마치 체육관처럼 보이는 거대한 교회, 그리고 엄청난 크기의 대불이 있는 사찰을 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하게 만듭니다. 이에 비하여 이제 창립 9년 밖에 되지 않는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서울 담마와나선원은 매우 협소하여 보기에도 초라하고 빈곤하게 보입니다. 그래서일까 이날 사회를 맡은 빤냐수라 신도회 부회장은 “좀더 크고 여법한 가람이었으면 좋겠지만 겉모습보다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종교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신도수가 많고 성전이 크다고 하여 경쟁력이 있는 것일까? 종교의 경쟁력은 ‘청정’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인이 얼마나 청정한 가에 따라 미래가 결정됩니다. 지금 비록 세가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근본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이 많다면 흥기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 그런 조짐을 보았습니다.
식순에 따라 여법하게
까티나축제 법요식은 준비된 식순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준비된 프린트물은 13페이지에 달합니다. 한국불교 법회의식과 달리 빠알리어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굵은 글씨로 음역된 빠알리어가 나오고 그 밑에 줄에 로마나이즈화된 빠알리 원문이 표기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줄에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날 법회에서는 시간 관계상 한국어는 생략하고 모두 빠알리로만 진행되었습니다.
까티나축제 법요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준비한 공양물을 올렸습니다. 선원 불자들은 정성스럽게 준비한 가사와 일반공양물, 그리고 보시금을 아홉 분의 빅쿠들에게 올렸습니다. 다 올린 다음에는 테라와다식으로 삼배를 했습니다. 무릎 꿇고 앉은 그 자리에서 두 손과 이마를 바닥에 대어 삼배하는 방식입니다.
법회의식에서 가장 먼저 대중들이 낭송하는 것은 “나모 땃사 바가와또”로 시작 되는 예경문입니다. 모두 세 번 제창합니다. 이후 준비된 식순에 따라 진행 되는데 가장 마지막으로 삼귀의제창과 오계를 받아 지니는 것으로 끝납니다.
오계는 학습계율(sikkhāpada)
한국불교 법회에서는 오계를 받아 지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의 특징은 반드시 삼귀의와 함께 오계를 받아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계가 ‘학습계율(sikkhāpada)’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계가 지키기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래서 법회할 때 마다 받아 지녀서 배우고 익혀야 함을 말합니다.
마치 깨달음이 단계적으로 완성되듯이, 계율도 단계적으로 완성됩니다. 오계는 물론 수행자들이 받는 구족계 역시 학습계율이라 하여 단계적으로 완성됩니다. 보름마다 포살일에 계목을 외는 것도 구족계가 학습계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계율은 학습계율입니다. 배우고 익히고 습관화 되었을 때 완성됩니다. 그래서 포살일 마다 또는 법회 때 마다 계를 받아 지니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담마와나선원에서 오계를 보면, 불살생계에 대하여 “살아 있는 생명 해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니겠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어는 ‘멀리하는’(veramaṇī)이라는 말과 ‘받아지닌다’(sikkhāpada)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받아 지닌다’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은 “학습계율을 받아 지니겠습니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는 빠알리어 식카빠다(sikkhāpada)가 ‘steps of training’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으로 단계적으로 완성됨을 말합니다.
담마와나 오계에서 돋보이는 것은 가장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오계를 잘 지키겠습니다. (imāni pañca sikkhāpadani samādiyami)”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세 번 합니다. 법회할 때 마다 이렇게 오계를 새로 받아 지니는 것이 테라와다불교의 특징입니다.
대가사(saṅghāṭi)를 펼치니
까티나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사를 올리는 행사입니다. 수행승들의 사대필수품 중의 하나인 가사를 올리는 것이야말로 까티나행사에서 가장 핵심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사는 ‘대가사(saṅghāṭi)’입니다.
가사를 개별 빅쿠에게 올리기 전에 가사를 넓게 펴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검붉은 색 계통의 가사를 펼치니 무척 큽니다. 세 방향에서 불자들이 가사를 머리 위로 잡은 상태에서 빅쿠가 꽃을 뿌렸습니다.
이날 까티나축제 법요식에 참석한 빅쿠는 모두 아홉 명입니다. 이름을 열거할 때받아 적었습니다. 차례로 빤냐와로, 수마나, 떼짓사라, 빤냐완따, 알로까담미까, 빤냐왐사, 로까히따, 나타난다, 떼자사미 이렇게 아홉 분의 빅쿠가 참석했습니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네 명이 모이면 상가라 볼 수 있는데, 이날 아홉 분이 참석했으니 여법한 상가가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승리의 게송을 보면
여법한 상가가 구성된 상태에서 여법한 까티나 법요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불자들이 가사를 머리 위로 하여 공양을 할 때 빅쿠들은 까티나 가사의 공덕을 찬탄하는 ‘승리의 게송’을 독송했습니다. 프린트물에 실려 있는 한글번역문 중에 1번과 2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중생들의 의지처이신 부처님의 위대한 연민의 정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의 이익을 위해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추셨고,
스스로 최상의 바른 깨달음 이루셨네.
이와 같은 진실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항상 성공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보리수 아래에서 다섯 무리의 마라를 정복하신 부처님께서
뭇 중생들 더욱 기쁘게 하셨듯이,
저희들도 여러 장애 극복하여 승리의 길상 성취하기를!”
승리의 게송에서 핵심구절은 “우리에게 항상 성공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나에게도 임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야망갈라가타에서 후렴구라 볼 수 있는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Taṃ-tejasā bhavatu te jayamaṅgalāni)”라는 구절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승리의 게송을 보면 승리(jaya)와 길상(maṅgalā)을 뜻하는 ‘자야망갈라(jayamaṅgalā)’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승리자들에게 올리는 공양
여법하게 안거를 마친 빅쿠들은 승리자일 것입니다. 이런 빅쿠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커다란 공덕이 될 것입니다. 특히 안거가 끝난 다음 까티나행사에 올린 공덕이 가장 클 것입니다. 왜 그럴까? 막 안거가 끝난 빅쿠는 매우 청정한 상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이 악마와 싸워 악마의 군대를 물리쳤듯이, 치열한 수행정진 빅쿠들은 승리자라 볼 수 있습니다.
승리자들에게 올리는 공양은 그 어떤 다른 공양보다도 훨씬 수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빅쿠는 “올려진 공양물은 크나큰 결과를 가져오며, 선한 행위는 내생에서 행운을 가져다 준다네.”라고 축원을 해줍니다. 이에 재가자들은 다음과 같이 공양물을 올리는 게송을 독송합니다.
“존경하는 스님,
여기 마련한 안거 해제 후 까티나 가사와 함께
상가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양 올립니다.
존경하는 스님들께서는 저희들이 마련한
안거 해제 후 까티나 가사와
상가에 필요한 물품들을 받으시어,
이와 같은 인연으로 저희들의 복덕이 증장되고
금생에서 행복하며 향상됨이 있어
다음 생도 평안하길 바라나이다.”
재가자들이 올린 가사와 공양물, 그리고 보시금은 빅쿠들에게 전달됩니다. 이 중에서 빅쿠들에게 필요한 것은 네 가지 필수품 중에 하나인 가사입니다. 나머지는 상가에 보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때 대가사는 불단 앞에 놓여집니다.
여법한 보시물에 대하여
보시물은 여법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사 등 공양물을 받은 빅쿠는 상가에 물어 보는 절차를 갖습니다. 두 명의 빅쿠가 상가를 구성하는 장로를 비롯한 빅쿠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존경하는 상가 스님들께서는 저의 말을 들으십시오. 상가를 위해 이러한 까티나 가사가 생겼습니다. 만약 적절하다면 상가는 이 가사를 떼자사미 스님에게 주어 까티나 가사로 만들게 하였으면 합니다. 이것이 표백입니다.”
여기서 떼자사미스님은 담마와나 선원장을 말합니다. 두 명의 빅쿠가 상가의 빅쿠들에게 여법하게 보시 받은 가사를 수용해달라고 말합니다. 두 명의 빅쿠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합니다.
요청하는 말 중에 “이것이 표백입니다.”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여기서 표백이라는 말은 ‘khamati’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로 ‘is patient; endures; forbears; pardons’의 뜻입니다. 한자어로 ‘용인(容忍)’의 뜻도 있기 때문에 “이것이 표백입니다.”라는 말은 “용인해 주십시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봅니다.
두 명의 젊은 빅쿠가 요청했을 때 이의 제기함이 없다면 보시물은 여법한 것이 되어서 받아 들이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상가의 모든 빅쿠가 ‘좋습니다, 훌륭합니다.’의 뜻으로 “사두, 사두, 사두”라 하면 가사를 수용하게 됩니다.
재가자들이 올린 가사는 여법한 것이어야 합니다. 재가불자들이 올린 가사가 상가 빅쿠들에게 수용됨에 따라 빤냐와로 장로빅쿠는 “존경하는 상가 스님들, 상가에 까티나 가사가 배분되었습니다. 올바르게 헌납된 까티나 가사, 우리는 이것을 승인합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에 재가자들은 모두 “사두, 사두, 사두”라 합니다.
대가사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나
여법하게 올린 가사가 여법하게 수용되었을 때 비로서 법문이 시작됩니다. ‘빤냐완따’ 빅쿠가 까티나가사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출가하게 된 인연담을 말했습니다.
빤냐완따 빅쿠에 따르면 경전의 한문구가 출가하게 된 동기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오기 전에 한역 장아함경을 말합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승가리를 말아서 배게로 하여 누으시고”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승가리’는 빠알리어로 상가티(saṅghāṭi)를 말하며 대가사라 합니다.
상가띠는 삼의 중에서 겉옷을 말합니다. 아랫가사 (antaravāsaka)와 윗가사( uttarāsaṅga)와 함께 삼의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대가사는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자리에 편 것은 대가사, 즉 상가띠입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을 찾아 보니 “쭌다까여,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아라. 쭌다까여, 피곤하니 누워야겠다.(Iṅgha me cundaka catugguṇaṃ saṅghāṭiṃ paññāpehi. Kilanto'smi cundaka nipajjissāmī)”(D16.105)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가사는 분명히 상가띠(saṅghāṭi)라 되어 있습니다.
대가사는 평소에는 어깨에 매고 다닙니다. 그런데 대가사는 다목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겨울에 추울 때는 겉 옷이 되어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해 줍니다. 노지에서 잠을 잘 때는 침구가 되기도 합니다. 무소유로 유행하는 빅쿠에게 세 벌의 옷과 발우 하나가 전부 입니다. 그래서일까 남방 테라와다 빅쿠들을 보면 어깨에 담요처럼 말아진 대가사를 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날 까티나축제에 대하여 설명한 빤냐완따 빅쿠도 왼쪽 어깨에 대가사를 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날 재가불자들이 보시한 가사는 커다란 넓이의 대가사였습니다.
빼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빤냐완따 빅쿠는 까티나축제 의미를 설명하면서 테라와다불교는 보수 중의 보수라 했습니다. 그것은 한번 정해진 것은 왠만하면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암송하여 전승된 단어 중에는 틀린 것도 지킬 정도라 하여 테라와다불교에 대하여 보수대원칙의 교단이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급적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했던 그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가사도 부처님 당시의 것을 고수합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특히 율장정신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첫째, 부처님이 정해준 율법대로 삽니다.”라고 말하면서 “둘째, 부처님이 정해주신 원칙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셋째, 부처님이 정해주신 원칙에서 보태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원칙에서 빼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는 엄격한 원칙주의를 말합니다. 이런 노력이 있기에 지금까지 부처님 가르침이 훼손 없이 전승되어 왔을 것입니다.
까티나가사의 유래에 대하여
빤냐완따 빅쿠는 까티나가사의 유래에 대하여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는 율장대품 ‘제7장 까티나옷의 다발’에 실려 있습니다. 말라족의 빠바(Pāvā) 시에 사는 빅쿠들이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사밧티 시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빅쿠들은 삼의일발로 청정하게 살아 갔습니다. 부처님을 찾아 가는 도중에 안거철이 되어 도중의 사께따 시에서 3개월 안거에 들었습니다. 안거가 끝난 후에 사밧티 시로 출발했는데 도중에 폭우를 만나 흙탕물에 젖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부처님에게 말하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안거를 보낸 수행승들이 까티나옷을 성립시키는 것을 허용한다.”(Vin.I.253)라 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인연으로 까티나 행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빤냐완따 스님에 따르면 그때 당시에는 재가자들이 보시한 천을 모아 옷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을 모아서 한달 안에 가사를 만들고 염색하는 것이 까티나 가사의 시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안거가 끝난 후 삼의 이외에 여벌의 가사를 특별히 허용한 것이 까티나 축제의 시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교 최대의 명절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다음으로 큰 명절은 한국의 경우 우란분절일 것입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도 붓다데이와 까티나축제가 최대의 명절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날자도 다르고 형식도 다릅니다. 스님들 옷 입는 것도 달라서 모든 것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공덕짓기에 좋은 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행사를 담마와나선원에서 보았습니다. 그런 담마와나선원에서는 한국의 법당에서 볼 수 있는 울긋불긋 단청도 없습니다. 천정에 등도 매달려 있지 않습니다. 불단에는 오로지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만 모셔져 있습니다.
이날 까티나축제의 날에 한국테라와다불교 장로인 빤냐와로 빅쿠는 “오늘은 공덕짓기에 좋은 날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안거를 마친 빅쿠들이 그 동안의 수행정진으로 인하여 가장 청정한 상태인데, 이런 빅쿠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다른 때에 보시하는 것과 비할 바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기쁨으로 보시하면 큰 과보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맨땅에 해딩하듯이
유튜브에서 서울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외국인이 자신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을 소개할 때 주류종교가 크리스쳐너티(Christianity)라 했습니다. 종교조사를 하면 한국인들의 절반은 무종교인지만 종교를 가진 자의 경우 1위는 개신교입니다. 그 다음이 불교이고 그 다음이 천주교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하면 불교의 두 배 가량 됩니다. 더구나 대한민국 방방곡곡 교회 십자가 천지이니 외국인의 눈에는 주류종교가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보일 것입니다.
불교는 이제 한국에서 주류가 아닙니다. 이전에는 주류였지만 메인스트림에서 밀려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청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창립한지 9년 밖에 되지 않는 신생교단인 한국테라와다불교는 청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부처님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어로 예불을 하고 부처님 당시처럼 살고자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한국의 종교시장에서 테라와다 불교는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청정을 생명으로 하는 테라와다교단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기성불교처럼 조상들이 남겨준 유산이 없습니다. 마치 맨땅에 해딩하듯이, 모든 것을 제로제로베이스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알려져 있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맨발로 탁발하는 모습이 퍼포먼스로 보일지라도 한국불교 현실에서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어느 불교매체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도래승이 아닌 구법승의 상가
흔히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 들인 것도 인도의 불교문화가 중국의 도교나 유교문화 보다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역이나 인도에서 도래승에 의해 전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자 구법승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현장스님이 대표적입니다.
구법승이 인도에 직접 가서 불교를 배워 왔을 때 중국에서 비로서 불교가 꽃을 피웠습니다. 문화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된 것임을 말합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불교가 처음 전래 되었을 때 도래승의 역할이 컸지만, 어느 정도 수용가능 하면서부터는 의상스님 등이 당나라에 유학가서 불교를 배워 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불교의 황금기를 맞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남방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 불교를 배워 온 스님들이나 재가불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불교에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문화현상으로 설명됩니다.
현재 한국에는 스리랑카, 미얀마 등에서 온 도래승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남방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 계를 받고 수행을 한 구법승들 활약도 보입니다. 도래승과 구법승이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법승들이 비교적 짧은 시기에 한국적 토양위에서 교단을 설립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불교역사에 있어서 큰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테라와다불교가 한국에서 토착화가 진행중임을 말합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가 비록 지금은 미미할지라도 청정성만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크게 발흥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이는 도래승의 불교가 아닌 구법승의 불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번 까티나 행사를 보면서 한국불교 미래를 보았습니다.
가르침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아
까티나축제를 맞이 하여 빤냐와로 테로의 글에서 인상적인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유지 운영은 재가자의 의무이고 사원은 사방상가의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이 말은 요즘 조계종 적폐청산과 관련하여 재정투명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물려 받은 유산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을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 하고 있습니다. 청파동의 허름한 장소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가 한국불교에서 물려 받은 유산은 없지만 그대신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
빤냐와로 테로는 보시와 괸련하여 “사방승가에 보시하는 것으로 테라와다 사원이 됩니다.”라 했습니다. 사방상가의 개념이라면 부처님 제자가 된 자는 전세계 어느 나라의 사원에서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원은 모두의 것이라 하며 “테라와다 사원이라면 온세상의 테라와다 불교도와 교류 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라 합니다. 불교수행자는 부처님의 유산으로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한국적 종교현실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율장정신대로 살고자 하는 테라와다불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이날 이날 까티나축제 유래를 설명한 빤냐완따 빅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을까?”라며 고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설령 이번 세대에 완수하지는 못하더라도 주춧돌은 놓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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