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비실천행을 하는가? 관음사길 등산로청소를 하면서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구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말은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말입니다. 주어진 삶에 충실하겠다는 말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함을 말합니다. 구도자의 삶의 자세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단계적으로 성취되듯이, 깨달음 역시 단계적입니다.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도 있는 것입니다. 다음 생을 위하여 이번 생에 발판을 마련해 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는 자비행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첫 번째주 일요일 실천행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등산로와 도량청소, 그리고 적폐청산을 위한 유인물 배포에 대한 것입니다.
자비행을 하면 도량을 청정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교류의 장이 되기도 하는 1석 3조의 효고가 있습니다. 이번 달에는 관악산 관음사까지의 길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이득과 즐거움이 없으면
2018년 12월 2일 오전 10시에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는 5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10시 이전에 도착해 보니 5번 출구에는 등산객들로 가득했습니다. 입지조건이 좋아 만남의 장소가 된 것 같습니다.
카톡방과 밴드, 카페 등에 수 차례 공지했습니다. 그러나 당일 모인 사람은 모두 네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복우, 조현덕, 유병화, 이병욱 이렇게 네 명입니다. 지난달 첫 번째 자비실천 했을 때에는 14명 모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2월 들어 날씨도 영하 가까이 떨어져 추워진 이유도 있고, 일요일이라 편히 쉬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득이 없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대승기신에서도 이득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을 읽었을 때 어떤 이득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하물며 일요일 오전 귀중한 시간을 내서 등산로와 사찰주변 쓰레기 줍기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이득과 즐거움이 되는지 따져 보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노부부가 쓰레기 줍는 모습을 보고
요즘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오감으로 즐기는 시대에 등산로와 사찰주변 쓰레기 줍기는 결코 즐거운 일이라 볼 수 없습니다. 청소하는 일이 자신에게 이득도 되지 않고 즐거움도 되지 않는다면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묵묵히 자신의 할 바를 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본 노부부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매일 학의천을 따라 일터에 갑니다. 지난 여름 아침 일찍 일터로 향하는데 노부부가 학의천 길에서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게를 들고 담배꽁초 등 쓰레기를 주어 비빌봉지에 넣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노부부는 누가 시켜서 쓰레기 줍기 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누가 보건 말건 자발적으로 좋아서 하는 일처럼 보였습니다. 이른 아침 해 뜰 때 쓰레기 줍는 모습이 세상을 깨끗이 하는 거룩한 성자처럼 보였습니다. 또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구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 쓰레기가 많을까?
5번 출구에서 더 이상 기다려도 오지 않음을 확인 했습니다. 네 명은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관음사까지는 1.6키로 가량 걸립니다. 긴 주택가를 지나면 하천이 하나 나오는데 이곳부터 등산로이자 사찰로 가는 길입니다. 준비한 집게와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 쓰레기를 줍기 시작 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쓰레기들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이 사는 주택가에는 온통 쓰레기 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택가를 청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나쳤습니다.
이전에는 앞만 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쓰레기를 줍기 위해 아래를 보니 보이는것입니다. 마치 현미경 들이 대듯이 들여다 보니 쓰레기만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담배꽁초가 많습니다. 휴지조각과 비닐봉지 등 갖가지 쓰레기가 눈에 띕니다.
커다란 쓰레기도 있습니다. 후미진 곳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는 패트병, 먹다 남은 음식물 등 갖가지 쓰레기가 있습니다. 장갑을 끼고 집게로 들어 올려야 역겨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너른 플라스틱 널판지도 보입니다. 이런 쓰레기는 누군가 치워 주지 않으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굳이 청소하지 않아도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쓸려 내려 갈 것이라 생각해 본 것입니다.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여름날 일시적으로 수백미리의 폭우가 쏟아지면 대부분의 쓰레기는 깨끗이 쓸려 나갑니다. 폭우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청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오염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천으로, 강으로, 대양으로 흘러간 쓰레기는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최근 뉴스를 보니 커다란 물고기 배에서 패트병 등 다량의 플라스틱이 나왔다고 보도 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쓰레기는 버리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차선은 쓰레기를 줍는 것입니다.
쓰레기 주우면서 생각 드는 것이 있습니다. 쓰레기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쓰레기 줍는 사람 따로 있다는 생각입니다. 만일 버리는 사람만 있고 치우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 세상은 쓰레기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이복우선생은 “누군가 치우지 않으면 그대로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청소부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람들은 청소부를 하찮은 직업으로 봅니다. 그러나 직업에 귀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청소부가 돈을 받고 청소할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숭고한 일이 됩니다. 길거리 청소하는 것이 단지 생계때문이라 한다면 노동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을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이 됩니다.
왜 자비행이라 하는가?
쓰레기를 줍다 보니 관음사에 이르렀습니다. 관음사 소각장에 쓰레기를 모아 놓았습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이지만 그래도 좋은 일 했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 하는 것에 대하여 유병화선생은 자비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자비행’이라 할 것입니다.
자비행은 실천행의 범주에 속합니다. 실천행은 다름 아닌 ‘바라밀행’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이라 하여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 수행을 말합니다. 그래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닦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육바라밀에 자비를 뜻하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육바라밀에는 자비를 뜻하는 말, 즉 자애와 연민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십바라밀에서는 ‘자애바라밀(mettā-pāramī)’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비행이라는 말은 대승의 육바라밀보다는 초기불교의 십바라밀행에 더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자애바라밀(mettā-pāramī)을 보면
십바라밀은 (1) 보시바라밀(dāna-pāramī) (2) 계행바라밀(sīla-pāramī) (3) 출리바라밀(nekkhamma-pāramī) (4) 지혜바라밀(paññā-pāramī) (5) 정진바라밀(viriya-pāramī) (6) 인내바라밀(khanti-pāramī) (7) 진실바라밀(sacca-pāramī) (8) 결정바라밀(adhiṭṭhāna-pāramī) 9) 자애바라밀(mettā-pāramī) (10) 평정바라밀(upekkhā-pāramī)을 말합니다. 십바라밀에서 자애바라밀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애바라밀(mettā-pāramī)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자애이고, 그들의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기관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자애이고, 그들의 생명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자애이다.(Jat.I.73, Vism.318-325)
십바라밀(tiṃsapārami)은 부처님의 전생담인 자따까와 청정도론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10가지가 아니라 30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일반적 초월의 길(dasapāramī), 우월적 초월의 길(dasaupapāramī),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 이렇게 세 가지 나누기 때문입니다.
자애바라밀의 경우 일반적 초월의 길에 대하여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가장 아끼는 것을 보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월적 초월의 길에 대해서는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기관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승의적 초월의 길에 대해서는 ‘생명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사무량심을 확장하면 십바라밀이 된다
십바라밀행을 보면 궁극적으로 자신의 몸을 바치며 하는 것을 말합니다. 죽을 각오로 바라밀행을 하는 자에게 두려움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보살로 삶을 살 때 4아승지10만겁을 이렇게 바라밀행을 해 왔습니다.
바라밀행은 자비가 없으면 행하기 어렵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무량심을 달성하면 열 가지 초월의 길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청정도론에서 사무량심과 십바라밀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청정을 최상으로 삼는 등의 그것들의 위력을 알고 난 뒤에 다시 이것들이 모두 보시 등의 일체의 선한 원리들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1) 뭇삶들의 이익을 바라고, 2) 뭇삶들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3) 이미 얻은 수승한 행복이 오래 지속되길 바라고, 4) 일체의 뭇삶에 편견이 없고 평등하게 마음을 일으키는 위대한 뭇삶은 ‘이 사람에게는 주어야 하고 저 사람에게는 주지말아야 한다.’라는 구별을 하지 않고 일체의 뭇삶에게 행복의 원인인 (1) 보시를 실천한다.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회피하기 때문에 (2) 지계를 실천한다. 지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3)출가를 실천한다. 뭇삶들의 이익과 불익에 미혹하지 않기 위해서 (4) 지혜를 닦는다. 뭇삶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항상 (5)정진에 매진한다. 최상의 정진으로 용맹을 얻었지만, 뭇삶들의 여러 다양한 허물에 대하여 (6)인욕한다. ‘그대들을 위해 이것을 내가 주겠다. 내가 하겠다.’라고 (7)서원을 하면 어기는 일이 없다. 그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흔들림 없는 (8)결정을 한다. 그들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9) 자애로운 은혜를 베푼다. (10) 평정을 통해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초월의 길을 완성하여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여섯 가지 고유한 앎과 열여덟 가지 깨달은 님의 원리로 분류되는 일체의 선한 원리들에 이르기까지 완성시킨다.”(Vism.9.124)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이라는 사무량심을 확장하면 십바라밀이 됩니다.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는 사무량심을 십바라밀과 연계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은 테리가타 주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담마빨라가 주석한 것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체의 뭇삶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일체의 뭇삶의 최상의 행복을 위하여 보시를 행한다.
(2) 그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행을 지킨다.
(3) 계행을 통한 초월을 이해하기 위해 여읨을 닦는다.
(4) 뭇삶에 유익하거나 해로운 것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지혜를 닦는다.
(5) 뭇삶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정진을 닦는다.
(6) 영웅이 되고 최상의 힘을 얻고 보살이 되기 위해 뭇삶의 잘못에 대한 인내를 연마한다.
(7) 보시나 무엇을 하기로 약속하면, 진실 때문에 그것을 깰 수 없다.
(8) 또한 흔들림 없는 결정으로 뭇삶의 이익을 위하여 일한다.
(9) 또한 흔들림 없는 자애로 일체의 뭇삶을 돕는다.
(10) 그리고 평정으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테리가타 18번 각주)
십바라밀을 보면 육바라밀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다섯 가지는 같지만 여섯 가지는 다릅니다. 선정이 빠지고 더 추가된 것은 출리, 진실, 결정, 자애, 평정바라밀입니다. 어쩌면 평정바라밀이 선정바라밀은 대신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무량심에서 평정은 네 번째 선정에 해당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밀행을 초월의 길이라고도 합니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자들은 초월의 길을 가는 자들이라 합니다. 바라밀을 뜻하는 빠라미(paramī)라는 말이 완성(perfection)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목숨을 바쳐 행하는 것 자체가 초월의 길임을 말합니다.
초월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내 놓을 수 있고(일반적 초월의 길), 신체의 일부를 내 놓을 수 있고(우월적 초월의 길), 하나 밖에 없는 몸숨까지 던질 각오가 되어 있음(승의적 초월의 길)을 말합니다.
“그렇게 오래 살아서 뭐 할건데?”
네 명의 봉사자들은 관음사 한켠에 모여 따뜻한 차를 마셨습니다. 유병화선생이 준비한 약초로 만든 차입니다. 감기에도 좋고 몸의 저항력에도 좋다고 합니다. 또한 잣과 생강을 말린 것 같은 다과도 준비해 왔습니다. 양지바른 한켠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단연 관심사는 건강에 대한 것입니다.
세 분의 선생들은 모두 건강합니다. 이제까지 수년동안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 해왔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제 있는 생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행막식 하는 등 무절제한 삶을 살면 몸의 저항력이 약해져서 감기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깨달음의 조건 중의 하나라서 음식절제를 강조했습니다.
음식은 적당량을 먹어야 합니다. 탐욕으로 분노로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탈이 납니다. 몸의 장기가 망가지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하나 먹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분노에 가득 차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섭생을 잘 하면 장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들어갑니다. “그렇게 오래살아서 뭐 할건데?”라는 말입니다. 단지 좋은 음식으로 몸 잘 관리하여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은 자신의 복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남방테라와다에서는 장로가 재가자들에게 “아유 완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라고 축원해줍니다. 이를 사대축원이라 하는데 법구경에서는 “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로가 축원하는 것은 수명(āyu)과 용모(vaṇṇa)와 안락(sukha)과 기력(bala)에 대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사대축원이라 하는데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래 살아서 뭐하자는 건가? 아무 하는 일 없이 오래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소극적 공리주의로 일관해서 될까?
장로가 사대축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공덕 쌓으라’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 그만큼 공덕 쌓는 기간도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십바리밀을 닦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네 명의 봉사자들은 관음사에서 참배했습니다. 불자라면 당연히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 구배(九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테라와다불교 삼귀의에서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대하여 삼세번 하여 아홉번 귀의합니다. 대웅전에서 참배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삼배만 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두 번째로, 세 번째로 하면서 삼보에 대하여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대웅전에서 참배가 끝나고 공양간으로 향했습니다. 육류와 어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청정한 식단입니다. 성찬은 아니지만 절에서 언제나 맛이 있습니다. 아마도 움직여서 일 것입니다. 절에 가면 많이 걷게 되는데 운동을 해서일 것입니다. 긴 거리를 걸어 오면서 쓰레기 줍는 것도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봉사활동을 하고 난 다음 귀가 길의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오감으로 느끼는 거친행복과 비할 바 없는 잔잔한 행복입니다. 무엇보다 법우님들과의 대화시간입니다. 이동 중에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들으면 재미있기도 하지만 배울점도 많습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말 했을 것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 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최상의 모임이 한다.”(A3.93)
모임에는 반드시 배울만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닮고자 합니다. 모임이 단지 즐기거나 교류를 하는 등의 화합의 모임을 넘어서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것이 있는 정진의 모임이야말로 최상의 모임이라 합니다.
일요일 오전 한때 등산로 쓰레기를 주의면서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구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봉사라는 것이 드러내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든 말든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묵묵히 자신의 할 바를 다하는 것입니다. 지난 여름 학의천에서 보았던 노부부가 쓰레기를 줍는 것처럼.
2018-12-03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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