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 욕심 하나만 줄여도, 오후불식의 팔계를 실천해 보았는데
오늘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빨리 사무실에 가서 ‘오늘은 무엇을 쓸까나?’라는 기대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제 이룬 성취감 때문입니다. 팔계(八戒)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때 아닌 때 먹지 않는다’는 여섯 번째 계를 지킨 것입니다.
담마와나선원을 향하여
2018년 12월 9일 일요일 청파동 담마와나선원으로 향했습니다. 이전날 도이법사의 위빠사나 수업이 늦게 끝나 거의 자정 무렵 집에 도착 했음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후기를 작성하기 위해서입니다. 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가 10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전철로 이동하는 시간을 제한다면 9시 이전에 글을 완성해야 합니다.
속도전을 벌였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써 내려 갔습니다. 물론 잠자면서 글에 대한 마음속의 씨나리오는 이미 구성한 상태였습니다. 후기를 작성하여 블로그와 카페, 페이스북, 밴드에 올리고나서 전철을 탔습니다. 선원에 도착하니 이미 좌선 명상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삼십여분 늦은 것입니다.
“오늘 팔계를 지켜보려고 왔습니다.”
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는 오전에는 좌선하고 오후에는 아비담마강좌를 합니다. 테라와다전통에 따라 오후불식이기 때문에 오전 11시에는 공양을 하고 12시 이전에 마쳐야 합니다. 오전 좌선수행은 11시가 다 되어서 끝이 났습니다. 좌선이 끝나고 보시물 공양시간이 있었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 보여집니다.
선원에 갈 때 빈손으로 갈 수 없습니다. 무엇이라도 하나 들고 가야 합니다. 집에 있는 것 중에 물티슈가 눈에 띄었습니다. 세 팩을 챙겼습니다. 청소할 때 필요로 할 것 같았습니다. 계란을 여덟 개 가량 삶았습니다. 마침 어제 산 계란 한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티슈팩과 계란을 챙겨 쇼핑백에 넣었습니다. 보시물공양시간에 떼자사미 스님(빅쿠)의 바루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테라와다식으로 삼배를 올렸습니다.
떼자사미 스님에게 보시공양물을 올리면서 “오늘 팔계를 지켜보려고 왔습니다.”라고 말 했습니다. 오계가 아닌 팔계를 받아 이날 하루 지켜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에 스님은 “그럼 오후에 오계 대신 팔계를 해야겠네요.”라 말했습니다.
점심공양시간에
점심공양시간이 되었습니다. 오전 명상시간에 참석한 법우님들이 점심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선원 삼층에 주방이 있는데 그곳에서 식사합니다. 남자 보다도 여자가 월등히 많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음식을 준비하는데는 여자 법우님들의 몫인 것 같습니다. 남자 법우님들은 마치 집에서 상차려주면 먹는 것 같습니다. 미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선원에서는 무엇이든지 자율적으로 합니다. 음식도 각자 조금씩 가져온 것입니다. 별도로 반찬을 만들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조금씩 가져와서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삶은 계란을 가져 왔는데 점심 식탁에 오른 것을 보니 동참한 것 같은 마음이 들어갑니다.
스님을 위한 상을 차리고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상을 차렸습니다. 스님을 위한 상입니다. 각자 가져온 반찬이 여러 가지입니다. 스님방에 모여 간단한 상차림 행사를 했습니다. 탁발은 아니지만 일종의 ‘청식(請食)’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상을 들어서 스님에게 올리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이에 스님은 간단한 축원을 해 주었습니다.
각자 가져온 반찬으로
점심시간은 즐겁습니다. 이 세상에 먹는 재미 없으면 살 맛이 없을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루 세 끼 찾아 먹으려 합니다. 그것도 잘 먹으려 합니다. 그러나 선원에서는 잘 먹을 수 없습니다. 각자 조금씩 가져온 반찬을 이것 저것 조금씩 모아 먹습니다. 동그란 접시에 담으니 가득합니다.
절에서 밥을 먹으면 맛이 있습니다. 집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맛입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청정한 음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을 남길 수 없습니다. 먹을 만큼만 덜어와서 먹습니다. 청정을 지향하는 도반들과 청정한 선원에서 청정한 음식을 먹으니 마음까지 청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절에서 가장 꼴불견은
밥을 먹었으면 치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여자법우님들의 몫이고 치우는 것도 여자법우님의 몫인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받아 먹기만 할 뿐 아무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불공평한 것입니다.
언젠가 법륜스님의 법문을 유튜브에서 보았습니다. 절에서 가장 ‘꼴불견’이 있다고 했습니다. 절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접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집에서 대접받듯이, 마치 회사에서 대접받듯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절에 왔으면 봉사정신을 발휘하여 도량을 청소한다든가 하다못해 설거지를 한다든가 무언가 도움을 주는 일을 해야 함을 말합니다.
여자법우님들이 식사준비를 했다면 설거지 정도는 남자들이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설거지를 자청했습니다. 남자 두 명이서 담당 했습니다. 세제를 닦고 물로 행구는 일입니다. 크게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남자들이 얻어 먹기만 하고 대접받으려 선원에 왔다면 큰 오산일 것입니다.
팔계를 받아 지녔는데
아비담마강좌는 12시 반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강좌가 시작 되기 전에 법회 의식을 가졌습니다. 테라와다 예불의식에 따라 빠알리원문과 우리말을 번갈아 독송했습니다. 스님이 먼저 선창하면 신도들은 후창하는 식입니다.
마침내 팔계순서가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오계를 받아지니는데 이날은 특별하게 팔계를 받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한사람의 요청을 스님이 받아 준 것입니다. 참석자들은 한사람 때문에 본의 아니게 모두 팔계를 받아지니게 되었습니다. 팔계를 옮겨 봅니다.
1)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2) 주지 않는 물건을 가지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3) 모든 성적인 행위를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4) 거짓되게 말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5) 방일의 원인이 되는 술이나 약물들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6) 때 아닌 때에 먹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7)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즐기는 장소에 가거나, 꽃이나 향수로 몸을 치장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8) 넓고 높은 침상 위에서 잠자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팔계 중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여섯 번째 항인 ‘때 아닌 때에 먹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라 볼 수 있습니다. 본래 팔계는 사미나 사미니가 지키는 계라 볼 수 있는데 재가불자가 평소에 지키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수계할 때 오계가 아닌 팔계를 줍니다. 엄밀히 말하면 재가불자에게 있어서 팔계는 ‘하루 낮 하루 밤 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름 마다 포살일에 지키는 계가 팔계입니다.
검소한 삶과 자발적 가난의 실천
재가불자들은 평소에는 오계만 지키면 됩니다. 그러나 포살일 사원에 오면 팔계를 지켜야 합니다. 요즘은 주칠일제이기 때문에 일요일 절에 가면 팔계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팔계를 지킨다는 것은 포살일 그 날 하루만큼은 스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루스님이 되는 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계는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다 세 가지를 더 지켜야 하는데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때 아닌 때 먹지 않는 것이 해당될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만이라도 팔계를 지킨다는 것은 일일스님이 되는 것의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라 봅니다. 이는 일곱 번째 항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즐기는 장소에 가거나, 꽃이나 향수로 몸을 치장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라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팔계를 지킨다는 것은 ‘자발적 가난’을 자처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여덟 번째 항 ‘넓고 높은 침상 위에서 잠자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라는 항목과 관련이 있습니다.
재가불자들은 세속에서 생업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선업을 짓기도 합니다. 무언가 정화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일요일 교회에 가서 회개 한다 하는데 불교에도 참회하는 날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기독교보다 더 오래 전에 포살일이라 하여 보름에 한번 검소하고 청정하게 살았습니다. 요즘은 주칠일제이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은 검소하고 청정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재가불자들이 일요일 하루만큼은 팔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검소한 삶과 자발적 가난의 실천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사음계(不邪淫戒)에 대하여
팔계 중에 한가지만 빼고 다른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평소 지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가지는 지키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 한끼만 먹는 것입니다. 재가불자에게 평소 오후 불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팔계를 수지 했으니 실천해 보기로 했습니다.
재가불자에게 있어서 오계는 일상이지만 팔계는 ‘하루 낮 하루 밤 계’라 했습니다. 그 중에서 불사음계(不邪淫戒)는 오계와 팔계에서 차이가 납니다. 오계에서 불사음계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 (Kāmesu micchācāra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되어 있습니다. 팔계에서는 “모든 성적인 행위를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니겠습니다.(Brahmacariya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라 합니다. 차이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kāmesu micchācāra)’과 ‘모든 성적인 행위를 멀리하는 것(brahmacariya)’이 다릅니다.
오계는 출가자나 재가자나 지켜야 할 계입니다. 그러나 불사음계에서 차이가 납니다. 재가불자의 경우 배우자를 제외하고 성적교섭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출가자는 어떤 성적교섭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팔계에서 ‘모든 성적인 행위를 멀리하는 것’이라 하여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브라흐마짜리야는 청정한 삶 또는 순결한 삶, 청정범행 등으로 번역됩니다. 바라문 사주기에 있어서 ‘학습기’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religious life’, ‘holy life’등으로 번역됩니다. 이와 같은 브라흐마짜리야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에 수없이 등장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덕목에 대한 경’(A3.70)이 있습니다. 재가불자가 포살일에 지켜야 할 계목과 공덕에 대한 것입니다. 불사음계와 관련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Yāvajīvaṃ arahanto abrahmacariyaṃ pahāya brahmacārī ārācārī viratā methunā gāmadhammā. Ahampajja imañca rattiṃ imañca divasaṃ abrahmacariyaṃ pahāya brahmacārī virato methunā gāmadhammā. Imināpahaṃ aṅgena arahataṃ anukaromi, uposatho ca me upavuttho bhavissati.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순결하지 못한 삶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고, 멀리 여읨의 삶을 살고, 천한 행위인 성적 접촉을 삼간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순결하지 못한 삶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고, 멀리 여읨의 삶을 살고, 천한 행위인 성적 접촉을 삼가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A A3.70)
여기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arahanta)을 말합니다. 모든 번뇌가 소멸한 자입니다. 재가불자가 보름에 한번 포살 하는 것에 대하여 하루계로 정한 근거가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Ahampajja imañca rattiṃ imañca divasaṃ)”이라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포살일 하루만큼은 거룩한 님처럼 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사음계는 거룩한 님들이 목숨 걸고 이룬 것이라 합니다.
경에서 ‘순결한 삶’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ārīya)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경을 보면 브라흐마짜리야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해 놓고 있습니다. 이는 “천한 행위인 성적 접촉을 삼간다. (virato methunā gāmadhammā)”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성적 접촉이 매우 천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성적행위는 욕망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된 성자에게는 성적욕망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포살일 하루 거룩한 님을 닮고자 하는 재가불자에게 있어서 부부간이라 하더라도 성적접촉을 해서는 안된는 말입니다.
에까밧띠꼬(ekabhattiko), 때 아닌 때 먹지 않는 것
팔계는 기본적으로 재가불자가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불사음계마저 출가자 기준이 적용됩니다. 이날 하루만큼이라도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즐기는 장소에 가거나, 꽃이나 향수로 몸을 치장하는 것을 멀리하는 것이라 합니다. 또 이날 하루만큼은 넓고 높은 침상 위에서 잠자는 것을 멀리 하라 합니다. 이날 하루만큼은 검소하게 살라는 것과 같습니다. 또 이날 하루만큼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때 아닌 때 먹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덕목에 대한 경’(A3.70)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Yāvajīvaṃ arahanto ekabhattikā rattuparatā viratā vikālabhojanā. Ahampajja imañca rattiṃ imañca divasaṃ ekabhattiko rattuparato virato vikālabhojanā. Imināpahaṃ aṅgena arahataṃ anukaromi, uposatho ca me upavuttho bhavissati.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하루 한끼 식사를 하고 저녁은 들지 않고, 때 아닌 때에 식사를 삼간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하루 한끼 식사를 하고 저녁은 들지 않고, 때 아닌 때에 식사를 삼가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A A3.70)
경에 따르면 하루 한끼만 먹는다고 했습니다. 이를 ‘에까밧띠꼬(ekabhattiko)’라 합니다. 이 말은 “저녁은 들지 않고(rattūparata)”라는 말과 동의어이고, 또 “때 아닌 때에 식사를 삼간다. (viratā vikālabhojanā)”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와 같은 하루 한끼 식사는 번뇌를 소멸한 거룩한 님들이 목숨을 걸고 성취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나도 포살일 하루만큼은 거룩한 님처럼 살아 보겠다는 다짐을 말합니다.
먹는 것 욕심 하나만 줄여도
담마와나선원에서 수계받은지 한달 가량 되었습니다. ‘담마다사’라는 빠알리법명도 받았습니다. 수계 받을 때 팔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계 받은 날 바로 그날 계를 어겼습니다. 그날 오후에 저녁식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계 따로 행위 따로가 된 것입니다.
한달 만에 다시 선원을 찾았습니다. 이번에 팔계수지를 자청 했습니다. 그러나 한사람에게만 계를 주지 않고 참석한 모두에게 팔계를 주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모든 사람이 팔계를 수지 하게 되었습니다.
팔계를 받았으니 팔계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재가자에게 있어서 팔계는 하루 낮 하루 밤 계이기 때문에 당일 밤까지만 지키면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저녁밥입니다. 팔계를 지키기로 했기 때문에 저녁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늘 먹던 저녁 밥을 먹지 않으니 허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밥을 먹으면 대부분 탐욕으로 먹게 됩니다. 때에 따라 분노로 먹게 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더 잘 먹으려고 합니다. 더 맛있는 반찬을 찾습니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먹고 밖에 나가서 근사하게 사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녁을 안먹는다고 생각하니 그런 욕심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저녁을 먹지 않으니 물만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삼차를 마셨으나 양이 차지 않았습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 했습니다. 가루로 된 것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기로 한 것입니다. 과일을 먹을 수도 있지만 일종의 식사라 보고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과일을 믹서로 갈아 마실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스나 우유를 마실 수 있지만 그만 두었습니다. 가루된 것이 있어서 한컵 마셨을 뿐입니다.
TV도 멀리 했습니다. TV를 켜면 먹방이나 쇼, 영화 등을 아무 생각 없이 보는데 이는 팔계에서 말하는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즐기는 장소에 가는 것과 다름 없이 보입니다. 그대신 조용하게 유튜브 법문을 들었습니다. 법문이 귀에 쏙쏙 들어 오는 것 같습니다.
저녁을 먹지 않으니 몸이 개운 합니다. 저녁을 먹지 않아도 견딜만합니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 하나만 줄여도 이렇게 홀가분할 수 없습니다. 몸도 날아 갈듯이 가볍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오후불식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8-12-10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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