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과보심으로서의 느낌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떤 이는 ‘내탓이오!’라며 내가 만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나(我)는 없습니다. 있다면 오온이 있을 뿐입니다. 그 오온이라는 것은 매순간 조건발생 조건소멸하고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정신-물질의 과정에 지나지 않다고 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떼자사미스님의 아비담마 강좌
2018년 11월 9일 담마와나선원에서 떼자사미스님으로부터 아비담마강좌를 들었습니다. 올해 4월부터 시작된 강좌는 매주 일요일 오후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들은 것은 ‘여운의 분석’에 대한 것입니다.
처음 참석한 떼자사미스님의 아비담마 강좌입니다. 교재는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에서 간행된 아비담마길라잡이 입니다. 처음 참석해서 교재를 가지고 가지 못했습니다. 강의 한 것을 노트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여운의 분석’에서 여운이라는 말이 생소합니다. 여운은 어떤 뜻일까?
초불연의 아비담마길라잡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2008년에 산 6쇄판입니다. 참고로 초불연에서 아비담마길라잡이는 2002년에 초판본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비담마와 인연맺은지 10년 되었습니다.
아비담마는 난해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구조를 비롯하여 불교전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비담마는 청정도론과 함께 불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 논서라 볼 수 있습니다.
아비다마길라잡이 6쇄판을 보니 ‘여운의 법칙’이라는 것은 ‘등록의 법칙(tadārammaṇa niyama)’이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tadārammaṇa’은 ‘彼所緣’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아비담마해설서가 있는데 2016년에 불광출판사에서 출간된 ‘붓다아비담마’입니다. 붓다아비담마에서는 ‘과보의 마음의 법칙 (vipāka niyama)’이라 되어 있습니다. 빠알리의 ‘vipāka’는 ‘업이 달리 익는다’는 뜻으로 이숙(異熟)이라 합니다. 여운의 법칙은 업이숙의 법칙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과보심에 대하여
12월 8일의 떼자사미스님의 아비담마강좌는 과보의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초불연의 교재를 읽어 가면서 수업을 진행 했습니다. 교재에 실려 있는 과보의 마음에 대한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경우에 대상이 원하지 않는 것일 때 다섯 가지 알음알이[前五識]와 받아들이는 마음과 조사하는 마음과 등록의 마음은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다. 원하는 것일 때 유익한 과보의 마음이다.”(초불연 아비담마길라잡이, 4장 여운의 법칙)
이 말은 쉽게 이해 되지 않습니다. 이전 학습이 되어 있어야만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구조에 대한 것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눕니다. 선심, 불선심, 과보심, 작용심 이렇게 네 가지 입니다. 위에 언급된 구절은 과보심에 대한 것입니다. 전오식에 따른 분별된 마음이 불선과보심과 선과보심으로 나타난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백판에 마음의 지도를
떼자사미스님은 과보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백판에 하나의 도표를 그렸습니다. 일종의 마음의 지도입니다. 도표를 보면 크게 물질(rupa)과 비물질(nama)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물질에 대해서는 경, 근, 식으로 구분 되어 있는데 이는 다섯 가지 감각대상과 다섯가지 감각기관, 그리고 다섯 가지 감각의식에 대한 것입니다. 비물질에 대한 것 역시 경, 근, 식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법(dhamma), 마노(mano: 意), 의식(意識: manoviññāṇa)에 대한 것입니다.
표를 보면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의식과정이 일어나는 것은 ‘삼사화합촉’에 따른 것입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M18)라는 정형구로 표현됩니다. 이는 안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은 분별능력이 없습니다. 단지 대상을 볼 뿐입니다. 정확하게는 보일 뿐입니다. 눈에 들어 오는 모든 대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입니다.
보이는 대상에 따라 좋고 싫음이 일어납니다. 경의 정형구에서는 삼사화합된 것에 대하여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M18)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접촉으로부터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느낌은 원인이 아니라 과보
대상을 보고서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느낌에 대한 것입니다. 왜 이런 느낌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에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접했을 때 지금 괴로운 느낌이라면 괴로운 과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느낌이 즐거운 것이라면 선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고, 느낌이 괴로운 것이라면 불선과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보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느낌은 원인이 아니라 ‘과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고성제와 같은 것입니다.
고성제에서는 사고와 팔고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 합니다. 오온에 집착 했기 때문에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존재라는 것은 결국 늙고 병들어 죽게 되어 있으므로 ‘절망적’입니다. 한마디로 ‘존재 자체가 괴로운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괴로운 것이라면 우리는 현재 괴로움의 과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괴로움은 원인이 아니라 과보라는 사실입니다.
고성제가 집성제보다 먼저 나오는 이유는?
사성제에서 괴로움의 원인은 집성제입니다. 집성제가 원인이고 고성제가 과보인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과보가 원인보다 먼저 언급된 것일까? 정상적인 논리라면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가 먼저 언급되고 난 다음에 괴로움의 과보인 고성제가 설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초전법륜경에서는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과보가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괴로움의 원인 보다는 괴로움의 과보를 먼저 설명한 것은 과보로서 나타난 괴로움을 ‘철저하게 살펴 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 세 번 굴린 형태로 나타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부처님은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라 하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철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뼈속까지 사무치게 괴로움을 알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ātanti)”(S56.11)라고 선언합니다. 이렇게‘철저하게 알려졌다’라고 해서 ‘빠린냐딴띠(pariññātanti)’ 라 합니다.
고성제를 철견하게 되면 괴로움은 버려지게 됩니다. 이는 집성제에서 갈애가 버려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괴로움의 과보를 보고서 이를 철저하게 이해하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가 버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를 일으키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Stn.558)라 했는데 이는 괴로움, 즉 고성제를 철견했음을 말합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이해하고 철저하게 알았다면 더 이상 괴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Stn.558)라 했는데 이는 집성제에서 갈애가 버려짐을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결과로서의 고성제가 원인으로서의 집성제보다 앞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주의기울임(yonisomanasikāra)
삼사화합촉에 따라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느낌은 과보에 따른 것입니다. 그 사람만 보면 불편하고 불쾌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는 그 사람과 이전에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봄으로 인하여 싫은 느낌이 일어날 때 이는 ‘불선과보’에 따른 것입니다. 반대로 그 사람만 보면 유쾌하고 즐겁습니다. 이는 이전에 그 사람과 좋은 관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선과보’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느낌은 이전의 행위(業)에 따른 과보임에 틀림 없습니다. 여기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대상을 접하여 좋아함과 싫어함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과보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휘둘리면 또 다른 과보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떼자사미스님은 “그 순간 의식이 깨어 있어서 바르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지혜로운 주의기울임’이라는 뜻인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라는 말을 했습니다.
지혜로운 주의기울임과 관련하여 시인 수행자 방기싸를 들 수 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방기싸에게 욕정이 일어났습니다. 사원에 잘 치장한 여인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를 보고 괴로워합니다. 이에 방기싸는 아난다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이에 아난다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합니다.
“부정관을 닦고,
마음을 통일하고 잘 삼매에 들라.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고
싫어하여 떠남에 전념하라.”(S8.4)
여러 게송 중의 일부입니다. 아난다는 욕정에 불타 괴로워 하고 있는 방기싸에게 부정관을 닦으라고 합니다. 부정관은 사념처 중에서 신념처에 해당됩니다. 이는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고”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방기싸는 아난다가 가르쳐 준대로 수행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요니소마나시까라라는 말은 초불연 아비담마길라잡이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광출판사의 ‘붓다아미담마’에서는 ‘현명한 주의’ 라 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주의(yonisomanasikāra)는 유익한 속행을 일어나게 하는 반면, 현명하지 못한 반조 또는 주의(ayonisomanasikāra)는 해로운 속행을 일어나게 한다.”(226p)라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게 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 느낌을 알아 차리십시오.”
위빠사나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그 느낌을 알아 차리십시오.”라 합니다. 느낌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넘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갈애는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사성제에서 갈애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집성제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은 갈애는 필연적으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유발하게 됩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게 되면 결국 새로운 업을 짓게 되어 업으로서 존재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존재라는 것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존재는 절망하게 됩니다. 존재 자체가 괴로움 그 자체인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
존재 자체가 괴로움 그 자체라면 이는 이전 행위로 인한 과보에 따른 것입니다. 이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느낌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알아차림을 강조하는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담마와나선원 아비담마강좌에서 떼자사미스님은 도표를 그려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로서 나타난 과보심에 대하여 “과거 잘못된 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라 했습니다. 이 말은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과거의 행위(業)에 의하여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과보로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보심에 대하여 초불연 아비담마길라잡이에서는 “과보의 마음들은 아무런 고의성이 없이 대상의 성질과 자연히 일치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실제 얼굴의 특징과 일치하는 것과 같다.”(4장)라 했습니다.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그대로 보여 줄 것입니다. 마음의 거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전에 지은 행위가 지금 괴로움 또는 즐거움이라는 과보의 마음으로 나타났을 때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아비담마길라잡이에서는 그 사람의 과거의 업에 지배된다고 하면서 “그러므로 경험된 대상은 업의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으로 익도록 업에게 기회를 부여한다.”(4장)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울론은 붓다아비담마에서도 보입니다. 붓다아비담마에서는 “과보의 마음 (vipākacitta)은 업의 과보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마치 거울 앞에 있는 사람에 따라 거울에 모습이 나타나듯이 업에 따라 자주 인식과정에 나타난다.”(225p)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업이숙은 마음의 거울에 비친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거울론은 청정도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 제14장 존재의 다발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습니다.
“상응하는 사실들에는 차별이 없어도, 이숙적 마음은 거울의 표면에 비추어진 얼굴처럼 수동적이고, 착하고 건전한 마음은 얼굴처럼 능동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Vism.14.100)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의 얼굴은 있는 그대로 비추어집니다. 찡그리면 찡그런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지은 행위에 따른 이숙심(異熟心)은 있는 그대로 결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수동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떼자사미스님은 과거 잘못된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지금부터 자신의 행위에 따라 미래를 바꾸어 나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착하고 건전한 마음은 얼굴처럼 능동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Vism.14.100)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잘 이해 해야
수행을 잘 하려면 몸과 마음을 잘 이해 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 밖에서 대상을 찾는것이 아니라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가능함을 말합니다. 이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림(sati)으로 가능하며 사념처수행을 말합니다. 그래서 떼자사미스님은 사념처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몸과 마음을 이해하면 애쓰는 수행하지 않습니다.”라 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이전에 행위에 따른 과보가 나타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과보는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떼자사미스님은 “원인과 조건을 바꾸는 것이 수행하는 이유입니다.”라 했습니다. 과보의 마음은 대상의 성질에 의해 지배되지만 자와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의지에 따라 미래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Ud1.10)
2018-12-11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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