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불, 담마마마까 수행기20
2019년 1월 8일 새벽
매일 아침 새벽예불이 대법당에서 열린다. 새벽좌선이 끝나고 이어서 오전 다섯시가 되면 새벽예불이 시작된다. 대상은 빅쿠들을 제외한 띨라신, 한국스님들, 재가의 남자요기, 재가의 여자요기이다. 선원에 사는 대중은 빠짐 없이 새벽예불에 참석한다.
사야도가 새벽예불을 집전할 때에는 빅쿠들도 새벽예불에 참석한다. 지난 1월 7일 월요일 같은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평소 새벽예불시간에는 빅쿠중의 한명이 예불을 주관한다. 요일별로 돌아 가며 주관하는데 선원내에서도 중진급에 해당되는 것 같다.
오전 5시가 되면 예불을 주관하는 빅쿠 한명이 조용히 입장한다. 두 손을 앞으로 차수하고 눈을 아래로 뜨며 행선하듯이 천천히 입장한다. 입장하여 준비된 자리에 앉는데 전면에 보이는 좌석 중에 가장 왼쪽편에 앉는다. 앉아서 담마마마까 법요집에 실려 있는 식순대로 의식을 진행한다.
새벽예불은 빠알리어와 미얀마어로 진행된다. 한국어는 전혀 들을 수 없다. 미얀마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법요집에 한글 해석이 있어서 예불내용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불시간에는 항상 법요집을 지참한다.
예불은 이십여분 가량 진행된다. 예불을 주관하는 빅쿠는 예불의식을 모두 외우고 있다. 준비된 자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목탁 같은 도구도 보이지 않는다. 의자에 올라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빠알리와 미얀마어를 특유의 운율과 함께 낭송한다. 빅쿠가 한구절 한구절 낭송하면 대중들은 따라서 함께 낭송하기도 한다.
새벽예불에는 순서가 있다. 차례로 나열하면 스승을 모심, 사야도축원, 스승께 계 받기를 청함, 삼귀의, 스승께 수계를 청함, 사야도축원, 마하가전연게송, 자비관 순으로 진행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 이십여분 소요된다.
수다원 칠종공덕
예불순서를 보면 사야도축원이 두 번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평일의 예불에서는 사야도를 대신하여 중진급 빅쿠가 대신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사야도 축원에 대한 내용을 보면 선원에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동시에 테라와다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알게 해준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공덕 지혜 복덕이 가장 으뜸인 부처님, 붓다께서 45년간 설하신 팔만사천 법보, 도와 과를 성취한 아리야(성인)상가(스님들)께 예경한 공덕, 계(5계, 8계, 10계 등)를 지킨 공덕, 싸띠빳타나 위빠사나를 실천 수행한 공덕, 오늘 음식(아침, 점심 후식, 오후 음료)을 보시한 공덕으로 4악도에 나지 않고, 삼재와 8란, 5종의 원수, 사견, 위험과 해악 등의 모든 장애가 사라져서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장수하고, 용모가 아름답고,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행복하며 좋은 에너지와 출중한 지혜를 얻으십시오. 여러분 모두 싸띠빳타나 위빠사나를 실천하여 신심, 보시, 지계, 지혜, 노력, 두려움, 부끄러움(수다원 7종공덕)이 증장하여 번뇌가 모두 소멸한 대자유인의 경지, 완전한 평화, 열반을 성취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야도 축원문을 보면 먼저 부처님을 찬탄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축원문의 골자는 아마도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장수하고, 용모가 아름답고,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행복하며”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대표적인 축원문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누군가 보시를 했을 때 “아유 반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이라고 짤막하게 축원해 준다. 내용은 “장수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건강하기를!” 라는 말이다. 이 말은 법구경도 실려 있다. 법구경 109번 게송을 보면“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라고 되어 있다. 장로빅쿠에게 예경하면 장로빅쿠가 “아유 반노 수캉 발랑”하며 축원해주는 것이다. 네 가지 축원 중에서도 으뜸은 ‘장수축원’일 것이다. 오래오래 살아 선업공덕을 지으라는 말이다.
축원문 마지막 문장을 보면 ‘수다원 칠종공덕’이 있다. 일곱 가지는 신심, 보시, 지계, 지혜, 법에 대한 상식, 두려움, 부끄러움을 말한다. 이 말은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일곱 가지 재물에 대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부처님은 누구나 일곱 가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불이나 물이나 왕이나 도둑이나 원하지 않는 상속자에 의해 약탈될 수 없는 것입니다.”(A7.7) 라 했다. 그래서 게송으로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일곱 번째로 지혜의 재물이 있네.”(A7.6)라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사야도의 축원이 철저하게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일매일 구계(九戒)를 받아 지니며
선원에서는 매일매일 새벽예불시간에 계를 받아 지닌다. 그래서 새벽예불에 대하여 ‘수계식’이라고 한다. 매일매일 받아 지니는 계는 다름 아닌 ‘구계(九戒)’이다. 오계도 아니고 팔계도 아니고 구계인 것은 ‘자비계’가 추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멧따따하가떼나 새땃따, 땁바빠나 부때뚜 빠레이또와 위하라낭 따마디야미”라고 미얀마식 빠알리어를 낭송한다. 내용은 “모든 생명들에게 자비심으로 대하겠습니다.”라는 뜻이다.
한국의 담마와나선원에서 법명을 받은 바 있다. 수계식도 겸했는데 그때 당시 팔계를 받았다. 계사 ‘빤냐와로 마하테라’가 말하기를 “팔계는 ‘하루낮하루밤’계입니다.”라고 했다. 평소에는 오계를 지키지만 선원에 오면 팔계를 지켜야 함을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덕목에 대한 경’을 보면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A3.70)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늘 낮 오늘 밤’이라는 말이 바로 ‘하루계’라는 뜻이다. 왜 하루계인가? 예를 들어 팔계중에 여섯 번째 항목에 오후불식이 있다. 재가자가 사회생활 하면 노동을 해야 하는데 오후에 먹지 않고 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팔계를 ‘하루낮 하루밤 계’라 한다. 그러나 포살일이나 일주일에 한번 선원에 오면 출가한 빅쿠처럼 팔계를 지키며 하루를 살아야 한다.
담마마마까에서는 매일매일 구계를 받아 지니기 때문에 매일매일 구계를 지키며 살게 된다. 선원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수행만 하기 때문에 구계를 지키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구계를 지키면 팔정도는 자연스럽게 닦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구계를 지키면 팔정도에서 말하는 올바른 언어(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이 세 가지는 자동적으로 지켜 지게 된다. 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앉아 있는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계학, 정학, 혜학이라는 삼학으로 완성되는 것이 수행이다.
미얀마식 삼귀의문
담마마마까는 미얀마선원이다. 그래서일까 예불시간에 삼귀의를 보면 미얀마식 빠알리어로 말한다. 한국불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빠알리 삼귀의를 보면 “붓당 사라낭 갓차미”라 되어 있다. 미얀마어식 빠알리어는 “복당 따라낭 갓씨미”라 한다. 붓다를 ‘복당’이라 한다. 상강을 ‘땅강’이라 한다. 그래서 “복당 따라낭 갓씨미, 담망 따라낭 갓씨미, 땅강 따라낭 갓씨미”라 한다. 이렇게 발음하는 이유는 부처님 당시부터 이와 같은 발음으로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라 한다.
새벽예불할 때 삼귀의는 세 번 낭송한다. 그런데 빠알리어로 두띠얌삐, 따띠얌삐 하며 세 번 낭송한 후에 미얀마어로 한번 더 낭송한다는 사실이다. 순수한 미얀마어 삼귀의는 “폐야골레 쌔이 왜 소에 어미에 씨깟미, 때야골레 쌔이 왜 소에 어미에 씨깟미, 땅가골레 쌔이 왜 소에 어미에 씨깟미”라 한다. 부처님에 대하여 ‘폐야’라 하고, 가르침에 대하여 ‘때야’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폐야라는 말은 스승이라는 말도 된다. 마지막 문구에서 ‘땅가’라 했는데 이는 상가(Sangha)를 말한다. 한국처럼 “스님들께”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겠다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사띠를 완성하기를
새벽예불과 수계식에서 사야도의 축원은 두 번 있다. 예불과 수계의식이 시작 되기 전에 한번 있고 모두 끝난 후에 한번 더 있다. 두 번째 사야도 축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이 아름다운 수행자들이여! 지금 여러분은 삼귀의와 9계(5계)를 서원함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계장엄을 하였습니다. 이 공덕으로 아빠마데나를 완성하십시오. 아빠마데나란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이며 유훈입니다. 아빠마데나란 걸을 때도 잊지 않고 싸띠하며, 서 있을 때도 잊지 않고 싸띠하며, 앉아 있을 때도 잊지 않고 싸띠하며, 누워 있을 때도 잊지 않고 싸띠하는 것입니다. 또 볼 때도 싸띠하고, 들을 때도 싸띠하고, 냄새에도, 먹을 때에도, 접촉할 때에도, 생각이 날 때에도, 잊지 않고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노력으로 24시간 이어지는 싸띠를 충분하고 완전하게 성취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두 번째 사야도 축원문에서 강조한 것은 ‘사띠’에 대한 것이다. 이를 ‘아빠마데나’라 했는데, 이 말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로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 不放逸精進)”라고 말씀 했다. 이 말은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D16.125)라는 뜻이다.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appamāda)’라는 말은 주석에 따르면 사띠와 동의어이다. 사야도가 불방일정진을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니라 ‘항상 사띠를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사야도는 1월 7일 새벽법문에서도 “위리야(精進)가 있으면 사띠는 자동적으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수행자의 생활규칙 다섯 가지
에인다까 사야도는 1월 7일 새벽법문에서 마하가전연 존자의 게송 이야기를 했다. 사야도는 법문말미에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게송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라고 당부했다. 다섯 가지 게송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새벽예불 법요집 가장 마지막 식순에 마하가전연 존자의 게송이 실려 있다. 법요집에서는 이를 ‘수행자의 생활규칙’이라고 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의 눈이 밝을지라도 장님처럼 행동하라.
그대의 귀가 밝을지라도 귀머거리처럼 행동하라.
그대의 말이 웅변일지라도 벙어리처럼 행동하라.
그대의 몸이 건강할지라도 환자처럼(천천히) 행동하라.
잠 잘 때에도 뒤척이지 말고 송장처럼 가만히 싸띠 하면서 잠들어라.”
마하가전연 존자의 게송을 보면 보왕삼매론을 연상케한다. 동아시아불교에서 일종의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는데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말라.”로 시작 되는 열 가지 사항이 실려 있다. 수행자에게는 장애가 따르게 되어 있는데 이를 이겨 내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하가전연존자의 게송과는 내용이 다르다. 공통적인 것을 들라면 ‘하심(下心)’일 것이다. 담마마마까에서는 이를 수행자의 생활규칙이라 하여 매일 받아 지니고 있다.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법요집에 실려 있는 마하가전연 존자의 게송을 보고 놀랐다. 테라가타(長老偈)에서 유사한 게송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부니까야에서 볼 수 없고 쿳다까니까야 중에서도 테라가타에 실려 있다. 이 게송을 보고 블로그에 ‘눈 먼 사람처럼 귀 먼 사람처럼’(2018-07-03)이라는 글을 올린 바 있다. 마치 진흙속의 진주를 발견한 것처럼 감동했는데 놀랍게도 담마마마까 법요집에 실려 있는 것이다. 그것도 수행자의 생활규칙이라 한다. 테라가타에 실려 있는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Cakkhumāssa yathā andho
sotavā badhiro yathā,
Paññavāssa yathā mūgo
balavā dubbaloriva,
Atha tthe samuppanne
sayetha matasāyika'nti.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 (Thag.501)
이 게송은 마하깟짜야나(mahākaccāyana) 존자가 읊은 팔련게송 중의 마지막 게송이다. 마하깟짜야나는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간략하게 설해진 것의 의취를 상세히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論義第一: saṃkhittena bhāsitassa vitthārena atthaṃ vibhajantānaṃ aggo)’로 알려져 있다.
게송을 보면 키워드가 눈먼 자, 귀먹은 자, 바보, 허약한 자, 죽음의 침상인 것을 알 수 있다. 법요집에 실려 있는 내용과는 약간 다르다. 가장 많이 차이 나는 것은 마지막 구절 ‘죽음의 침상(matasāyikaṃ)’에 대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번역자 전재성 선생은 매우 난해하다고 했다.
번역자는 여러 가지 번역사례를 소개하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수피즘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죽음의 침상은 ‘완전한 적멸’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난해한 시에 대하여 독일 노이만의 번역을 소개 했는데 “날카로운 눈으로 눈먼 것처럼 보이고, 날카로운 귀로 벙어리처럼 보이고, 날카로운 지혜로 무디게 보이고, 날카로운 의취로 멍청하게 보이니, 생각건대, 적멸이 옳으니, 사려깊게 휴식을 취하리.”라는 뜻이라 한다.
논의제일 마하깟짜야나 존자의 팔련게송
담마마마까의 생활규칙이라 볼 수 있는 마하가전연(mahākaccāyana)의 다섯 게송을 보면 수행자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마음자세라 볼 수 있다. 다만 다섯 번째 항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데 이는 사띠와 관련해서 규칙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잠 잘 때를 제외하고 늘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더구나 잠 들 때는 송장처럼 뒤척이지 말고 자라고 했다. 아마도 이 말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약이 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잠은 억지로 잘 수 없는 것이다. 잠을 자려고 하면 할수록 노력하면 정신만 점점 또렸해진다. 그래서 어느 정신과 전문의는 “잠이 오면 잠을 자지.”라는 심정으로 임하라고 했다. 그런데 더 좋은 말은 “송장처럼 뒤척이지 말고 자라.”라는 말일 것이다. 잠을 잘 자기 위해서는 이것보다 더 좋은 말이 없을 듯 하다. 죽은 듯이 잠을 자라는 것이다. 참고로 논의제일 마하깟짜야나 존자의 팔련게송을 모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일을 하지 말라.
사람들을 멀리하고, 애쓰지 말라.
맛에 탐닉하여 번거로우면,
안락을 가져오는 의취를 놓친다.”(Thag.494)
“가정에서 예배와 공양을 받지만,
그것을 ‘진흙수렁’이라고 알아야 한다.
날카로운 화살은 뽑기 어렵고,
공경 받는 것은 악인이 버리기 어렵다.” (Thag.495)
“죽어야만 하는 자의 악한 업은
타자에 의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그 업을 짓지 않아야 한다.
뭇삶은 업의 친척이기 때문이다.” (Thag.496)
“타인의 말에 의해서 도둑이 아니고
타인의 말에 의해서 성자가 아니다.
자신에 대하여 아는 대로
그대로 하늘사람들도 그것을 안다.” (Thag.497)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이 그것을 알면,
그 때문에 그들의 싸움이 그친다.” (Thag.498)
“지혜가 있는 자라면
재산을 잃어도 산다.
지혜를 얻지 못하면,
재산이 있어도 살지 못한다.” (Thag.499)
“귀로 모든 것을 듣고
눈으로 모든 것을 본다.
슬기로운 자라면 본 것, 들은 것,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 (Thag.500)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 (Thag.501)
자비관게송으로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전세계적으로 어느 나라이든지 예불의식은 장엄하게 치루어진다. 한국의 예불의식 또한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조석으로 “지심귀명례”하며 칠정례할 때 불자들은 지극히 정성스런 마음으로 예불올린다. 이곳 미얀마 담마마마까에서도 예불의식만큼은 지극정성으로 올린다. 더구나 새벽예불시간에는 수계식도 겸하고 있어서 더욱더 정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선원예불의식에서 한국과 차이 나는 것 하나를 들라면 수계의식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극정성으로 예불 올리지만 오계나 대승보살계를 별도로 받아 지니지는 않는다. 처음 불자가 되기 위한 수계식 할 때 대승보살계 한번 받아 지니는 것으로 그친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예불의식을 할 때는 수계의식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선원의 경우는 거주하며 수행하기 때문에 매일 구계를 받아 지닌다. 그래서 새벽예불은 수계식과 겸하여 함께 열린다.
모든 예불의식과 수계의식이 끝나면 자비관게송으로 의식이 마무리된다. 요즘 한국에서는 초기불교영향을 받아서인지 자애경(Sn1.8)을 낭송하기도 한다. 이곳 선원에서는 자애경을 바탕으로 하여 운율이 들어간 게송을 만들어 부르고 있다. 새벽예불시간이나 법회, 식사시간, 심지어 오후 여덟시 마지막 좌선이 끝날 때도 합송한다. 자비관 게송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자비관 게송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대중들의 자비관 게송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하고 포근해진다.
“아얏새 미엣나네 아롱도 땃뜨와 두위
베이양 낀짜 바세
쎄이 싱예 낀짜 바세
꼬 싱예 낀짜 바세
꼬 쎄이 닛피아 찬 다 스와핀
미미도 칸다윙고 유에사웅 나인짜 바세
따-둣, 따-둣, 따-둣”
“시방에 있는 모든 생명들
위험과 해악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마음의 근심이 사라져 행복하기를!
몸의 고통이 사라져서 건강하기를!
몸과 마음이 모두 평화롭게
자신의 업을 잘 실어 나를 수 있기를!
기쁩니다, 기쁩니다. 기쁩니다.”
2019-02-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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