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에인다까사야도의 새벽법문, 담마마마까 수행기18

담마다사 이병욱 2019. 2. 1. 13:02

 

에인다까사야도의 새벽법문, 담마마마까 수행기18

 

 

2019 1 7일 새벽

 

월요일 새벽이다. 이전날 저녁 9시가 되니 졸음이 밀려왔다. 선원에 온지 일주일 되니 선원생활에 적응이 되는 것 같다. 가장 먼저 저녁 9시가 넘으면 졸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녁 8시 좌선시간이 되면 집중이 되지 않고 졸림 현상이 오는 것이다. 새벽 3 30분에는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저녁 9시대에는 잠을 자야 한다.

 

뒤척이다 잠을 깼다. 스마트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이다. 새벽일정을 알리는 타종이 대략 3 20분대에 치니 한시간도 넘게 남은 것이다. 다시 잠을 청해 자다가 잠결에 종소리를 들었다. 일어나기 싫은 시간이다. 게으른 마음에 좀 더 자기를 원해서 눈을 감고 그대로 있었다. 한참 지난 것 같다. 그러나 불과 10여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간단하게 세수만 하고 법복을 갖추어 입고 법요집과 노트를 들고 대법당으로 향했다. 도중에 김도이선생을 만났지만 말없이 걸었다. 선원에서는 묵언하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기 때문이다.

 

새벽좌선 시간에

 

아침 좌선시간은 새벽 4시부터 5시까지 한시간 동안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4 50분에 종치는 소리가 난다. 새벽예불 준비하는 시간을 갖기 때문이다. 좌선을 하면서 도중에 자세를 바꾸었다. 종칠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말라는 말이 있었지만 다리저림이 심하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도중에 자세를 바꾸었지만 사띠하려고 노력했다. 사띠가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좌선 중에는 배의 움직임이나 통증을 관찰해야 하지만 일어나는 생각은 어쩔 수가 없다. 법에 대한 것은 좋은 것이라 나름대로 판단을 했다. 그래서 좌선이나 행선이라는 것이 결국 생멸을 보자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생멸을 보아야만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좌선도중에 테라와다에서나 대승에서나 유명한 무상게가 떠 올랐다. 그것은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라는 게송이다. 우리말로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S15.20)라는 뜻이다. 설산동자의 투신설화로도 잘 알려져 있는 게송이다.

 

사야도의 새벽법문

 

월요일은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는 날이다. 그래서일까 새벽예불시간에 담마마마까 선원장 에인다까사야도가 집전했다. 선원에 도착해서 매일 새벽예불에 참가 했는데 빅쿠들이 돌아가며 집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별하게도 사야도가 새벽법문을 한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은 사야도가 새벽법문을 한다고 한다. 오늘이 그날인 것 같다.

 

사야도의 새벽법문은 5 15분부터 한시간동안 진행되었다. 아침식사 시간이 550분부터 시작되지만 이날 만큼은 30분 가량 늦게 먹었다.

 

새벽법문시간에는 평소와 다르게 혜송스님도 참석했다. 참석하여 한국수행자들을 위하여 통역해 주었다. 마침 노트를 지참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역한 것을 빠른 속도로 받아 적을 수 있었다. 노트를 가져 가지 않았더라면 듣고 흘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받아 적은 사람은 한사람뿐이었다.

 




사야도의 법문은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건질 것이 있는 법문이다. 이번 새벽법문도 그랬다. 그것은 다섯 가지 마음 닦는 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에 앞서 정신과 물질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외모를 가꾸듯이 마음을 닦는다면

 

사야도는 정신과 물질을 수행과 관련하여 이야기 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을 분명히 아는 것이 수행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은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듣던 말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말한다. 그런데 사야도는 이 말을 초기경전과 연계하여 설명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경전적 근거는 밝히지 않았지만 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근거로 법문 하는 것이다.

 

사야도는 다섯 가지 마음 닦는 법에 대한 법문에 앞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해치지 않는 사람입니다.”라 했다. 이 말은 상윳따니까야 1사랑스런 이의 경에 나온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자신에게도 행하기 때문이다.”(S3.4)라는 구절을 말한다. 반면에 신, , 의 삼업이 거친 사람은 결국 자신도 해치게 된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하여 사야도는 성형외과의 비유로 설명했다.

 

사람들은 얼굴을 예쁘게 보이려고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모만 신경 쓸 뿐 마음을 가꾸는데는 등한시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외모를 가꾸듯이 마음을 닦는다면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야도의 말이다.

 

사람들은 미인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런데 미인에게 탐, , 치가 있다면 멀리 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마음이 못되면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사야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사야도는 마음이 거칠면 가족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이전에 들어 보지 못했다. 마치 술주정이 심한 사람에게 저사람하고는 술도 함께 못 마실 사람이야!”라며 낙인 찍는 것과 같다.

 

잘 생겼지만 성격이 거치른 사람이 있다. 화를 냈을 때 그 순간 거울을 본다면 악마의 형상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미인일지라도 성격이 막되 먹은 자는 가족조차 싫어할 것이라 했다. 남에게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사야도에 따르면, 부처님은 외모를 깨끗하게 하라고 했지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부처님은 옷을 깨끗하게 입으라고 했지 옷을 잘 꾸며 입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야도는 부처님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가꾸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사야도는 다섯 가지 마음 가꾸는 법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법문했다.

 


스승을 부처님처럼

 

다섯 가지 마음 가꾸는 법 첫 번째는 신심이다. 신심은 다름 아닌 불, , 승 삼보에 대한 신심을 말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것이고 누구나 들어 본 것이다. 사야도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사야도는 스승에 대한 신심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을 부처님처럼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왜 스승을 부처님처럼 여겨야 할까? 이에 대하여 삼보에 대한 신심이 없다면 가르침을 믿지 않을 것이라 했다. 삼보를 믿지 않는다면 당연히 스승인 사야도의 말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을 믿어야 실천수행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스승을 100% 믿으라고 말했다.

 

중병에 걸려도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

 

다섯 가지 마음 가꾸는 법 두 번째는 건강이다. 건강해야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건강하지 못했을 때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을 듣고 노년출가를 떠 올려 보았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노년출가의 경이 있다. 내용은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준수하기 어렵다.”(A5.60)라고 되어 있다. 노년이 되어서 기억력이 쇠퇴하고 자꾸 들어도 잊어 버린다면 도와 과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노년이라 하여 반드시 기억력이 쇠퇴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차별이 있다. 문제는 건강이다.

 

젊은 사람도 건강하지 못하면 도와 과를 이루는데 장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야도의 법문을 들어보면 상식을 깨는 말을 했다. 사야도에 따르면 중병에 걸렸어도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혜송스님은 통역에서 죽기살기로라는 표현을 했다. 중병에 걸렸어도 죽기살기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병에 걸려 죽을 목숨일 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이왕이면 수행하면서 죽는 것이 낫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띠빳타나 위빠사나 수행 해야 함을 말한다.

 

사야도에 따르면 중병에 들었어도 수행을 하여 도와 과를 성취한 사람은 아주 많다고 한다. 부처님은 약한 수행자를 염두에 두고, 고통에 견디지 못하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했다고 한다. 이런 법문을 들으니 상윳따니까야 3권 오온에 나오는 장자 나꿀리삐따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부처님은 중병에 걸린 나꿀리삐따 장자에게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S22.1)라고 말해 주었다. 중병에 걸린 자에 대한 법문은 사리뿟따가 대신 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장자여,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속박됩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

 

 

오온을 자아로 여기고 있는 한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라는 고통에서 헤어 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을 나의 몸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나의 몸이 늙고 병들어 죽어 간다면 슬플 것이다. 만일 정말 우리 몸이 나의 몸이라면 늙지도 말고 병들지도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을 보면 몸이 나의 몸인 것 같지만 통제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몸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잘 배운 부처님 제자는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중병에 걸렸어도 슬퍼할 일도 아니고 괴로워할 일도 없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건강을 잃은 사람, 나이 들어 노인이 된 사람, 중병에 걸린 사람이 수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야도는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수행해야지라 생각하면 되고, 병에 걸린 사람은 이 보다 더 심각하게 되기 전에 수행해야지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명쾌한 말이다. 이를 우리 말 속담으로 말하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병든 자에게는 죽기전에 수행이나 하다 죽자라는 결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 보면서 수행하면 한꺼번에 두 가지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사마시시(samasīsī)’이라 한다. 이와 같이 한꺼번에 아라한과 열반을 동시에 성취하는 자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사마시신(samasīsīn: 首等者)’이라 한다.

 

중병에 걸린 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 아라한과 동시에 열반을 성취하여 한꺼번에 두 가지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고 설명되어 있다. 질병에 걸린 자가 동시에 두 가지를 성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병의 수등자(rogasamasīsīn)’라 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떤 자가 질병에 걸렸다가 질병이 치유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자를 질병의 수등자라 한다.”(Mrp.IV.6-7)라고 설명되어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는 몸은 병들었어도 마음만큼은 병들지 말라는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이는 오온의 관찰로 이루어진다. 오온이 생멸하는 것을 보고서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가 아닌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좌선을 하는 것도, 행선을 하는 것도 결국 생멸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빠사나 수행은 병을 치유하는 것도 된다. 사야도가 중병에 걸린 자도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경전과 주석에 근거한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스승의 능력과 제자의 노력으로

 

다섯 가지 마음 가꾸는 법 세 번째는 정직이다. 이 말은 인터뷰와 관련이 있다. 도와 과를 이루려면 자신이 체험한 것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스승에게 보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스승의 능력과 제자의 노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흔히 말하기를 훌륭한 스승아래 뛰어난 제자가 나온다.’라 한다. 훌륭한 스승은 다름 아닌 능력 있는 자를 말한다. 능력 있는 스승 밑에서 배운 제자가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저절로 얻어 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라 했다.

 




사야도는 인터뷰와 관련하여 보고의 의무에 대하여 말했다. 스승이 아무리 지도를 잘해도 제자가 실천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보고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보고한다는 것은 노력하고 있음의 다른 표현이라 했다. 법을 설하는 것이 스승의 책임과 의무이기는 하지만, 제자가 보고하지 않는다면 수행에 진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야도는 스승의 자격과 수행자의 노력, 이 두 가지를 강조했다. 이 두 가지를 갖추어야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죽기살기로 알아차려야

 

다섯 가지 마음 가꾸는 법 네 번째는 정진이다. 사야도는 위리야(정진)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했다. 사야도는 위리야의 힘이 훌륭하면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이 말에 대하여 혜송스님은 통역에서 죽기살기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 위리야입니다.”라고 부연하여 설명했다.

 

사야도는 위리야의 정형구에 대하여 설명했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선법과 불선법에 대한 것이다. 불선법은 멀리 하고 선법은 가까이 하는 것을 네 가지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사야도는 위리야에 대하여 사띠와 관련하여 설명했다. 사띠가 유지 되는 것은 정진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 날 때 뒤척이는 순간부터 사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늘 사띠 해야 하고 잠자리에 들 때 까지 사띠해야 함을 강조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사야도는 아무리 힘들어도 알아차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것도 죽기살기로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춥거나 덥거나 짜증 날 때에도 알아차려야 하고, 통증에도 겁내지 말고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현상에도 알아차릴 때 위리야의 힘이 좋은 것이라 했다.

 

변해 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 지혜

 

다섯 가지 마음 가꾸는 법 다섯 번째는 지혜이다. 사야도는 마지막으로 지혜에 대하여 역시 사띠와 관련하여 이야기했다. 통증이 왔을 때 그 변화의 과정을 지켜 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불구가 될 것 같은 통증이지만 사띠하면 할수록 점차 약화 되는 것을 지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변화도 있게 되는데, 통증의 변화에 따른 마음의 변화를 말한다. 이처럼 통증과 마음이 변해 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 지혜라 한다.

 

사야도에 따르면 통증에 대하여 남 보듯 하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남의 다리 보듯 마음을 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호흡도 마찬가지라 했다. 내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하는 모습을 지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흡하는 모습을 지켜 보는 마음, 즉 아는 마음으로 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를 객관명상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아는 마음을 들여다 보았을 때 물질과 정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몸에서 발생한 통증을 아는 것에 대하여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라 했다. 통증이 원인이고 아는 마음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과 정신은 하나가 아닙니다.”라 했다.

 

저의 평소법문은 혜송스님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야도는 월요일 새벽법문에서 한시간동안 많은 말을 했다. 다행히 노트와 필기구가 있어서 적어 놓았다. 나중에 보니 참으로 훌륭한 법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한걸음 더 들어가 이야기 해 준 것이다. 한마디로 건질 것이 있는 법문이라는 것이다. 미얀마 불자들은 이렇게 사야도로부터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고 있다.

 

오로지 앉아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선원에서 산다고 하여 도와 과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법문을 듣고 자세에 임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교학과 수행이 함께 가는 것이다. 사야도의 법문은 신심, 건강, 정직, 정진, 지혜에 대한 것으로 철저하게 수행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수행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혜송스님이 사야도의 법문을 통역해 주었다. 대다수가 미얀마 사람들이고 한국사람들은 23명 가량으로 소수이지만 반은 한국어이다. 담마마마까가 미얀마절이면서 동시에 한국절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미얀마의 다른 수행센터에서 이처럼 사야도의 법문을 한국어로 통역해 주는 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야도는 통역을 해 준 혜송스님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야도는 저의 평소법문은 혜송스님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혜송스님이 평소에 말한 법문이 사야도의 법문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 경’(M44)에서 부처님이 담마딘나 비구니를 칭찬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아라한이 된 담마딘나는 전남편 재가신도 위싸카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위싸카는 이런 사실을 부처님에게 알렸다. 이에 부처님은 비싸카여, 수행녀 담마딘나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수행녀 담마딘나는 크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비싸카여, 그대가 나에게 의미를 묻는다면, 나도 역시 수행녀 담마딘나가 설한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설명할 것입니다. 그 의미는 그와 같으니 그와 같이 받아 지니십시오.”(M44.37)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담마딘나 비구니가 말한 것을 추인한 것이다.

 

위리야가 되면 사띠는 자동적으로

 

사야도는 1 7일 예불시간에 다섯 가지 마음 가꾸는 방법에 대하여 법문했다. 그것은 신심, 건강, 정직, 정진, 지혜에 대한 것이다. 모두 사띠와 관련이 있다. 이 다섯 가지 중에 세 가지를 들라면 신심, 정진, 지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들라면 어떤 것이 될까?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위리야가 되면 사띠는 자동적으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라 했다.

 

사야도는 다섯 가지 마음 가꾸는 법에 대하여 정진을 가장 중요하게 말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라고 말씀했다. 이 말은 불방일정진을 뜻한다. 우리말로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D16.125)라는 뜻이다.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appamāda)는 사띠와 동의어이다. 부처님이 ‘압빠마데나 삼빠데타’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새김을 잃어버리지 말고 모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Smv.593)라는 뜻이다. 사야도가 정진을 강조한 것은 철저하게 빠알리삼장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2019-02-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