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내 생각이 옳았다, 담마마마까 수행기17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 31. 10:13

 

내 생각이 옳았다, 담마마마까 수행기17

 

 

2019 1 6일 오후

 

선원에서 처음 맞는 일요일 오전은 숨가쁘게 돌아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벽에 사리탑과 한국관 불상 점안식이 있었다. 아침 식사후에는 빅쿠 수계식과 사야도의 법문이 대법당에 있었다. 마치 잔칫집 분위기 같은 점심시간에는 거의 오백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성황을 이루었다.

 

점심식사 후에 산책을 나갔다. 선원 내의 산책이다. 선원은 대학캠퍼스처럼 광대하기 때문에 이곳저곳 볼 것이 많다. 마치 비밀의 정원처럼 가보지 않은 곳도 있다. 특히 개발되지 않은 쪽에는 농사를 짓고 있는 땅도 있다. 망고나무 길 방향 쪽으로 가 보면 갖가지 묘목이 가득 있는데 마치 묘목농장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산책을 하다 보면 갖가지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아열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야자수 등 나무와 식물이 눈길을 끈다. 식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더구나 꽃이 핀 것을 볼 수 있는데 확실히 다른 나라에 와 있음을 느낀다. 지금 한국에서는 영하의 혹독한 날씨일 것이다.

 




27번째 좌선을 했는데

 

1 6일 새벽 4시 좌선은 25번 째이다.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사실 선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다. 좌선이나 경행 등 수행 외 달리 할 것이 없다. 마치 회사에 가면 일을 해야 하듯이, 마치 밭에 가면 밭을 매야 하듯이 선원에서는 할 것이 앉아 있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1 6일에 좌선은 세 번 했다. 오전에 행사 영향 때문에 많이 앉아 있지 못했다. 행사가 끝나면 기록을 해 두었는데 노트에 글을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쓰고 나면 탈진 될 정도로 집중했다. 좌선이나 행선에 집중해야 하지만 노트 해 두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시간대 별로 기록해 두었다. 나중에 수행기 쓰는데 모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오후 5시에 26번째 좌선을 가졌고, 오후 8시 마지막 타임에는 27번째 좌선을 가졌다. 회수가 거듭될수록 점차 안정화 되어 가는 것 같다. 앉은지 이삼십분이 지나면 어김 없이 통증이 찾아 오지만 호흡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배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편의상 호흡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나빠나사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싸띠빳타나 위빠사나이기 때문에 신, , , 법으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배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돌아갈 집과 가족이 있기에

 

선원에 온지 일주일 되었다. 일주일 후면 한국에 있을 것이다. 중간 지점에서 되돌아 보았다. 선원생활에 점차 익숙해지는 것 같다. 처음 이삼일은 적응이 되지 않아 힘들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현재 시점에 좌선이 27회에 이른다. 이제 앉아 있는 것도 일상이 된 듯 하다. 농부는 밭 가는 것이 일이지만 요기(수행자)는 마음의 밭을 가는 것이 일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돌아 갈 집이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돌아갈 집이 없다면 이곳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돌아 갈 집이 있기에, 집에 가면 가족이 있기에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하는 마음이 생겼다. 일주일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다.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날자를 카운트 하고 있는 것이다.

 

좌선 시간에 배의 움직임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앉아 있으면 오만 가지 생각이 떠 오른다. 어떤 이는 생각이 죽 끓는 듯 하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어나는 생각도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것이다. 떠 오른 생각도 지나가는 생각도 관찰 대상일 뿐이다. 따라가지 않으면 된다.

 

집중수행 한번 해 보지 않은 사람이 글 쓴다고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글쓰기에 대한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종종 비난이나 비방의 글을 접한다. 물론 애정 어린 충고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글을 보면 크게 두 종류의 글임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공감하면서 긍정하거나 칭찬하는 글이고, 또 하나는 비판하면서 충고하거나 비난하는 글이다. 글을 보면 부정문 아니면 긍정문이다. 댓글을 보면 이 두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수 년 전에 접하던 댓글이 있었다. 그는 어느 카페에서인도나 스리랑카에 한번 가보지 않은 사람이 글을 쓴다.”라고 비난했다. 현지에 사는 그 사람은 갖은 모욕적인 표현과 함께 맹비난 했다. 한마디로 명예훼손감이다. 그러나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업일 것이라 여겼다.

 

또 하나 많이 접하는 댓글은 집중수행 한번 해 보지 않은 사람이 글을 쓴다.”라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집중수행 해 보라.”고 점잖게 충고하는 글을 보았다. 어느 스님은 재가불자가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 쓰는 것이 몹시 못 마땅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쓸 거라면 차라리 출가해서 글을 쓰십시오.”라고 비아냥 대듯이 댓글을 달았다.

 

지리선생이 미국에 가 보지 않고서도 미국의 지질에 대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선생이 유럽에 가 보지 않고서도 유럽역사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드시 인도나 스리랑카에 다녀 와야만, 거기서 어느 정도 살아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경전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가 보지 않아도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현지에서 사는 것과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 하는 것은 무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반드시 출가 해야만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작과 백조로 비유된 재가자와 출가자의 관계

 

가르침에 출재가의 구별이 없다. 가르침 앞에 출재가는 모두 평등하다. 다만 빠르고 느린 것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에서 백조와 공작새의 비유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

 

 

이 게송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를 아주 잘 표현 한 것이다. 한마디로 재가자는 출가자를 따라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재가자를 화려한 공작에 비유하고 출가자를 흰색의 백조에 비유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공작은 날개를 펼치면 화려한 푸르름을 자랑하지만 멀리 날지 못한다. 반면 오로지 흰색의 백조는 멀리 멀리 높게 높게 날아 갈 수 있다. 재가자가 제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현실적 삶을 살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이전 게송에서 재가자는 아내를 부양하고, 덕행자에게는 내 것이 없어, 둘은 처소의 생활양식이 같지 않다.”(Stn.220)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재가자는 아내뿐만 아니라 자식도 부양해야 한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아내를 하나가 아니라 둘 또는 셋 도 부양해야 했다. 또 재가자는 나이 든 부모도 부양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랏타빨라는 출가할 때 세존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재가에 살면서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거룩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M82.4)라며 출가에 마음을 두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에는 재가의 삶은 여러모로 장애가 된다. 이는 재가자는 남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기 어렵지만, 성자는 항상 삼가며 남의 목숨을 보호한다.”(Stn.220)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재가자가 오계조차 지키며 살기 힘듦을 말한다. 그러나 출가하면 기본적으로 계를 지키며 살기 때문에 가르침을 훨씬 빨리 받아 들일 수 있다. 백조가 공작보다 멀리 높이 나는 것처럼, 출가자는 늦게 출발해도 재가자 보다 훨씬 빨리 아홉 가지 출세간법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성자(muni)’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 설 수 없다. 그리고 따라 잡을 수 없다. 설령 사미라 할지라도 지극히 예우하는 것은 빨리 도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쌍팔배의 성자가 되면 공양받을만하고 대접받을 만하고 보시받을만하고 존경받을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S11.3)라 했다. 이런 이유로 출가자는 대우 받을 만하다.

 

견재구를 날리고 태클을 걸고

 

어느 한국스님은 태국의 불자들을 칭찬했다. 한국 불자들과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스님을 공양을 잘 한다는 것이다. 공양음식을 제공할 때는 최상품으로 정성스럽게 만들어 올린다고 한다. 스님이 다 먹을 때까지 가족은 무릎을 꿇고 기다린다고 한다. 또 어떤 스님은 테라와다 불교를 예로 들면서 한국불자들은 스님들과 대등해지려 하는 것 같다.”라고 불쾌감을 표현한다. 스님하고 맞먹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말해 주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계율이다. 테라와다 빅쿠가 대우 받는 것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기 때문이다. 탁발에 의존하며 무소유로 살아 가는 수행자를 보호하고 지키지 않을 재가불자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글을 쓰면 견재가 들어 온다.

 

글을 쓰면서 종종 견재와 태클을 받았다. 주로 기득권층이다. 불교에 대하여 많이 아는 사람들이다. 학자들도 있고 스님들도 있고 인터넷 논객도 있다. 그들은 보통불자가 글 쓰는 것에 대하여 때로 견재구를 날리고 때로 태클을 걸었다. 특히 어느 스님의 경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 스님은 자신의 글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명예훼손이라 했다. 교계신문에 필명을 거론 하며 모욕을 주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 스님이 명예훼손감이다. 그러나 그 스님의 업일 것이다. 어떤 스님은 재가불자가 감히 스님에게 맞먹는다고 했고, 또 어떤 스님은 출가하라고 자꾸 종용하기도 했다. 모두 자만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만에는 태생적 자만, 부자의 자만, 배운 자의 자만이 있는데 이 중에 하나 속할 것이다. 한국에서 보통불자가 글을 쓰면 견재와 태클을 각오해야 한다.

 

요기(Yogi)로 살아 가는 미얀마 불자들

 

미얀마에서 집중수행하면서 미얀마 불교를 알게 되었다. 좌선하는 것 만이 불교를 아는 것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부처님 당시 불교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불교를 본 것이다. 미얀마에서 재가불자들도 수행하는 것을 보았다. 이곳이 선원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미얀마 불자들은 싸띠빳타나 위빠사나가 생활화 되어 있는 듯 하다.

 

미얀마 불자들은 수행이 일상화 되어 있는 듯 하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합장을 하며 앉아 있는 모습이 거룩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건강, 학업, 사업, 치유를 기도 할 지 모른다. 전세계적으로 기복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얀마 불자들은 시간이 남으면 선원에 들어가서 요기(수행자)로서 보낸다는 것이다. 부모가 병이 나면 사원에 가서 기도하기 보다는 선원에 가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살핀다고 한다.

 



한국에는 동네마다 마을마다 교회가 있지만 미얀마에서는 사람 사는 곳에 사원이 있다. 도시의 월급생활자는 출근하기 전에 가까운 선원에 가서 한시간 앉아 있다 출근하고, 퇴근할 때는 한시간 앉아 있다 퇴근한다는 것이다. 이곳 선원에도 수 많은 미얀마 남녀 요기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수행처에 들어와서 수행복으로 갈아 입은 다음에 출가수행자들과 똑같이 생활한다. 선원에서 9계를 지키며 오후불식하며 지내는 것이다. 그래서 요기(yogi)’라 한다.

 


이번 집중수행기간동안에 미얀마불교를 체험한 것은 커다란 소득이다. 반드시 앉아 있는 것만이 수행이 아님을 알았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미얀마 불교를 접한 것은 내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재가불자가 수행하려 한다거나 글을 쓰려 하면 출가해라라는 말을 하는데, 미얀마에서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기로 지내거나 단기출가하는 것을 말한다.

 

내 생각이 옳았다

 

매일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2006년부터 썼으니 13년 째이다. 밥 먹는 것이 일상이듯이 보통불자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일상이다. 그것은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이다. 경전 문구를 반드시 글에 넣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건질 것이라 본다. 긴 글에서 부처님 가르침 한 줄 접한다면 건질 것이 있는 것이 된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출가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았다. 재가불자는 언제든지 시간만 나면 선원에 가서 앉아 있거나 경행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야도로부터 법문을 듣는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미얀마만큼 불교에 대하여 많이 아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마치 보통불자에게 있어서 글쓰기가 생활화 되어 있듯이, 미얀마에서는 미얀마불자들은 싸띠빳타나 위빠사나가 생활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확인 했을 때 내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앞에 출재가는 평등하다고. 다만 빠르고 느림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공작과 백조처럼. 미얀마 요기들이 수행복을 입고 경행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2019-01-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