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자만
유튜브로 수행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법사는 수행을 강조합니다. 수행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이론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자전거를 탈 때 이론으로 탈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수영도 실제로 해 보아야 할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수행만 강조했을 때 수행자의 자만으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수행자의 자만으로 비추어 질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배우지 못한 범부라는 말입니다. 이에 반하여 잘 배운 제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법사가 말한 것처럼 ‘이론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수행을 해 보야 알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수행만을 강조 했을 때 수행자의 자만으로 비추어 질 수 있습니다.
자만이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세 가지 자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디가니까야에서는 “세 가지 교만 곧,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 (Tisso vidhā: seyyo'hamasmī'ti vidhā. Sadiso'hamasmī'ti vidhā, hīno'hamasmī'ti vīdhā.)”(D33) 라 했습니다. 우월감도 자만이지만 놀랍게도 열등감도 자만입니다. 법사가 수행을 강조하며 자전거론과 수영론을 들어 설명할 때 이는 수행자의 자만일 것입니다. 반대로 이런 비유를 드는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열등한 자의 자만에 해당될 것입니다.
언젠가 불교TV에서 간화선 수행관련 프로를 보았습니다. 스님은 수행을 강조했습니다. 스님 역시 자전거론과 수영론을 말하면서 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설명하는 법사 역시 자전거론과 수영론을 말하면서 실제로 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 수행법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나치게 수행만을 강조했을 때 자만으로 비추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우월, 동등, 열등이라는 세 가지 자만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주석에서는 이를 세분하여 아홉 가지 자만으로 소개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우월 중의 우월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Smv.999-991)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자만입니다. 이는‘누가 나 같이 수행한 사람 있으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의 자만이라면 ‘누가 나 같은 부자가 있으랴?’라 할 것이고, 많이 배운 자는 ‘누가 나 같은 배움이 있으랴?’라 할 것입니다. 공통적으로 자아에 기반한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유튜브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훌륭한 법문도 많이 있습니다. 법문은 좋은데 지나치게 수행만을 강조했을 때 듣기에 부담스럽습니다. 만일 이런 논리를 강조한다면 범부들이 ‘키스해 보아야 알 수 있다.’라거나, ‘애를 낳아 보아야 알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수행은 당연히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해 보아야 안다거나 이론으로는 알 수 없다는 등의 말을 했을 때 이는 수행자의 자만으로 봅니다. 수행자의 자만은 듣는 이로 하여금 열등감을 조장하게 하고 불선업을 짓게 만듭니다.
2019-02-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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