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왜 무색계천이 팔난(八難)에 속할까? 담마와나선원 일요탁발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9. 2. 19. 13:15

 

왜 무색계천이 팔난(八難)에 속할까? 담마와나선원 일요탁발법회

 

 

나는 왜 이모양 이꼴로 생겼을까?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필이면 이런 집안에 태어났을까? 하필이면 이런 나라 이런 지역에 태어났을까? 이런 생각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담마와나선원으로

 

오랜만에 담마와나선원에 갔습니다. 작년 12월 중순에 간 이래 두 달 만입니다. 작년 12월 달에는 매주 일요일 나가다시피 했는데 공백이 생긴 것은 떼자사미 선원장이 한달 일정으로 미얀마 수행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선원에 살며 수행지도도 하지만 때로 집중수행하는 기간도 갖는 것입니다.

 

일요일 아침 선원에 갈 준비를 했습니다. 맨손으로 갈 수 없습니다. 아내에게 반찬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설 명절 때 만들어 놓았던 전을 준비 했습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계란말이를 만들었습니다.

 

일요일임에도 아침 일찍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요즘 일이 겹치기로 있어서 글 쓸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는데 그래도 써야만 되는 글이 있습니다. 미얀마 성지순례기 쉐우민편입니다. 일요일 아침 차분한 마음으로 써 내려 가다가 시간이 되어서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명학역으로 달려가서 남영역 가는 전철을 탔습니다.

 

청파동 담마와나선원에 도착했습니다. 오전 10시에 좌선이 시작됩니다. 늘 그렇듯이 지각합니다. 아침시간을 활용하여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좌선 중에 부스럭 거리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 쉬었습니다. 남들이 들을 정도로 컸습니다. 이내 잠잠 해졌습니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했습니다. 배의 부풀어오름과 꺼짐을 관찰하는 동안 마음은 고요해졌습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이내 사라졌습니다. 점점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습니다. 이런 맛에 좌선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도 함께 모여 하니 더욱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공동의 힘이 작용해서일 것입니다. 청정한 사람들이 청정한 마음을 내니 그 기운이 실내 공기를 맑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선원장스님은 좌선 도중에 현재 마음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라며 도중에 유도명상 하기도 했습니다.

 

공양물을 올리고

 

스마트폰 벨 소리와 함께 아침좌선이 끝났습니다. 선원장스님은 공양할 것 있으면 하라고 했습니다. 오전에 일찍 온 사람들은 공양물을 올렸을 것입니다. 좌선 도중에 왔거나 늦게 온 사람들을 위해서 공양 올릴 시간을 준 것입니다. 아침에 준비해 간 반찬 두 종류와 김이 든 쇼핑백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 준비 했습니다. 봉투는 발우에 넣었습니다. 옆에 시중 드는 법우님이 반찬이 든 쇼핑백과 봉투를 가져 갔습니다. 선원장 스님에게 테라와다식 삼배를 하고 물러났습니다.

 

테라와다식 삼배는 부담이 없습니다. 무릎 꿇고 앉은 자세에서 두 손을 합장한 상태에서 허리만 굽히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천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동작 하나하나 사띠하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은 경우 빨리 할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에서 삼배는 일어 선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오체투지 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동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삼배하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 옵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은 삼배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어떤 스님은 삼배하면 따라서 함께 삼배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테라와다 삼배는 앉아서 허리만 굽히는 식이기 때문에 크게 부담이 없습니다.

 

봉투를 준비한 것은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번 1월에 미얀마 담마마마까에 집중수행 다녀왔습니다. 그때 인솔자라 볼 수 있는 김진태선생이 한 말이 있습니다. 사원에 갈 때에는 보시금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사원에 장기간 머물다가 나갈 때 역시 보시금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사원에 갈 때와 나갈 때에는 보시금을 준비하는 것이 예의라 합니다. 이것이 불자된 도리라 합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적 예의가 있습니다. 보시하는 것은 예의입니다. 미얀마에 가서 배운 것입니다. 이를 실천하고자 이번에 봉투를 준비한 것입니다. 물론 상가에 보시한 것입니다. 많은 금액은 아닙니다. 능력껏 준비했습니다. 보시는 능력껏 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보시를 했을 때 큰 금액을 보시한 자들의 보시공덕과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음식공양하는 의식

 

점심공양시간은 11시부터입니다. 선원 3층에 공양식당이 있습니다. 개인 주택을 선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다 보니 모든 것이 비좁습니다. 법당도 거실을 사용하는 것이고 공양식당도 작은 방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수행자들은 각자 준비한 반찬을 내어 놓았습니다. 밥만 선원에서 할 뿐 모든 반찬은 조금씩 가져 온 것입니다. 이를 나누어 먹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의식을 하나 치루어야 합니다. 선원장스님에게 음식공양하는 의식입니다. 상을 하나 차려서 올리는 것입니다. 이때 수행자 여러명이서 상을 들어 올렸다 내리는 의식을 행합니다. 빅쿠는 주지 않는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음식을 주어야 먹습니다. 그래서 상올림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상올림 의식을 행할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선원장이 빠알리어로 상가하 아낫따 닙바나싸 삣세요 호뚜라고 말하면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가에 올리는 보시공덕으로 닙바나를 성취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음식공양에 대한 축원을 해주는 것입니다.

 

보시공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보시공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M142)에 따르면 아난다여, 축생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백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M142)라 했습니다. 누군가 길가의 개나 고양이, 비둘기에게 과자 부스러기라도 준다면 백배의 보시공덕이 기대된다는 것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백번의 생을 거치면서 그것은 수명, 아름다움, 행복, 힘과 지혜를 부여하고 혼란을 제거한다.”(Pps.V.71)라 했습니다. 하천에서 물고기 떼에 과자 부스러기 주는 행위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말할 것 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수행자에게 보시했을 때 보시공덕은 더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클 것입니다.

 

재가자의 보시에 의해 유지되는 상가

 

담마와나선원에 가는 것은 사실상 아비담마 강좌를 듣기 위해서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요일 오후 12 30분부터 230분까지 2시간 동안 진행하는 아비담마 강좌는 들을 만 합니다. 듣다보면 이제까지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들이 정리 되는 듯합니다. 선원장스님이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요점을 잘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받아 적어서 후기를 작성할 때 활용합니다.

 




선원장스님은 아비담마 강좌에 앞서 짧게 미얀마 집중수행에 대한 소감을 말했습니다. 담마와나 선원 수행자 두 명과 함께 한달 동안 쉐우민 국제선원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선원장스님은 주로 보시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선원장스님에 따르면 출가자는 재가자의 보시에 의해 유지된다고 했습니다. 출가자는 돈벌이를 위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재가의 보시가 없다면 몸을 유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출가자는 마음이 안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얻어 먹으면서 살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매일 탁발을 한다고 했습니다.

 

미얀마에서 빅쿠(출가수행자)들은 매일 탁발 나갑니다. 대개 오전 8시에 나가 한시간 가량 밥을 얻어 옵니다. 얻어 온 밥을 한데 모아 오전 11시 점심시간에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빅쿠들이 탁발 나가는 것 자체가 재가자들에게 보시공덕 쌓을 기회를 준다는 사실입니다.

 

보시라 하여 반드시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주는 것이야말로 보시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자는 재가자에게 보시 지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출가수행자에게 보시 하는 것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에서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난 밖의 사람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천억배의 갚음이 기대된다.”(M142)라 했습니다. 축생에게 보시하면 백배라 하는데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 수행자에게 보시하면 천억배라 합니다.

 

보시는 생활이고 일상이다

 

스님들은 보시에 대하여 이야기 많이 합니다. 법문을 하다가도 반드시 보시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보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들은 왜 보시 이야기 안하나 했더니 결국 또 그 이야기 하네.”라며 비꼬듯이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보시공덕을 이야기하는 스님의 계행이 바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에서는 부도덕한 일반사람들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천배의 갚음이 기대된다.”(M142)라고 했습니다. 축생이 백배이고, 그 다음이 부도덕한 자에게 보시해도 천배가 기대 된다고 합니다. 도덕적인 일반사람은 십만배이고, 청정한 수행자는 천억배가 된다고 합니다. 흐름에 든 성자에게 보시하면 그 보시는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갚음이 기대된다.”(M142)라고 했습니다.

 

떼자사미 선원장은 보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습니다. 스님들이 말 끝 마다 보시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부류 중의 하나라 여길 것이 염려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 보시는 특별한 날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시는 생활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는 미얀마 수행센터에서 살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빅쿠들은 받을 얻어 먹고 살아 갑니다. 그래서 매일 오전 8시가 되면발우를 들고 탁발 나갑니다. 재가자들은 탁발 행렬이 오면 맨발로 기다렸다가 밥을 퍼 줍니다. 이런 모습은 미얀마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미얀마 불자들은 보시가 생활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얀마 불자들에게 있어서 보시는 일상입니다.

 

부처님도 이렇게 밥을 빌어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밥을 빌어 먹는 것 자체가 재가자들에게는 공덕 지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청정한 삶을 지향하는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불자라면 보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입니다.

 

보시공덕 더 수승한 지계공덕

 

떼자사미 선원장은 누구나 꺼려 하는 보시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를 종교로 갖는 자들은 보시의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어느 스님이 보시이야기만 한다면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를 종교로 가진 목적은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보시공덕뿐만 아니라 지계공덕도 쌓아야 하고, 더욱 더 중요한 수행공덕을 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보시공덕 이야기만 하고 지계공덕과 수행공덕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보시공덕 보다 더 수승한 것이 지계공덕입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사방의 참모임을 위해 승원을 세우는 것이나 청정한 믿음의 마음으로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귀의하는 것 보다, 청정한 믿음의 마음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A9.20)라 하여, 절을 지어 보시하는 것 보다도 오계를 지키는 과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계행이 바탕이 되지 않는 보시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닙니다. 절을 지어 승가에 보시했더라도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오계를 지키는 자와 비교했을 때 그 보시공덕은 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지계공덕은 보시공덕과는 비할 바 없이 큰 것입니다. 누군가 자꾸 보시공덕만 이야기하고 지계공덕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계공덕보다 더 큰 공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행공덕입니다.

 

지계공덕 보다 더 수승한 수행공덕

 

절에 가면 늘 듣는 말이 있습니다. 대개 스님들이 하는 말은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절에서는 각종 재일이 많습니다. 입시철이 되면 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은 수행하라고 말하는 것은 드문 것 같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라고는 말하지만 앉아서 좌선수행이나 일어서서 행선수행, 그리고 일상에서 늘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라는 말을 아직까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기도도 하나의 수행방법이고, 수행을 하는 곳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절에서는 열심히 기도하세요!” 라고 말할 뿐 열심히 수행하세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절에서 말하는 기도는 이른바 사대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에 대한 것으로 건강, 입시, 사업, 치유에 대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면 사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시공덕을 쌓을 기회도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기 때문에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보시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수행공덕은 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을 보면 수행공덕을 알 수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두 가지 수행공덕에 대하여 소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애관무상관입니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자애관을 보면 학습계율을 갖추는 것보다,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 했습니다. 여기서 학습계율은 오계를 말합니다. 오계를 지키면 절을 지어 보시하는 것 보다 공덕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만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 오계를 지키는 공덕 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봄에 라일락이 피면 진한 향내가 납니다. 그러나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합니다. 꽃에 코를 대고 있어도 바람이 반대로 분다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갑니다. 그래서 법구경에 “꽃향기도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고 전단향이나 다라수향이나 말리까향도 못하지만 참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니 참사람은 모든 방향으로 향기를 품네.(Dhp.54)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사방팔방, 아니 천상에 까지 이릅니다. 그런데 수행의 향기는 더 하다는 것입니다. 잠시 스치듯 자애의 마음을 내어도 오계를 지키는 공덕 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계의 향기보다 자애의 향기가 훨씬 더 수승한 것입니다.

 

자애관 보다 더 수승한 공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관입니다. 경에 따르면 학습계율을 갖추는 것보다,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보다,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 했습니다. 손가락 튕기는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무상에 대한 지각을 갖는 것이 가장 큰 공덕을 짓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위빠사나 수행공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애관이 사마타 수행공덕이라면, 무상관은 위빠사나 수행공덕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수행공덕입니다. 제 아무리 억만금을 보시해도, 사원을 지어 승가에 보시해도 오계를 지키는 것만 못합니다. 제아무리 오계를 평생 지켜도 잠시라도 수행하는 것만 못합니다. 결국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가르침은 수행으로 귀결됩니다. 그것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S22.59)라는 정형구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갈애와 자만과 견해에서 벗어났을 때 어느 공덕보다도 가장 수승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담마와나선원장 떼자사미 스님은 미얀마 갖다 온 이야기를 마치면서 보시, 계율, 수행공덕 쌓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라 거주처가

 

아비담마 강좌가 시작 되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처음 열리는 강좌입니다. 교재는 아비담마길라잡이입니다. 5장 인식과정을 벗어난 마음의 길라잡이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인식과정을 벗어난 것은 인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재생연결, ,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범부들이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는 진리, 뭇삶, 결생, 조건의 유형인 네 가지 사실은 보기도 어렵고 설하기도 극히 어렵다.”(Vism.17.25)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보고 누가 설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붓다고사는 성전을 통달한 자가 아니면 연기의 해석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경지이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에 이른 자이거나 빠알리 삼장에 통달한 자가 보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을 보고 설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네 가지 인식을 벗어난 과정 즉 세상, 재생연결, , 죽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떼자사미스님은 인식을 벗어난 세상을 설명하면서 업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다. 여기서 말하는 인식을 벗어난 세상은 31개의 세상을 말합니다. 각자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하여 형성된 세상입니다. 누군가 욕계천상에 태어나고 싶다면 보시와 지계의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서원입니다.

 

천상에 나고자 하는 사람은 서원을 해야 합니다. 이런 원리는 부자에도 적용됩니다. 누군가 부자가 되고 싶거든 먼저 부자가 되기 위한 서원을 하라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되고 싶거든 과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서원을 하고, 판사가 되려면 판사가 되기 위한 서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서원을 하고 난 다음 보시공덕을 쌓고 지계공덕을 쌓으면 자신이 바라는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색계나 무색계 천상도 서원을 해야 태어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모두 자신이 지은 행위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요즘 금수저이니 흙수저이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는 태어날 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고, 누구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을 내려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철저하게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른 것입니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라 거주처가 마련되는 것이라 합니다. 나라나 지역, 가문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은 불교적 시각으로 본다면 이전에 공덕이 되는 행위를 했기 때문으로 봅니다.

 

왜 무색계천이 팔난(八難)에 속하는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 따라 미래에 과보로 나타납니다. 가장 수승한 수행공덕을 쌓고 있다면 그 공덕의 힘으로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도 수행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니밋따를 보는 것에 올인할 것입니다. 반면 위빠사나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빠라맛따를 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수행대상에 따라 길이 달라집니다. 이에 대하여 떼자사미스님은 알랄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의 예를 들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 때 알랄라 깔라마로부터 무소유처정, 웃다까 라마뿟따로부터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만족할 수 없어서 떠났습니다. 떠난 이유는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홀로 수행하여 마침내 위없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누군가에게 알려 주려 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맞는 것인지, 다른 사람도 이해 할 수 있는 것인지 알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떠 오른 인물이 두 명의 스승인 알랄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였습니다. 이는 율장대품에서 내가 누구에게 가장 먼저 가르침을 설할까? 누가 이 가르침을 신속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Vin.I.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명은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율장대품에서는 하늘사람이 세존이시여, 알랄라 깔라마는 죽은 지 칠일이 되었습니다.”라며 알려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웃다까 라마뿟따를 떠 올렸으나 하늘사람은 어제 저녁에 죽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찾아 갔던 것입니다.

 

떼자사미스님에 따르면 알랄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는 복이 없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분명히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 했을 것입니다. 두 명의 스승이 복이 없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무색계 천상에 태어난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무색계 천상의 경우 정신만 있고 몸이 없기 때문에 눈과 귀와 같은 감각기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법을 설해도 들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수명은 무척 길다는 사실입니다.

 

천상도표에 따르면 무소유처천은 6만겁이고, 비상비비상처천은 84천겁입니다. 한겁의 기간에 우주의 성주괴공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주가 수없이 생성되고 파괴되기를 거듭하는 엄청난 시간입니다. 더구나 현겁에는 까꾸산다, 꼬나가마나, 깟싸빠, 고따마 이렇게 네 명의 붓다가 출현했습니다. 또한 현겁에는 멧떼이야(Metteyya: 彌勒佛)의 출현이 예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번 무색계천에 태어나면 부처가 출현해도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담마마마까 법요집을 보면 아침예불 시간에 사악도와 삼종의 나쁜 세상과 팔난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삼종의 나쁜 세상이란 가뭄으로 인하여 허덕이는 두배이깐다라 겁, 기아로 허덕이는 로깐다라 겁, 서로 죽이고 전쟁하는 싸따따라 겁을 말합니다. 팔난은 지옥, 축생, 아귀, 아딴냐천, 무색계, 변지하천, 사견, 눈과 귀가 먼 것, 부처가 출현하기 전에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팔난 중에 무색계 천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정수행을 하여 네 번째 선정의 힘으로 무색계천에 태어났지만 불교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좋지 않은 세상입니다. 물론 도와 과를 닦아 그곳에 태어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로지 니밋따 그것 하나 바라보고 선정수행하여 무색계에 태어 났을 때 갇힐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것도 우주가 수도 없이 성주괴공하는 한량 없는 세월입니다. 더구나 눈과 귀가 없기 때문에 부처가 출현해도 알아 들을 수 없어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떼자사미 스님은 부처님이 알랄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법문 해주고 싶어도 눈과 귀가 없어서 해 줄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무색계가 팔난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법회의식은 회향의식으로

 

아비담마 강좌가 끝났습니다. 미얀마에서 집중수행 해서일까 감관이 맑은 것 같습니다. 안거를 마친 수행자들의 감관이 좋은 것과 같습니다. 담마와나에 온 모든 수행자들 역시 감관이 맑고 좋아 보였습니다. 모든 법회의식은 회향의식으로 마무리 됩니다. 빠알리어와 한글로 된 것을 독송합니다.

 




회향문을 보면 가장 먼저 삼보에 예경올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이어서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발원하고, 번뇌를 벗어나기를 발원하고, 계행공덕으로 닙바나에 이를 조건이 되기를 발원하고, 이와 같은 수행공덕으로 도와 과의 진리가 성취되기를 발원하고, 이와 같은 공덕이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되기를 발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지은 공덕의 힘으로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 삿되고 어리석은 길 따르지 않고, 올바르고 지혜로운 길 따르겠습니다.”라며 공덕회향 게송을 낭송합니다. 자신이 지은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남김 없이 모든 존재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마무리는 항상싸두! 싸두! 싸두!”로 끝납니다.

 

 

아난다여, 그래서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에게는 하층의 세계에 의식이 확립된다. 이와 같이 해서 미래 재생존재로 태어난다.”(A3.76)

 

아난다여, 그래서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에게는 중층의 세계에 의식이 확립된다. 이와 같이 해서 미래 재생존재로 태어난다.” (A3.76)

 

아난다여, 그래서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에게는 상층의 세계에 의식이 확립된다. 이와 같이 해서 미래 재생존재로 태어난다.” (A3.76)

 

 

 

2019-02-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