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 않은 시기에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담마와나선원 아비담마강좌
“천상에 태어나려면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담마와나선원 아비담마 강좌에서 들은 말이다. 2019년 2월 24일 일요일 오후 아비담마 강좌에서 떼자사미스님은 “천상에 태어나려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업을 지어야 하며 계행을 지키고 어느 곳에 태어날 것인지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선업도 골고루 촘촘하게 지어야 한다고 말했고, 태어날 곳에 대해서는 콕 집어야 함을 강조했다.
화면이 바뀌듯이
요즘 케이블채널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이제 취미가 되었다. 이전에는 시사에 관심이 많았으나 이제 OCN, 스크린, 씨네프 등 케이블채널에 시선이 머물러 있다. 최근 트렌드를 보면 ‘죽음’에 대한 것이다. 어제 본 것은 ‘7번째 내가 죽던 날’이다. 도중에 보았지만 인터넷 검색하면 대강 줄거리를 알 수 있다. 자동차 사고로 죽었음에도 눈을 뜨니 살아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죽었는데 잠을 깨 보니 살아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런데 일곱 번째에는 진짜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영화를 접하면 지금 살아 있는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죽음이라는 것도 마치 영화에서 장면이 바뀌듯 다른 세계로 장면이 바뀌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전개 되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요정의 경’(S1.46)이 있다. 경을 보면 어느 하늘사람이 “요정들의 노래가 메아리치고 유령들이 출몰하는 숲은 무명의 숲이라 불리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 (S1.46)라고 되어 있다. 이 게송은 삼십삼천 ‘환희의 동산(nandana)’을 묘사한 것이다. 보시하고 지계한 공덕으로 태어나는 천상을 말한다. 그런데 유령이 출몰하는 곳이라 했다. 여기서 유령은 ‘앗차라’라고 하는 천상의 무희를 말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빅쿠가 숲에서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고행을 했는데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뇌졸증으로 죽었다. 눈을 떠 보니 삼십삼천 환희의 동산에 화생하여 천상의 무희들에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빅쿠가 원했던 것이 전혀 아니다. 빅쿠는 해탈과 열반을 서원했음에도 풍병이라 불리우는 뇌졸증으로 죽어서 곧바로 천상에 화생한 것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것이 화면이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천상이 가장 좋을까?
천상에 태어나려면 서원을 하라고 했다. 그것도 콕 집어서 서원을 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욕계 여섯 천상 중에서도 어느 곳이 가장 좋을까? 초기경전과 주석서를 보면 단연 ‘삼십삼천(tāvatiṃsa)’이다. 욕계 두 번째 천상을 말한다. 인간 바로 위에 사대왕천이 있는데, 사대왕천 바로 위에 삼십삼천이 있는 것이다. 삼십삼천의 수명은 1,000천상년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3,600만년이다.
천상에 태어나면 복과 수명이 보장된다. 이는 인간과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는 지복이다. 인간이나 인간 이하 악처에 태어나면 과거 전생에 지은 악행으로 인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나, 천상에 태어나면 선업공덕으로 인하여 복과 수명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상에서 살만큼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이처럼 복과 수명이 보장되는 천상의 삶이야말로 인간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옛날 환갑잔치할 때 수(壽)와 복(福)이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써 놓았다.
초기경전에서는 삼십삼천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법구경 48번 게송 인연담을 보면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가 있다. 삼십삼천에 살고 있던 천녀가 어느 날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사밧티 시의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아들딸 낳고 살만큼 살다가 다시 삼십삼천에 화생한 이야기를 말한다.
천녀는 자신의 주인에게 인간세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준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백년인데, 인간의 백년은 천상에서 하루에 지나지 않다고 했다. 천녀는 잠시 인간세계에 다녀 온 것이다. 이런 계산법은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덕목에 대한 경’을 보면 “비싸카여, 인간의 백 년이 서른 셋 신들 하늘나라의 하루 낮 하루 밤이고, 그 하루의 삼십 일이 한달이고, 그 한 달의 십이 개월이 일년이고, 그 일년의 천년이 서른 셋 신들 하늘나라의 신들의 수명입니다.”(A3.70)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백년이다. 그것도 보장되지 않는 수명이다. 천녀는 오십년을 인간세계에서 보냈지만 천상에서는 반나절에 불과하다. 잠시 마실 다녀오는 시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들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녀는 자신의 주인에게 “인간들은 늙음과 죽음이 없이 무수한 세월을 사는 것처럼 방일합니다.”(DhpA.363-366)라고 말한다.
천상에서 하루는 인간의 백년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뭇삶의 목숨은 짧다.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채워지기도 전에 죽는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의 마음이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Dhp48)라고 게송을 읊는다. 이것이 법구경 인연담에서 보는 삼십삼천에 대한 이야기이다.
화생(化生: opapatika yoni)에 대하여
초기경전과 주석서에 따르면 천상은 즉시 태어나는 곳이다. 인간과 달리 태에 들어 태어나는 곳이 아니다. 죽자마자 곧바로 태어나는 것이다. 마치 화면이 바뀌듯이 태어나는 것이다. 꿈을 꾸다가 눈을 뜨는 것과 같다. 이를 화생(化生: opapatika yoni)이라 한다. 완성된 채로 급작스럽게 태어난 존재를 말한다. 인간과 축생을 제외한 존재들이 이에 해당된다.
화생은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부처님이 “사리뿟따여, 이러한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네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M12)라고 말씀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생은 홀연히 생겨난 것이라 하여 화생이라 한다. 천상이나 지옥에 태어나는 것도 완성된 상태로 홀연히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홀연히 생겨나는 것이 가능할까? 이는 재생연결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부처님이 재생연결식(paṭisandhādiviññāṇa)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초기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띠 빅쿠가 “이 의식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M38)라는 사견을 말하고 다녔다. 몸과 마음이 있어서 마음이 몸이 무너지면 마음이 윤회함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의식도 조건적으로 생겨난다는 것, 조건 없이는 의식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라며 사띠 빅쿠를 나무랐다.
재생연결식은 일반 범부들의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내생과 윤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상가하 제5장에서는 인식 과정에서 벗어난 것이라 하여 ‘인식과정에서 벗어난 마음과 존재계’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자만에 속한다.
자신의 인식과정에 포착이 되지 않았다고 하여 의심한다면 회의론자가 되기 쉽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인지된 것만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깜냥(感量)으로 초기경전을 재단 했을 때 수용할 수 있는 경은 몇 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항상 하는 말은 ‘부처님은 고와 고의 소멸만을 얘기 했다’라고 하며 담마(Dhamma), 그 중에서도 사성제만을 말한다.
부처님은 담마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담마와 함께 깜마(業)에 대해서도 말했다. 오로지 담마에 대한 것만 말한다면 반쪽만 알게 되는 것이다. 담마와 깜마를 모두 알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알 수 있다. 초기경전은 담마와 깜마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아비담마상가하에서는 인식을 벗어난 마음과 세계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영역이다. 부처님처럼 깨달은 경지에 이른 자들이 인식하는 영역이다. 최소한 삼장에 대하여 통달한 자가 아니면 “진리, 뭇삶, 결생, 조건의 유형인 네 가지 사실은 보기도 어렵고 설하기도 극히 어렵다.”(Vism.17.25)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 아비담마 논장이다. 아비담마논장은 칠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비담마 칠론을 요약해 놓은 것이 아비담마상가하이다. 아비담마상가하에서는 인식을 벗어난 마음과 존재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그래서 서른 한 가지 세상이 소개 되어 있다. 인간과 축생을 제외하고 인식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 곳 중에 천상의 세상이 있다. 천상은 화생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그것도 다 갖추어져 완성된 형태로 즉각 태어나는 곳이다. 마치 화면이 바뀌듯이, 꿈에서 깨듯이 곧바로 화생하는 곳이다.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려면
욕계천상에 태어나려면 보시하고 지계하고 서원을 세우면 된다고 했다. 가장 인기 있는 천상은 아마 삼십삼천일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과 주석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색계나 무색계는 수행공덕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수행하지 않는 자는 결코 갈 수 없는 곳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탐욕을 내려 놓음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오욕락을 내려 놓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선정에 들어 가는 조건을 보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라는 정형구로 되어 있다. 색계와 무색계로 들어가는 첫번째 조건은 감각적 욕망을 내려 놓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욕계를 벗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자는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아야 한다. 여기서 수행공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말한다. 이 세 가지 공덕으로 원하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 그곳은 색계에 무색계의 세상이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만 하면 삼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색계와 무색계에 화생 했더라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 한 삼계를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색계와 무색계 세상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존재
색계에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asaññasatta)이 있다. 색계 4선천에 있다. 문자 그대로 지각(sañña)이 없는 존재를 말한다.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어도 지각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감각기관이라 하면 시각과 청각을 말한다.
색계에서는 남녀 구별이 없는 세상이고 기쁨을 음식을 먹고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따라서 보는 것과 듣는 것 외 다른 감각기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상유정천은 몸과 감각기관은 있으나 지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과 같다. 마치 청동으로 만든 동상과 같고 나무로 만든 인형과도 같다. 지각이 없기 때문에 살아 있어도 죽은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길라잡이에서는 “인식에 대해서 혐오하기 때문에 이곳에 태어난다.”(428p)라고 설명했다.
세상 살다 보면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때가 있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귀를 막고 싶을 때가 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고 듣는 것에 대하여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있는 곳에 살지 못하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홀로 사는지 모른다. 차라리 장님으로 귀머거리로 사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래서 지각을 극도로 혐오하는 수행을 하면 그런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곳이 무상유정천인데,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각이 없기 때문에 죽은 듯이 보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 무상유정천이다. 그런데 무상유정천의 존재가 죽으면 지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전생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지각없이 한평생 지냈기 때문이다. 죽어야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에게 새로운 태어남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의 경’(D1)에서는 ‘우연론자’가 되는 것이라 했다.
우연론자는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한다.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마치 잠에서 깨어 나듯이 지각이 돌아 왔을 때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다.”(D1.62)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연론자에 대하여 부처님은“수행승들이여, 지각을 여읜 뭇삶이라는 이름의 신들이 있는데, 그런데 지각이 생겨나면 그들은 그 신들의 무리에서 죽는다.” (D1.62)라고 설명했다. 무상유정천은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상유정천은 죽어야 사는 삶이 된다. 살아 있을 때는 지각이 없기 때문에 죽은듯이 산다. 그러나 죽으면 지각이 되돌아 온다. 그래서 죽어야 사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갑자기 자신도 있고 세상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신도 세상도 우연히 생겨난 것처럼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상유정천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에서는 아홉 가지 주처 중의 하나라 한다. 무상유정천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지각이 없는 뭇삶들처럼, 지각도 없고 느낌도 없는 뭇삶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뭇삶들의 주처이다.”(A9.24)라 한 것이다.
정거천에 대하여
무상유정천에 대하여 다섯 번째 주처에 속한다고 했다. 경에서는 아홉 가지 주처를 말하고 있다. 욕계를 포함하여 색계 네 곳과 무색계 네 곳을 말한다. 이를 구주처라 한다. 여기서 무상유정천은 불교적 세계관 도표에 따르면 색계 4선처에 속해 있다. 그러나 경에서는 별도로 무상유정천이라 하여 다섯 번째 주처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 ‘의식의 주처에 대한 경’ (A7.44)을 보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의식의 주처에 대한 경’을 보면 경에서는 7주처만 언급되어 있다. 무상유정천이 빠져 있다. 이에 대하여 “의식의 경계선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480번각주)라 했다. 무상유정천은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존재라 볼 수 있는데 의식도 경계선상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환자가 화생한다는 정거천은 어느 주처에 속해 있을까?
아홉가지 주처를 보면 정거천은 보이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불 환자들만이 가는 세계를 말한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 4선천 위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아홉 가지 주처(A9.24) 또는 일곱가지 주처(A7.44)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거천은 불환자들이 화생하는 곳이다. 그러나 아홉 가지 주처(A9.24) 또는 일곱 가지 주처(A7.44)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다만 세상 도표를 보면 색계 사선천 위에 다섯 가지 세계가 표시되어 있다. 즉 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 청정한 삶을 사는 하늘세계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위한 전쟁터와 마찬가지여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겁 동안 부처님이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비어 있는 곳이다.”(Mrp.IV.190)라고 되어 있다.
정거천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가장 먼저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에 태어나야 한다. 만약 정법이 변질되어 사라져 버린다면 정거천은 텅텅비어 있을 것이다.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 한량 없는 세월동안 비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전쟁터와 같다고 했다.
눈과 귀가 없어서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무상유정천은 피해야 할 곳이다. 부처님의 정법이 없는 시대에 태어난 자들은 지각을 혐오하여 그 수행공덕으로 태어나는 곳이 무상유정천이다. 정법이 없는 시대에 선정 수행을 닦은 공덕으로 태어난 것을 말한다.
지각을 혐오하는 자가 정법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틀림 없이 닙바나에 이르렀거나 못되도 정거천에 화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늘 염오와 이욕과 해탈에 대하여 말씀 했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무상유정천은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피해야 할 거주처이다. 시각과 청각이라는 감각기관이 있음에도 지각하는 것을 혐오하여 마치 죽은 듯이 사는 자에게 부처님 설법을 알려 주어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수명은 색계에서 가장 길다. 수명이 무려 500겁이다.
무상유정천은 부처가 수 없이 출현해도 지각이 없어서 가르침을 접할 수 없다. 그런데 무상유정천 못지 않게 정법과 인연이 없는 천상이 있다. 무색계의 네 개 천상을 말한다. 즉 공무변처천(2만겁), 식무변처천(4만겁), 무소유처천(6만겁), 비상비비상처천(8만4천겁)이다. 이들 천상은 수명 또한 엄청나게 긴 것을 알 수 있다. 출현해도 눈과 귀가 없어서 알아 들을 수 없다.
정법으로 무색계천에 태어났을 때
무상유정천은 눈과 귀는 있어도 지각이 없기 때문에 가르침을 접할 수 없다. 무색계의 네 개 세계는 아예 눈과 귀가 없기 때문에 부처가 출현해도 가르침을 접할 수 없다. 좋지 않은 시기에 태어나 선정수행을 닦은 공덕으로 그곳에 태어났지만 복과 수명이 다하면 윤회 해야 한다. 불교 수행자의 입장으로 본다면 결코 가서는 안될 세계이다. 그런데 네 개의 무색계천은 위빠사나 수행공덕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붓다아비담마를 보면 다음과 같다.
“4가지 무색계에서는 예류도의 성자를 제외하고 7가지 성자와 3가지 원인 있는 범부 1가지가 존재한다. 예류도는 무색계에서 얻을 수 없다. 인간계에서 무색계 선정을 얻은 예류자, 불환자는 무색계에 재생하여 적절한 과정을 밟아 보다 높은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 (붓다아비담마 247p)
아비담마상가하를 설명하는 책이 초기불전연구원의 ‘아비담마길라잡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얀마의 ‘멤 틴 몬’이 지은 붓다아비담마도 있다. 붓다아비담마에서는 도와 과를 이룬 자가 무색계에 화생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아비담마길라잡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범부들이 무색계 선정 수행을 하면 그 공덕으로 무색계의 네 개의 세상 중의 하나에 화생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피해야 할 곳으로 팔난(八難)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도와 과를 이룬 성자들이 갔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류도를 제외한 예류과 이상의 성자, 즉 일곱 부류의 성자가 무색계 선정 수행을 하여 그 공덕으로 태어났을 때 그곳에서 그곳에서 적절한 과정을 밟아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네 가지 중에 공무변처천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공간이 무한한 세계에 속하는 하느님나라 신들의 수명은 이만 겁이다. 그 가운데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수명이 있는 동안 살고, 그들 신들은 모든 수명을 다 살고 지옥에도 가고, 축생에도 가고, 아귀계에도 간다. 그러나 세존의 제자는 그곳에 수명이 있는 동안 살고, 그들 모든 신들은 모든 수명을 다 살다가 그 존재 가운데 완전한 열반에 든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은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과 배운 고귀한 제자와의 사이에 존재로 가는 것의 차이이자 차별이자 특성이다.”(A3.114)
일반범부와 부처님 제자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 범부가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 선정수행을 한 공덕으로 무색계천에 태어나지만 복과 수명이 다하면 미래가 보장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지옥에도 가고, 축생으로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법의 시대에 태어나 위빠사나 수행과 선정수행을 하면 그 공덕으로 무색계천에 태어났을 때 그곳에서 단계를 밟아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했다. 경에서는 “이것은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과 배운 고귀한 제자와의 사이에 존재로 가는 것의 차이이자 차별이자 특성이다.”(A3.114)라 했다.
좋지 않은 시기에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천상에 태어나려면 조건이 있다. 그것은 보시와 지계, 그리고 서원을 하는 것이다. 이는 욕계천상에 대한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 천상에 태어나려면 하나 더 추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수행이다. 그래서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의 힘으로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여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복과 수명이 다하면 내려 와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악처이기 쉽다. 선업공덕을 다 찾아 먹었으면 남은 것은 악업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지옥이나 아귀, 축생, 아수라와 같은 악처로 태어난다.
천상에서는 복과 수명이 보장된다. 선업공덕에 대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상중에도 피해야 할 천상이 있다는 것이다. 수명이 긴 천상을 말한다. 이는 색계 무상유정천과 무색계의 네 개 세계를 말한다. 공통적으로 보고 들을 수 없다. 부처가 출현해도 정법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정법을 알려 주고 싶어도 무상유정천처럼 지각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시각과 청각기능이 아예 없는 무색계천의 존재는 설법을 들을 수 없어서 정법을 접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 수명이 긴 존재들에게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이신 세존이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고요로 이끌고 평화로 이끌고 깨달음으로 이끌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에 의해 선포된 가르침이 설해진다. 그러나 이 사람이 어떤 수명이 긴 신들의 무리에 태어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청정한 삶을 사는데 네 번째 좋지 않은 시간, 좋지 않은 시기이다.” (A8.29)
이 경은 앙굿따라니까야 ‘좋지 않은 시간의 경(Akkhaṇa sutta)’에 실려 있다. 여기서 ‘좋지 않은 시간’이란 정법을 접할 수 없는 시기에 태어난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여덟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팔난(八難)이라 볼 수 있다. 차례로 나열해 보면 1) 지옥에 태어나는 것, 2)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 3), 아귀로 태어나는 것, 4) 수명이 긴 신의 무리들에 태어나는 것, 5) 변방에 야만인으로 태어나는 것, 6) 사견을 갖는 것, 7) 지혜 없이 태어나는 것, 8) 정견을 구분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무상유정천과 무색계 네 개의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네 번째에 해당되는 ‘수명이 긴 신의 무리들에 태어나는 것’에 해당될 것이다.
아홉 가지 출세간법
흔히 지금을 정법시대라 한다. 정법시대에 대하여 여러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아홉 가지 출세간법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향사과의 성자와 열반을 말한다. 성자가 출현하는 시기가 정법의 시대임을 말한다. 과연 지금 이 시대는 정법시대일까?
“인간으로 태어나
바른 가르침이 설해질 때에
올바른 시기를 얻지 못하면
그 시기를 지나치네.
길을 방해하는
좋지 않은 시기들은 많다.
세상에 여래는
언젠가 어디선가 출현하는가?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을
눈앞에 보는 자
인간으로 태어남과
올바른 가르침의 교시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자라면
마땅히 그것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리.
어떻게 올바른 가르침을 이해하고
올바른 시기를 놓치지 않을까
올바른 시기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네.
이 세상에서 올바른 법이 주는
해탈의 길을 잃은 자는
이익을 실현하지 못해
오랜 세월 후회하는 상인과 같네.
무명에 덮인 사람은
올바른 가르침을 어기고
생사의 윤회를
오랜 세월 겪어야 하리.
인간으로 태어나
올바른 가르침의 교시를 만나
스승의 말씀을 행했으니
미래에 행할 것이고 현재에 행하네.
여래가 선포한 길을
걷는 자는
올바른 시기를 알고
위없는 청정한 삶을 꿰뚫었네.
빛에서 생겨난
눈 있는 자가 가르쳐 준
수호 속에서 제어하여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번뇌 없이 지내네.
악마의 세계로 이끄는
모든 경향을 자르고
번뇌를 여윈 님들은
세상에서 피안에 도달하리.”(A8.29)
2019-02-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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