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해서 뭐 할겁니까?”예비수행 네 가지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이 서울 나들이를 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담마와나 선원에서 빤냐와로 스님을 초청한 것이다. 2019년 3월 16일 빤냐와로 스님 초청법회에는 담마와나 선원장 떼자사미 스님을 비롯하여 떼짓사라 스님도 참석하여 모두 세 분의 테라와다 교단 소속의 스님들이 참석했다.
이와 같은 공양공덕으로
초청법회는 탁발법회식으로 진행되었다. 각자 가지고 온 것을 공양하는 식이다. 공양물은 사대필수품에 대한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잠 잘 것, 그리고 의약품이다. 어느 것이든지 가져 오면 된다.
가장 많이 가져 오는 것은 먹을 것이다.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이 대부분이다. 봉투를 올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상가에 보시하는 것이다. 사대필수품은 출가수행자에게 보시하고, 돈은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탁발법회 식순을 보면 탁발공양게송이 있다. 스님들과 승가에 보시물을 공양 올리고 난 후에 모두 “상갓사 데마, 이당 메 다낭 수키 혼뚜짜 닙바낫사 빠짜요 혼뚜”라며 빠알리어로 합송한다. 이 말은 “상가에 공양올립니다. 이와 같은 공양공덕으로 행복해지고 닙바나에 이를 조건이 되길 바라겠습니다.”라는 뜻이다.
보시공덕 다섯 가지 이익
보시공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보시공덕은 지계공덕, 수행공덕과 함께 불자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삼대덕목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덕목은 닙바나에 이를 조건이 되며 또한 힘이 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점점 힘이 강해져서, 그 강력한 힘으로 닙바나에 이를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보시공덕만을 놓고 본다면 다섯 가지 이익이 있다. 이는 경전을 근거로 한다. 앙굿따라니까야 ‘쑤마나의 경’을 보면 “쑤마나여, 인간에 태어난 존재로서 그 보시하는 자는 다른 보시하지 않는 자를 다섯 가지에서 능가합니다. 즉, 인간의 수명, 인간의 용모, 인간의 행복, 인간의 명성, 인간의 권세입니다.”(A5.31)라는 가르침이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수명, 용모, 행복, 명성, 권세 이 다섯 가지를 갖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보시는 줄을 이었다. 각자 쇼핑백이나 보자기 안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보시물이 담겨 있다. 봉투를 준비한 사람도 있다. 자기 차례가 돌아 오면 발우 위에 보시물을 올려 놓고 테라와다식 절을 한다. 앉은 그 자리에서 허리를 굽혀 머리가 바닥에 닿게 하는 것이다.
아홉 명의 수계동기
빤냐와로 스님과는 인연이 있다. 그것은 수계자로서의 인연이다. 빤냐와로 스님을 계사로 하여 작년 2018년 11월에 수계식과 함께 빠알리 법명을 받은 것이다. 개인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엄청난 사건이다. 그것은 새로운 태어남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새로 부여 받았다는 것은 거듭 태어남을 의미한다.
모두 아홉 명이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았다. 이른바 수계동기들이다. 한날 한시에 난 사람들이다. 마치 한배에서 나온 쌍둥이 같은 존재들이다. 세 명씩 거의 오분 간격으로 태어난 것이다. 태어난 날을 보니 ‘불기 2561년(서기 2018년) 11월 17일 11시 15분 40초’라 적혀 있다. 날자 뿐만 아니라 태어난 시와 분, 심지어 초까지 적혀 있다.
아홉 명 중에서 넷 째에 해당된다. 가장 맏이가 생물학적 나이로 보아서는 가장 연장자이다. 아홉 명 중에 네 번째이니 중간에 속한다. 맏이와 막내와는 나이 차이가 많다. 거의 부모 자식뻘 된다. 그러나 모두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에서 빤냐와로 스님을 계사로 하여 한날 한시에 태어난 동기들이다.
동기는 구남매라 볼 수 있다. 삼남 육녀이다. 태어난 순으로 보면 마한띠(mahanti) 강영애, 수마띠(sumati) 박애순, 담마기리(dhammagiri) 김청자, 담마다사(dhammadāsa) 이병욱, 사띠마(satimā) 김귀영, 아상까라(asaṅkara) 김진혁, 안이띠(anīti) 안정연, 하사나(hasana) 이진숙, 산또사(santosa) 유혁준이다. 이런 인연으로 동기카톡방을 만들어 교류하고 있다.
빤냐와로 스님은
보시행사가 끝나고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이 있었다. 참고로 빤냐와로 스님은 한국스님이다. 한국법명은 ‘진용’이라 한다. 스님은 1983년 해인사로 출가했다. 진용은 한국스님으로 살 때 법명이다. 스님은 1988년 태국에서 출가했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 있는 왓람뻥 수행센터에서 ‘빤냐와로’라는 법명을 받은 것이다.
스님은 1996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태국 국가공인 삼장법사를 취득 했다. 그래서 빤냐와로 삼장법사라 한다. 스님은 2008년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대표이사를 맡아서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 설립을 주도 했다. 올해는 한국테라와다불교가 창립 된지 십년 되는 해이다.
우뻭카 십종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우뻭카(upekkha)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먼저 우뻭카와 닮은 것으로 위리야(viriya: 精進)와 칸띠(khanti: 忍耐) 둘 중에 어느 것인지 물어 보았다. 대부분 칸띠라 할 것이다. 그러나 위리야가 우뻭카와 연관 있는 것이라 했다. 이를 우뻭카 십종에 따른 것이라 했다.
우뻭카 십종은 어떤 것일까? 검색을 해 보았다. 우뻭카 십종과 관련하여 청정도론에 설명이 되어 있다. 청정도론 제4장 ‘땅의 두루채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평정하고’라는 것은 이와 같다. 여기서 ‘일어나는 대로 본다.’는 까닭에 평정인 것이다. ‘평등하게 본다. 편견에 빠지지 않고 본다.’라는 뜻이다. 정결하고 광대하고 견고한 평정을 갖추었기 때문에 세 번째 선정을 갖춘 자는 평정한 자라 불린다. 그런데 평정은 열 종류가 곧, 1) 육지적 평정, 2) 범주적 평정, 3) 각지적 평정, 4) 정진적 평정, 5) 형성적 평정, 6) 감수적 평정, 7) 통찰적 평정, 8) 유지중립적 평정, 9) 선정정 평정, 10) 청정적 평정이 있다.”(Vism.4.156)
이것이 열 가지 평정에 대한 것이다. 이 중에서 네 번째 ‘정진적 평정(viriyupekkhā: 精進捨)’이 있다. 빤냐와로 스님이 언급한 것이다. 정진적 평정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는 정진”(Vism.4.160)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앙굿따라니까야 ‘금세공사의 경’(A3.100)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는 정진
부처님은 보다 높은 마음, 즉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승은 때때로 세 가지 인상(nimitta)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씀했다. 그것은 삼매의 인상, 정근의 인상, 평정의 인상을 말한다. 그런데 어느 한쪽만 닦는다면 인상이 깨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보다 높은 마음을 닦는 수행승이 오로지 삼매의 인상에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그의 마음은 나태로 이끌어질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보다 높은 마음을 닦는 수행승이 오로지 정근의 인상에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이끌어질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보다 높은 마음을 닦는 수행승이 오로지 평정의 인상에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그의 마음은 번뇌를 부술 수 있도록 올바로 집중되지 못할 수 있다.”(A3.100B)
부처님은 삼매와 정근과 평정을 골고루 닦아야 한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경에서는 “때때로 삼매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하고, 때때로 정근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하고, 때때로 평정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한다.” (A3.100B)라고 말씀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금세공 비유를 들었다. 화덕의 금광에 대하여 오로지 바람만 불어주면 금광은 작열하고 말 것이고, 오로지 물만 주면 식어 버리고 말 것이고, 화덕을 오로지 관찰만 한다면 올바로 정련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삼매와 정진과 평정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게 닦았을 때 “그래서 그의 의식이 내적으로 안정되고 완전히 고요해서 통일되고 집중되는 때가 온다. 그의 삼매는 평화롭고 탁월하고 고요하고 통일성에 도달해서 결코 노력을 기울여 겨우 유지하는 제어가 아니다. 그가 곧바로 알고 실현해야 할 것을 곧바로 알고 실현하기 위해서 마음을 기울일 때는 조건이 충족될 때마다 능히 그것을 곧바로 알고 실천한다.”(A3.100B)라고 말씀 했다. 이 문장은 이어지는 신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네 번째 선정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는 것에 대하여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는 정진”(Vism.4.160)이라 한 것이다.
따뜨라맛자따따(tatra-majjhattatā), 유지중립성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우뻭카에 대하여 영어로는 ‘equanimity’라 하고 빠알리어로는 ‘따뜨라맛자따따(tatra-majjhattatā)’라 불린다. 청정도론에서는 따뜨라맛자따따에 대하여 “유지중립성이라는 것은 구체적 사실에서의 유지평성이다.”(Vism.14.153)라고 정의해 놓았다. 여기서 구체적 사실들이란 마음과 마음의 작용(마음부수)을 말하므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의 평형성을 유지시키는 것이 유지중립성이라 한다. 그래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의 평형성을 유지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을 기능으로 삼거나 편파를 차단하는 것을 기능으로 삼고, 중립적인 상태를 현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하여 불편부당한 상태로, 마치 평등하게 동작하는 준마를 불편부당하게 다루는 마부와 같다고 볼 수 있다.”(Vism.14.153)
‘따뜨라맛자따따(tatra-majjhattatā)’라 불리우는 우뻭카는 중립적인 상태를 현상으로 삼는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말을 다루는 마부에 비유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 공정한 상태를 말한다. 마치 잘 달리는 말을 마부가 잘 달리도록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뻭카는 열 가지로 설명되는데 이는 청정도론 Vism.4.156-166에서 설명되어 있다.
열 가지 평등중에서 1) 육지적 평정, 2) 범주적 평정, 3) 각지적 평정, 9) 선정정 평정, 10) 청정적 평정은 모두 8) 유지중립적 평정과 의미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 한다. 다른 것은 4) 정진적 평정, 5) 형성적 평정, 6) 감수적 평정, 7) 통찰적 평정 이렇게 네 가지이다. 그래서 따뜨라맛자따따(tatra-majjhattatā)라 불리우는 우뻭카는 크게 유지중립적 평정, 정진적 평정, 형성적 평정, 감수적 평정, 통찰적 평정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에서 빤냐와로 스님이 언급한 것은 정진적 평정이다.
왜 다투는가?
정진적 평정에 대하여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는 정진”(Vism.4.160)라 했고, 이는 금세공사의 경에서는 “때때로 삼매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하고, 때때로 정근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하고, 때때로 평정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한다.” (A3.100B)라 했다. 이렇게 했을 때의 상태에 “내적으로 안정되고 완전히 고요해서 통일 되고 집중 되는 때”(A3.100B)라 했다.
빤냐와로 스님의 한마디로 열 가지 우뻭카에 대하여 검색을 하고 관련 서적을 찾아 보았다. 일반적으로 평정, 평온, 평등 등으로 번역되는 우뻭카는 매우 다양한 뜻이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빤냐와로 스님은 위리야 우뻭카(정진적 평정; 精進捨)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이는 치우치지 않은 견해일 것이다. 그래서 견해가 다를 때 “그럴수도 있겠지”라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을 확실 하게 아는 자는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견해가 다르더라도 싸우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싸우는가?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여 확인하려고 싸운다는 것이다.
사실을 다 아는 자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와 같다. 지극히 평정한 상태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휩쓸리지 않는다. 위리야 우뻭카에서 말하는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는 정진”을 말한다.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대상에 마음이 요동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빤냐와로 스님은 세 가지를 당부했다.
소문에 현혹되지 말라
첫 번째, 소문에 현혹되지 말라고 했다. 이는 ‘카더라’라는 말에 속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어떤 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에 대한 계행에 대하여 누군가 말 했을 때 확인도 해 보지 않고 곧이 곧대로 믿었을 때 잘 못 판단할 수 있다. 이럴 때 마음의 평정이 유지 되어야 한다. 마음의 평정이 깨지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확인 하기 전에는 소문에 현혹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깔라마의 경에서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비밀을 얘기 하지 말라
두 번째, 비밀을 얘기 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의 견해를 말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견해는 바뀌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 한 견해는 바뀌게 되어 있다. 비밀이 많은 사람이 위험 하듯이, 마찬가지로 견해가 많은 사람도 매우 위험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견해는 사견(邪見)이기 쉽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사념처를 예로 들었다.
누군가 “거기에는 어떤 수행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사념처 수행을 염두에 둔 것이다. 수행방법도 호흡을 중시하는지 복부의 움직을 중시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만약 만족할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을 때 전화를 끊어 버릴 것이다. 이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체험을 하여 완성되고 난 다음에는 모두 똑같다고 했다. 어느 수행법으로든지 완성하고 나면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것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사념처 수행이 최고라거나, 그 중에서도 심념처 수행이 최고라고 여기는 것은 견해라 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말했기 때문이다.
견해와 같은 비밀을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체험한 것을 말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그에게는 어떤 비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 아라한에 대하여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기에”(Vism.7.40라 했다. 견해가 청정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체험을 하여 완성 되었을 때 어느 견해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항상 자비심을 가져라
세 번째, 항상 자비심을 가지라고 했다. 자비심과 평정심은 어떤 관계일까? 대승불교에 대지도론이 있다. 대지도론에서는 우뻭카에 대하여 ‘대자비(大慈悲)’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우뻭카에는 자애와 연민의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청정도론에서 자애, 연민, 기쁨을 계발한 다음에 우뻭카를 계발하는 것은 순서가 아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자애와 연민, 기뻐함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바탕은 우뻭카라 했다. 이는 선정의 요소에 이미 우뻭카가 있기 때문이다.
선정은 기본적으로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러한 고요상태에서 지혜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법구경에는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흔히 말하길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한다. 지혜 있는 곳에 자비가 있고, 자비 있는 곳에 지혜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와 자비는 평정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사무량심에서 자애와 연민, 기쁨만을 닦는다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애가 깨질 때는 ‘애욕’으로 변질 될 때라 했다. 연민의 경우에는 ‘근심’을 일으킬 때이다. 기쁨의 경우에는 ‘세속적인 희열로 왁자지껄’할 때이다. 그러나 대자비심은 깨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뻭카가 바탕이 되었을 때이다.
사무량심에서 평정을 닦았을 때 평정은 깨지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평온함은 언제든지 조건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평온함이 평정함으로 되었을 때 바뀌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아마도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 行舍智)’상태일 것이다.
상카루뻭카냐나를 형성적 평정에 의한 앎이라 한다. 또 다른 말로는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라고도 한다. 이 단계의 지혜는 성자가 되기 전 단계를 말한다. 청정도론에서는 “형성들에 대하여 마치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되고 ‘나’와 ‘나의 것’을 붙잡지 않는다.”(Vism. 21.61)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단계의 지혜가 되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평정심에서 나오는 자비는 조건에 따라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자비라 볼 수 있다.
함께 먹으면 식구
법문이 끝났다. 다음은 점심시간이다. 보통 11시부터 12시 사이에 먹는다. 정오를 넘기지 않는 것이다. 출가자는 오후에 먹지 않기 때문이다. 남쪽 멀리서 스님이 와서일까 평소보다 많은 법우님들이 찾아 왔다. 올 때는 빈손이 아니다.
사원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는 것은 실례이다. 불자들의 보시로 운영되는 사원에서 얻어 먹으로 갈수는 없는 것이다. 탁발법회이기 때문에 각자 준비해 온 반찬을 꺼내 놓았다. 펼쳐 놓으니 상으로 가득하다. 갖가지 종류의 반찬을 나누어 먹었다. 함께 먹으면 식구가 되는 것이다.
“수행해서 뭐 할겁니까?”
점심식사가 끝난 후에 빤냐와로 스님 친견시간이 있었다. 일종의 수행점검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희망자에 한해서 스님에게 보고하고 답을 듣는 것이다. 모두 네 명이 질문했다. 그 중에 한명이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안일어나고 있습니다.”라며 호소했다. 이에 스님은 “수행해서 뭐 할겁니까?”라며 역질문했다.
스님은 간절할 때 수행하는 것이라 했다. 마치 간절할 때 기도하는 것과 같다. 막다른 골목에 내 몰린 자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유명기도처는 주로 절벽이나 해안가나 동굴 등 막다른 곳에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절함이 없이 마음의 평온함이나 얻자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럴거라면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빤냐와로 스님은 분노의 마음으로 수행하지 말라고 했다. 수행이라는 것이 본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에도 잘 안된다고 하여 성냄으로 수행했을 때 진척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예비수행법 네 가지를 먼저 닦으라고 했다.
예비수행법 네 가지
예비수행법 네 가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날 상담에서 스님은 말하지 않았지만 미얀마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는 좌선에 임하기 전에 먼저 네 가지 예비수행을 해야 한다. 찬먜사야도는 이를 ‘네 가지 보호’라고도 말했다.
찬먜사야도의 법문집 ‘위빳사나 수행 28일’(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읽고 있다.법문집에는 네 가지 예비수행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1) 부처님 덕성에 대한 숙고, 2) 자애의 계발, 3) 몸의 혐오에 대한 숙고, 4) 죽음에 대한 숙고를 말한다.
첫째, 부처님 덕성에 대한 숙고는 불수념(佛隨念)을 말한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성을 떠 올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찬먜 사야도는 “부처님, 위빳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통해 모든 정신적 오염원과 장애를 타파하시어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성취하셨고, 그럼으로써 일체중생의 존경과 흠모를 받을 가치가 있으신 분”이라고 숙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기쁨을 느껴 열심히 수행할 수 있도록 고무된다고 한다.
둘째, 자애의 계발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특정인, 또는 특별한 집단을 향해 자애를 계발하는 것’과 또 하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향해 자애를 계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라고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라 한다.
셋째, 몸의 혐오에 대한 숙고는 몸의 혐오성에 대한 숙고를 말한다. 한자어로는 부정관이라 한다. 마음 속으로 “몸은 창자, 피, 가래… 등과 같은 불결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숙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숙고하면 몸에 대한 애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몸에 대한 애착은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애착이 적을수록 마음이 고결해지고 위빳사나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는 것이다.
넷째, 죽음에 대한 숙고이다. 이를 사수념(死隨念)이라 한다. 그렇다면 수행에 임하기 전에 왜 죽음을 떠 올려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내가 지금은 비록 살아 있지만 지금 당장, 또는 내일이나 모레 등 어느 순간이라도 죽을 수 있다.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숙고 해야 된다는 것이다. 업대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 한다. 과거에 지은 업 때문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한시가 급한 것이다. 게으름 피울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숙고는 우리로 하여금 지금 보다 더 노력을 기울이게 해 준다는 것이다.
붓다데이날에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이 모두 끝났다. 참석자들은 기쁜 마음이 된 것 같다. 한마디 한마디가 놓칠 수 없는 심오한 말이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수계식 때 뵙고 올해 들어 처음이다. 저 먼 남쪽 울산에서 일부로 올라 온 것이다. 법회가 끝나고 스님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 갔다. 다음 붓다데이날 올라 올 것이라 한다. 날자를 보니 5월 19일이다.
2019-03-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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