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부정관수행승의 자결과 파괴업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9. 3. 25. 13:49

 

부정관수행승의 자결과 파괴업에 대하여

 

 

왜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

 

업이 있으면 윤회가 있기 마련이다. 업과 윤회는 항상 함께 간다. 그래서일까 업과 윤회의 법칙라는 책이 있다. 파옥 사야도가 법문한 것을 모아 엮은 것이다. 책을 보면 오프닝 테마라 볼 수 있는 하나의 경전이 소개 되어 있다. 그것은 차꼬경이다. 번역자 정명스님이 차꼬경이라 번역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가죽끈에 묶인 경’(S22.99)’이라 번역했다.

 

차꼬라는 말은 말이나 개 등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하여 채우는 나무조각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따라 감겨 따라 돌 듯,..” (S22.99)라고 말씀했다. 윤회하는 인간이 마치 차꼬에 묶인, 가죽 끈에 묶인 개와 같은 존재와 같다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가죽끈은 견해와 같고, 기둥은 자신의 몸과 같다. 가죽끈에 묶인 개가 기둥을 따라 맴도는 것처럼 견해와 갈애로 자신의 몸을 묶은 범부는 자신의 몸을 따라 윤회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오온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함을 말한다. 지은 행위()로 인하여 세세생생 윤회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운명에 대한 것이다.

 

아비담마 강좌가 3 23일 담마와나 선원에서 열렸다. 이번 강좌는 업에 대한 것이다. 업의 기능에 따라 생산업, 돕는 업, 방해업, 파괴업이 있고, 또 과보를 생산 하는 순서에 따라 무거운 업,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 습관적인 업, 이미 지은 업이 있다. 이와 같은 업은 재생연결식과 관련이 있다.

 

흔히 업생(業生)이라 말한다.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나는 과거 업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 받았으나 정신까지 물려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부모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의 성향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부터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유신견(有身見)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디서 왔을까? 이런 의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대개 조상을 찾는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이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라는 식으로 추적해 가는 것이다. 어디까지 올라 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놓고 이 분은 나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식으로 헤아려 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어머니식으로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빠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 버릴 것이다.”(S15.1)라고 말했다.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의 원인이 된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 식으로 추적해 가다 보면 창조주가 제일 원인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일 원인으로 시작이 있게 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창조한 세상은 종말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시작을 알 수 없으므로 당연히 끝도 알 수 없다.

 

유일신교는 시작과 종말이 언급되어 있지만, 불교에서는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다. 유일신교에서는 생물학적 탄생과 관련된 것이지만, 불교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관련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창조주와 같은 제일 원인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 식으로 생물학적 무한소급하지 않는다. 다만 윤회의 원인은 알 수 있다. 그것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은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15.1)라고 말씀 했다. 윤회의 원인이 무명갈애임을 알 수 있다.

 

무명과 갈애는 윤회의 원인이자 윤회의 동력이다. 반대로 무명과 갈애가 없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명과 갈애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는 차꼬경에서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따라 감겨 따라 돌 듯,..”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죽끈은 견해이고, 기둥은 오온이라 했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를 말한다. 유신견이다. 유신견(有身見)을 가지고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신업과 구업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는 업을 짓는다. 업은 선업이거나 불선업이다. 대부분 불선업을 짓는다. 그 결과 악처에 나기 쉽다. 그래서 부처님은 손톱끝 흙먼지와 큰 대지를 비교하면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적고 인간과는 다르게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라고 말씀했다. 대부분 악처에 태어난다. 계율을 지지키 않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계율을 지킨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지혜는 계행에 의해서 씻겨지고, 계행은 지혜에 의해서 씻겨집니다.”라고 말씀했다. 현자는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올지 알고 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계율은 몸으로 지은 행위와 말로 지은 행위에 대한 것을 대상으로 한다. 마음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것은 계율에 적용되지 않는다. 오계의 경우 살, , , , 주가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몸으로 말로 지은 악업은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파괴업이란 무엇일까?

 

부처님도 어찌 할 수 없는

 

아비담마에 따르면 기능적으로 분류된 네 가지 업과 순서에 따라 받는 네 가지 업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업은 부처님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개인이 지은 업에 대하여 부처님도 구제 해 줄 수 없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업의 작용에 대하여 파옥사야도의 책 업과 윤회의 법칙에서는 다양한 인연담이 소개 되어 있다. 그 중에 파괴업에 대한 것이 있다.

 

파괴업은 해롭거나 유익한 업이 보다 약한 업을 차단한다. 예를 들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한 유익한 업이 차단되어 수명이 다하기 전에 죽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것이 해로운 업이라면 축생, 아귀 혹은 지옥에 태어날 수 있다. 그것이 유익한 업이라면 욕계천상이나 색계와 무색계와 같은 범천에 태어날 것이다.

 

과도한 쾌락으로 마음이 황폐해진 천신이 아름다운 천신을 질투한다면 해로운 업이 되어 천신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자신의 유익한 업을 파괴하는 업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 결과 악처에 태어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아자타삿뚜는 예류과에 들 수 있는 충분한 바라밀이 있었지만 무거운 업이 작용하여 그가 닦은 바라밀을 차단하여 파괴적으로 작용했다. 이 밖에도 데바닷따, 바히야 다루찌리야, 앙굴리말라, 사냥꾼 순나카와지카, 마하목갈라나 존자, 짝꾸빨라 존자, 사마와띠 왕비, 500명의 비구 등 다양한 예가 있다. 이러한 업은 부처님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부정관 수행을 하다가

 

파괴업 이야기 중에 오백명의 비구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 당시에 오백명의 비구가 부정관 수행을 하다가 서로가 서로를 찔러 죽이고 자결한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의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베쌀리의 경’(S54.9)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이 베쌀리의 마하 숲에 있는 꾸따가라 강당에 있을 때의 일이다. 부처님은수행승들에게 부정관에 대한 법문을 하고 부정관 수행을 찬탄했다. 그런데 부정관 수행의 문제가 드러났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들은 이 몸을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혐오스러워 하여 자결하려 했다. 하루에 열 명의 수행승이 자결하고 하루에 스무 명의 수행승이 자결하고 하루에 서른 명의 수행승이 자결했다.” (S54.9)

 

 

부정관 수행을 했다고 하여 모두 자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에서 수행승들은 자결할만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그들의 근본적인 불선한 업이 설익은 것이 익어 다양한 의도로 이 보름 동안 자의로나 타의로 목숨이 끊어지는 경우가 발생했다.”(Srp.II.266)라고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은 전생에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은 죽을 때 까지 오로지 금수의 학살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 과보로 부정관 수행하다 자결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파옥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에서는 생명을 사냥한 업이 유익한 인간의 업을 차단한 것이다.’(397p)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정관에서 호흡관으로

 

부처님은 부정관을 닦은 수행승들이 자결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 하는 문장이 경에 실려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을 불러 놓고 수행승들이여, 나는 보름 동안 홀로 앉아 고요히 지내며 명상하고자 한다. 한 사람이 발우에 음식을 운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곳에 접근해서는 안된다.”(S54.9)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곳에서 홀로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파옥사야도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붓다는 또한 이러한 과보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라한 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며, 다른 성인들은 행복한 곳에 태어나고, 범부들은 욕망(chanda- rāga)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삶에 취착하며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보았다. 이렇게 죽으면 그들은 악처에 태어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부정관을 닦도록 한다면 그들은 생에 대한 취착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유익한 업들 때문에 그들은 천신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바로 붓다는 그들을 돕는 유일한 방법은 이 방법 밖에 없음을 알았으며, 비구로서 계를 받은 것이 여전히 유익한 업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붓다는 그들에게 부정관이라는 명상법을 가르쳐 주면서 이 수행법의 여러가지 이익에 대하여 말씀하였다.”(업과 윤회의 법칙, 397p)

 

 



아무리 일체지자라도 개인이 지은 업장을 소멸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업을 소멸하게 할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M135)라고 말씀한 것이다.

 

부처님은 천안통으로 수행승들의 전생을 보았을 것이다. 수행승들에게 해로운 업의 과보에서 벗어 나게 해 주고자 부정관을 설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자비의 마음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수행승들은 부정관을 닦다가 자신의 몸에 혐오를 일으켜 자결하고 만 것이다. 삶에 대한 강한 지겨움이 생겨서 자결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비난 받을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부정관을 닦던 수행승들이 자결하자 부처님은 수행방법을 바꾸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을 강당에 모아 놓은 다음에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닦고 호흡새김에 대한 집중을 익히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들어,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게 한다.”(S54.9)라고 말씀했다. 이후 부처님은 부정관 대신에 호흡새김(ānāpānasati)을 권장했다고 전해진다.

 

머리만으로 업의 작용을 알 수 없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밖의 일을 겪기도 한다. 마치 누군가 방해하는 듯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반대로 생각지도 않게 누군가 도와 주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 죽음이다. 과거에 알게 모르게 지은 행위가 있다. 언젠가 조건을 만나 익었을 때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나쁘게 작용하면 방해업이 되고 좋게 작용하면 돕는 없이 된다. 파괴업은 날고 있는 화살을 떨어지게 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개인이 지은 업보는 부처님도 구제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가르침을 따르면 최악의 상황은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베쌀리 수행승들의 자결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알 수 있다. 파옥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책에서 표현 했다.

 

 

만약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공격을 받았거나 혹은 사고 등으로 죽는다면 이것은 자기가 과거에 지은 업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공격한 사람 혹은 일어난 사고라는 것은 단지 인간으로 태어나게 한 유익한 업을 차단하는 그 사람이 과거에 지은 해로운 업의 전령일 뿐이다.

 

아마도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붓다도 머리만 가지고는 업의 작용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직접 12연기를 통찰지를 가지고 알고 볼 수 있을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때까지는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업과 윤회의 법칙, 398p)

 

 

2019-03-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