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지혜가 일을 한다, 사사나 스님 인터뷰 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9. 4. 22. 12:00

 

지혜가 일을 한다, 사사나 스님 인터뷰 법문

 

 

선지식을 만나서 가르침을 듣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 축복의 경에서는 때에 따라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5)라고 했다.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5)라고 했다.

 

손으로 터치 해야

 

2019 4 21일 담마와나선원 탁벌법회에 갔다. 오전 법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이전날 4 20일 정평법회가 있었는데 21일 아침 일찍부터 후기를 쓰느라고 시간이 지나 버린 것이다. 그러나 끝무렵에는 참석할 수 있었다.

 

선원에 도착하니 11 10분이었다. 보통 오전법회는 11시에 끝나기 때문에 가는 것을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숙대역 근처에서 햄버거로 때우고 오후 12 30분부터 열리는 법회에 참석할까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가 보았다. 11 10분에 도착하니 공덕회향을 하고 있었다. 게송이 다 끝나자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담마와나 선원장 떼자사미 스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날 초청법사 사사나 스님에게 공양을 올렸다. 집에서 준비해온 멸치볶음과 치약과 치솔이다. 작은 쇼핑백에 담아 올렸다. 작은 선반을 사용했다. 두 손으로 올리자 사사나 스님이 손으로 터치 했다. 손으로 터치 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는 듯 하다.

 

밥상공양을 하고

 

즐거운 점심시간이다. 각자 준비해 온 반찬을 나누어 먹는 시간이다. 밥과 국만 선원에서 한다. 자원봉사들이 하는 것이다. 12시 이전에는 식사를 끝내야 한다. 각자 가져온 반찬을 한데 모아 상을 만들었다. 이날은 특별히 두 분 스님 상을 보았다. 떼자사미 스님과 사사나 스님 상이다.

 



 

봉사자들이 상 주변에 모였다. 상 한쪽을 잡고 들어서 놓았다. 스님들도 함께 들었다. 스님들의 터치가 있어야 공양이 되는 것이다. 스님들은 빠알리와 한국어로 공덕 게송을 읊었다. 봉사자들도 따라했다. 이 보시공덕으로 닙바나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축원문이다.

 

식사가 끝난 후에 설거지를

 

멀리 순천에서 기차를 타고 온 법우님과 함께 식사했다. 낙안읍성 부근에서 과수원을 하는 법우님이다. 한상에 남자 법우님이 모두 네 명 앉았다. 본래 식사할 때는 묵언이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 설거지를 했다. 매번 여자 법우님들이 밥과 음식을 준비하고 설거지 한다. 이럴 때 남자 법우님들이 설거지라도 거들어 준다면 보기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함께 하는 것이다. 절에서 가장 꼴불견이 대접 받으려 하는 사람이라 한다. 사회에서 지위를 절에 까지 연장하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차려준 밥을 먹는다. 치우는 것은 다른 사람 몫이다. 이런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하기

 

요즘은 맞벌이 시대이다. 집에 먼저 오는 사람이 밥하는 것이다. 늦게 오는 사람은 설거지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런 태도는 특히 공동체에서 필요로 된다. 이는 승가에서도 오랜 전통이다. 율장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마련하고 남은 음식을 넣을 통을 마련합니다. 마을에서 맨 나중에 돌아오는 자는 남은 음식이 있으면, 그가 원한다면 먹고,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풀이 없는 곳에 던지거나 벌레 없는 물에 가라앉게 합니다.”(Vin.II.352)

 

 

율장대품 제10장 꼬삼비의 다발에 나오는 장면이다. 탁발갔다 먼저 오는 자가 자리를 펴고, 나중에 도착한 자는 청소를 하는 것이다. 공동체에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나이가 많다고 하여 지위가 높다고 하여 대접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동체에서는 솔선수범이 요청된다.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치우기식이다. 쓰레기가 있을 때 먼저 보는 사람이 치우는 것이다.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승가가 화합하는 것에 대하여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화합하고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하며 지내고 있습니다.”(Vin.II.351)라고 말했다.

 

인터뷰법회를 했는데

 

오후 법회가 시작되었다. 12 30분부터 2시까지이다. 사사나 스님이 법상에 앉았다. 오후 법회는 인터뷰법회라 했다. 각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원칙없이 질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마음이 일하는 것으로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수행과 관련한 질문을 해달라는 말과 같다.

 

사사나 스님은 질문에 앞서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스님은 경전이나 주석을 많이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로 수행위주로 살았음을 말한다. 미얀마에서 스승과의 인터뷰를 통해 담마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행을 강조한다. 특히 사띠를 강조한다. 닦는 힘이 좋아지면 담마가 드러난다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하여 담마가 날 좀 봐주세요라고 말하듯이 발현된다고 했다.

 

사사나 스님은 사띠와 관련하여 아는 마음과 지켜보는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 전에는 연습이라 했다. 사띠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는 마음과 지켜 보는 마음, 그리고 지혜를 보기 전에는 단지 연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애기사띠라는 말을 썼다. 초보적 사띠단계라는 뜻이다.

 

스님은 2000 11월에 입문했다고 한다. 담마와나선원 밴드에 올려져 있는 초청법사 약력을 보니 스님은 미얀마 쉐우민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쉐우민센터 선원장인 아신 떼자니아 사야도의 지도를 받은 것이다. 2001년에는 쉐우민의 초대원장인 우 꼬살라 사야도로부터 빅쿠계를 받았다. 이후 지금까지 수행자로서 삶을 살고 있다. 국내에서는 2006년 이후 보리수선원, 호두마을, 마하보디선원 등에서 수행지도를 했다.

 

지혜가 일을 하는 것

 

어느 질문자가 물어 보았다. 스님은 언제 법에 대한 확신이 생겼는지에 대한 것이다. 일종의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입문한지 9년 내지 10년 정도 되었을 때라고 말했다. 그때 반조를 해보니 차이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깨달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님은 죽음 때문에 수행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수행하면서 부처님의 지혜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다고 했다. 숨 떨어질 때까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사띠와 관련하여 알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택법각지를 말했다.

 

스님은 택법각지를 설명하면서 지혜가 일을 하는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하여 가만 있으면 지혜가 와서 이야기를 해줍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예로서 하나의 일화를 말했다.

 

어느 빅쿠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여인을 안으려하는 했다. 그때 사띠가 떼어 놓았다고 했다. 이는 지혜로운 행위에 해당된다.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스님 앞에 무당처럼, 지혜 앞에서 번뇌가 맥을 못춘다고 했다.

 

택법(Dhammavicaya)에 대하여

 

스님은 담마윗짜야(Dhammavicaya)를 들어 지혜를 설명했다. 담마윗짜야, 즉 택법이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해제에서 새김이 안정될 때에 대상의 모습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아울러 명상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착하고 건전한 상태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을 택법각지라 한다.”라고 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택법각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착하고 건전한 것과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있고, 비난 받아야 할 것과 비난 받을 수 없는 것이 있고 열등한 것과 수승한 것이 있고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의 대조가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자주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생겨나게 하거나 이미 생겨난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증가시키고 확대시키는 자양분이다.”(S46.2)

 

 

택법각지에 대하여 교학적으로 본 것이다. 택법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법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선법인지 불선법인지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담마윗짜야라는 말에서 ‘vicaya’‘investigation’라는 뜻이 있음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vicaya’에 대하여 탐구또는 간택이라 한다.

 

택법각지에서 언급된 선법과 불선법에 대하여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의 대조가 있다고 했다. 이것을 구별하려면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택법각지는 염각지 다음에 이어지는 고리이다. 사띠가 충분히 된 상태에서는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어두운 것은 어두운 결과를 낳고 밝은 것은 밝은 결과를 낳는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버리고 없애는 삶의 경’(M8)에서는 44가지 쌍이 설명되어 있다. 첫번째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잔인하더라도 우리는 잔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M8.13)라고 되어 있다. 음행에 대한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순결을 지키지 않더라도 우리는 순결을 지킬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은 모두 44가지이다. 수행하다 보면 이 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법인지 불선법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사사나 스님은 지혜가 구별하는 것이라 했다. 사띠를 유지하고 있으면 지혜가 받쳐 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를 택법각지라 했다.

 

주석에 따르면 택법각지는 통찰지(pañña)와 동일한 것이라 했다. 그렇다고 택법각지에서 무상, , 무아의 특성을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선법인지 불선법인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택법각지는 무상, , 무아라는 삼특상을 꿰뚫어 아는 것이 아니라 유익하거나 해로운 심리현상들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말한다.

 




화날 때 사띠하기에 대하여

 

두번째 질문자는 화에 대하여 물었다. 아무리 사띠해도 화가 잘 가라 앉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이런 질문 많이 받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힘이 약해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에 따르면 사띠라 하지만 사띠가 아닌 경우도 많다고 했다. 이런 사띠에 대하여 연습용사띠라거나 애기사띠라 했다. 초보적 사띠를 말한다. 제대로 볼려면 지혜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럴 경우 보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를 보지 말고 대상을 보라고 했다. 그것은 마음을 말한다. 자연의 이치라고도 했다. 대상을 보는 순간 딱 꺼져 버린다고 했다.

 

스님은 성냄에 대하여 파멸의 특성이 있다고 했다. 또 전염된다고 했다. 그래서 사띠가 없으면 너죽고 나죽자가 되는 것이라 했다. 지혜가 있으면 인욕하지만 지혜가 없을 때는 상대를 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앙굿따라니까야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A5.161)이 생각났다. 경을 보면 원한에 대하여 다섯 가지 제거 방법이 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에게 이미 생겨난 원한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한 제거수단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평정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A5.161)

 

 

원한을 제거함에 있어서 네 번째 항은 사띠에 대한 것이다. 원한 맺힌 자를 사띠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떠 올리지 않는 것이다. 성내는 자가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A5.161)라고 했다.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가 있을 때는 인내나 인욕이 가능하지만 지혜 없는 자는 휩쓸려 버릴 수 있음을 말한다.

 

마음 보는 수행에 대하여

 

화내는 이에게 화내지 말라고 했다. 화가 났을 때는 화나는 그 마음을 보라고 했다. 지혜롭게 보며 그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그 마음을 대상으로 보라고 했다. 이처럼 마음 보는 것에 대하여 아는 마음, 지켜 보는 마음이 있는데 뒤에는 지혜가 있다고 한다. 그런 지혜마져도 벗어 나야 한다고 했다.

 

사사나 스님은 사띠에 기반하여 마음 보는 이야기를 했다. 이는 아마도 쉐우민의 수행방법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얼굴을 만졌을 때 따뜻하다라고 말했을 때 이에 대하여 빤냣띠라 했다. 개념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진짜 아는 마음은 웨다나(느낌)에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빤딧짜 스님이 지은 ‘11일간의 특별한 수업에서 마음 보는 수행이 떠 올랐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토대,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하는 것을 아는 순간 생각이 없어지면서 순간적으로 텅 비어 있는 자리 같은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마음을 가만히 대어 놓고 있으면 마음토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쉽지는 않고 초보자는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수행을 얼마만큼 하여 집중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한 마음을 보고 있는데 그 마음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면 사라져 없는 그 자리에 관찰하는 마음을 놓고 가만히 있어 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어떤 생각이 하나 일어납니다. 그것을 아는 순간 즉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어떤 구멍에서 머리가 쏙 나왔다가 도로 쏙 들어가는 그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토대를 느끼는 것입니다.”(11일간의 특별한 수업, 389-390p)

 

 

빤딧짜 스님은 마음 보는 수행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는 마음을 지켜 보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볼 때 마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두 사라지고 없을 때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빤딧짜 스님은 우리가 마음을 보고 있는데 마음이 없어졌고 생각하는 마음도 멈춰 버렸습니다. 멈춰 버린 자리를 오로지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391p)라고 말했다.

 

마음 보는 것에 대하여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 마음을 보는 것이라 했다. 사사나 스님도 이와 유사하게 말을 했다. 그런데 교학적 설명은 거의 없다. 오로지 체험한 것만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질문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법회 시작 전에 마음이 일하는 것으로질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행관련 인터뷰인 것이다.

 

스님도 공덕 쌓는다

 

스님은 이렇게 멀리 와서 법문을 하고 인터뷰에 응해 주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스님들도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출가 수행자라 하여 세상과 단절하며 심산유곡에서 나홀로 오로지 수행만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렇게 스님들도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법보시 공덕에 해당된다.

 

수행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세 가지에 대한 것이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이다. 출가자도 보시공덕을 쌓아야 한다. 아는 만큼 알려 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사나 스님은 어떻게 나라는 사람이 법문을 할 수 있을까?”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수행자가 되기 전에는 불교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었는데 이렇게 법문을 하고 수행지도를 하는 것은 법보시라는 공덕쌓기에 해당된다고 했다.

 

사사나 스님은 매우 유쾌하다. 앉아서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안은해진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또 스님은 법문을 재미 있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때로 웃음바다가 되기도 한다. 빅쿠라 하여 늘 근엄한 모습으로 건조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다.

 



2019-04-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