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서로 씻어 주는 지혜와 계행

담마다사 이병욱 2019. 4. 2. 12:17

 

서로 씻어 주는 지혜와 계행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천수경 참회진언이다. 대승보살계를 받을 때 연비와 함께 이 진언을 외운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동안 막 살아 온 것에 대한 참회의 눈물일 것이다. 그것은 십악참회로 나타난다.

 

천수경 십악참회에 대한 원형이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 신체적인 것 세 가지, 언어적인 것 네 가지, 정신적인 것 세 가지에 대한 것이다. , , 의 삼업에 대한 것이다. 천수경에서는 참회게라 하여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신탐진치 종신구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 (我昔所造諸惡業 皆有無始貪瞋痴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라는 한문게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해석하면 “지난 세월 제가 지은 모든 악업은 옛날부터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모든 죄업 참회합니다.”라는 뜻이다.

 

담마와나 선원에서 일요일 아비담마 강좌를 들었다. 이번 강좌는 십악행에 대한 것이다. 이를 해로운 업이라 하는데 욕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십악행으로 대표 되는 해로운 업을 지으면 지옥과 같은 악처에 태어남을 말한다. 이와 같은 해로운 업에는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짓는 열 가지에 대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경장과 논장에서는 해로운 업의 길(akusala kamma patha)’이라 한다.

 

확정된 업의 길(niyata kamma patha)

 

십악행은 해로운 업의 길이다. 그 길로 죽 따라 가다 보면 악처에 가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살해 했다면 그 과보를 피해 갈 수 없다. 이와 같은 중업(重業)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확정된 업의 길(niyata kamma patha)’이라 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자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설령 완전범죄를 하여 걸리지 않은 자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거두어 낼 수 없다. 이를 경에서는 산그림자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산그림자의 비유는 원초적 불안에 대한 것이다. 경에 따르면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고 했다. 이는 범죄심리에 있어서 원초적 불안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에 그림자가 저녁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라고 했다.

 

죄 짓고 살 수 없다. 마음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 것은 석양에 지는 산그림자처럼 마음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져 있다. 임종순간에 마음의 그림자에 압도 되었을 때 악처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십악행 중에서도 몸으로 짓는 것이 가장 무겁기 때문에 마치 사형선고 받은 것처럼 확정된 업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이다.

 

의도가 실려야 살생이다

 

재생연결의 순간에 나타나는 확정된 업의 길에 대하여 더 알아 보았다. 파옥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의 법칙에서는 십악행에 대하여 이십여페이지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다른 생명을 왜 죽이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축업자와 어부는 먹고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전쟁이 났을 때 군인은 적군을 죽인다. 농부는 자신이 지은 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산짐승이나 해충을 죽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수행자도 생명을 죽일 수 있다. 모기가 괴롭힐 때 죽이는 것이다. 큰 것이건 작은 것이건 죽이는 것은 모두 살생에 해당된다.

 

살생의 과보는 모두 같지 않다. 생명체에 따라 다름을 말한다. 식물도 생명이 있기는 하지만 정신기능이 없기 때문에 잘라도 크게 죄업이 되지 않는다. 자르고 나면 다시 싹이 돋아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가한 빅쿠라면 곤충도 죽여서는 안된다. 이는 율장에서 “개미라도 의도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의 목숨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 (Vin.I.97)라고 했기 때문이다.

 

미얀마 수행센터에 가면 명상홀에 개인 모기장이 있다. 모기장을 치는 이유는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살생할 수 있다. 길을 가다가 벌레를 밟았을 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의도가 실려 있지 않다면 무죄이다. 이는 짝쿠빨라 장로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짝쿠빨라 장로가 경행을 하다 벌레를 밟아 죽였다. 이를 본 어떤 수행승들이 아라한이 살생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대들이 죽이는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 또한 살아 있는 곤충들을 보지 못했다. 그 밖에 그 수행승은 이미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으므로 의도적으로 살생한 것이 아니니까 그에게 허물이 없다.”(DhpA.I.3-35)라고 말씀했다. 의도가 실리지 않은 것은 살생에 해당되지 않는다.

 

크기에 따라 과보도 다르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살생을 한다. 도축업자나 어부, 농부는 살생하고 싶지 않아도 살생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취미로 살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낚시가 대표적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살생하는 것 보다 더 나쁜 케이스라 볼 수 있다.


근 한국에서는 살생을 조장하는 축제도 있다. 매년 겨울만 되면 강원도에서는 산천어축제라 하여 대량으로 살생이 이루어진다. 마치 국민축제처럼, 국민스포츠처럼 치루어지는 행사에 불교계는 침묵하고 있다.

 

불자들은 오계를 지니며 살고 있다. 그러나 오계를 지키기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 법회에서는 법회할 때 마다 오계를 받아 지닌다. 심지어 강독모임 할 때도 오계를 낭송한다. 그렇다면 왜 오계를 매번 받아 지닐까? 그것은 오계가 학습계율이기 때문이다.

 

마치 트레이닝 하듯이 완성되는 것이 오계이다. 그래서 오계를 외울 때 베라마니 식카빠다라 하여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라는 후렴구가 붙는데, 여기서 식카빠다(sikkhāpada)라는 말은 ‘steps of training’의 의 뜻으로 학습계율이라 한다.

 

학습계율로서 불살생계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라고 외운다. 이러한 불살생계는 오계는 물론 팔계, 십계, 그리고 십선행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불살생계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특히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살생업을 짓기도 한다.

 

물고기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모기를 죽이는 것과 코끼리를 죽이는 것의 과보는 다르다. 물고기나 모기는 의도를 가지고 한번에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나 코끼리처럼 덩치가 큰 유정물은 한번에 죽지 않는다. 죽이고자 하는 큰 의도를 내야 한다. 그리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업을 짓게 된다. 그래서 몸집을 큰 유정체를 죽이는 과보가 더 큰 것이다. 그런데 같은 인간이라도 부모나 성자를 죽이면 그 과보는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간업을 짓는 것이라 한다.

 

살생의 다섯 가지 조건

 

확정된 업의 길은 재생연결로 연결된다. 그래서 확정된 업의 길은 악처로 가기 위한 완전한 업의 길이 되기도 한다. 논장과 율장에서는 몸으로 짓는 살생에 대하여 완전한 업의 길로 가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조건을 들고 있다.

 

첫째, 존재가 필요하다.

둘째, 그것이 존재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셋째,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넷째, 공격을 해야 한다.

다섯째, 자기의 행위로 그 중생이 죽어야 한다.

 

이것이 확정된 업의 길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완전한 업의 길에 들어선다. 그런데 살생업은 누군가에게 시켜도 동일한 과보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 사주하여 죽였다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네 가지 살생이 있는데

 

신선행은 십악행의 반대말이다. 십악행에서 불살생계에서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간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은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간접적으로 죽이는 것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사주하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자신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남에게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도록 권하고” (A10.222)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은 양자의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A10.222)라고 했다.

 

자신이 직접 죽였거나 남에게 시켜서 죽였더라도 그 과보는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남에게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도록 권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데 동의하고”(A10.223) 라고 말씀 했기 때문이다. 동의하기만 해도 살생업을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살생업에는 암묵적 동의도 해당될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사건이 터졌을 때 최고 지휘자가 설령 직접적 지시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면 학살행위에 해당될 것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남에게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도록 권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데 동의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칭찬하고”(A10.224)라는 말이다.

 

자신이 직접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죽이도록 지시하는 것도 살인이고, 죽이도록 동의하는 것도 살인이고, 심지어 죽이는 것을 칭찬하는 것도 살인이다. 1980 5월 광주에 투입되어 학살에 참여한 군인은 원하지 않게 살인행위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지시를 내린 사람도 살인자이고, 학살에 동의한 사람도 살인자라는 사실이다. 학살한 자들에 대하여 공을 세웠다고 훈장을 준 자도 역시 살인자이다. 후대 학살에 대하여 당연히 여기는 자들 역시 살인자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 역시 살인자라 볼 수 있다.

 

왜 의업이 가장 비난 받는가?

 

살인을 할 때는 증오심이 있어야 한다. 전쟁을 할 때는 적개심이 있어야 한다. 증오와 적개심이 없으면 사람을 죽이기 힘들다. 이는 다름 아닌 의도(cetanā)’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체적 행위나 언어적 행위 보다도 더 비난 받는 것은 정신적 행위라 했다.

 

모든 행위는 의도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의도하고 나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위를 한다. (A6.63)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의도가 있어야 살인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음행도 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짓는 행위도 의도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따빠씬이여, 이와 같이 구분되고 이와 같이 구별되는 세 가지 행위 가운데 나는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신체적 행위이나 언어적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 행위가 가장 비난할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M56)라고 말씀했다. 의업이 가장 비난 받는 것이라 했다. 의업이 확정된 업은 아니지만 신체적행위와 언어적 행위로 표출되면 확정된 업이 된다.

 

모든 행위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로 표출된다. 이 중에서 계율과 관련된 것은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 두 가지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계율을 어긴다고 했을 때 두 가지 행위가 해당사항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매우 현실적이다. 사회법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적인 것은 규제대상도 아니고 처벌대상도 아니다. 그런데 모든 범죄행위는 정신적 행위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사견이 최악인가?

 

정신적 악행을 처벌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난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견이다. 천수경 십악참회를 보면 가장 마지막에 치암중죄금일참회가 있다. 이 말은 어리석음으로 지은 죄를 오늘 참회합니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무엇을 말할까? 초기경전에는 명백히 사견이라 되어 있다. 그래서 십악행에 대한 정형문에서 열 번째에 대한 것을 보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M41)라고 되어 있다.

 

잘못된 견해는 사견을 말한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사견은 무엇일까? 이는 그는 ‘보시도 없다. 제사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흘연히 태어나는 뭇삶도 없다.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습니다.”(M41)라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는 것이 사견인 것이다.

 

살생을 하려면 살생하려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의도는 정신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십악행에서 정신적 행위에 대한 것은 탐욕과 성냄과 사견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는 신체적 악행과 언어적 악행의 뿌리가 된다. 도축업자가 생계를 위하여 살생을 한다면 탐욕에 뿌리 박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도축하는 그 순간에는 성냄의 뿌리가 작용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탐욕과 성냄의 근본적인 뿌리는 어리석음에 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이 범죄를 저지른다. 어리석은 자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 그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사견을 가진 자들이 그렇다. 업과 업의 과보를 믿지 않는 자들은 사물을 왜곡되게 받아 들인다. 이와 같은 토대위에서 정신적으로 추론하고 판단 했을 때 어떤 일이든지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다. 그 결과 해로운 업의 길로 가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사견이야말로 정신적 악업의 뿌리라 볼 수 있다.

 

무한계율에 대하여

 

불자들은 오계를 지킨다. 수행센터에 가면 팔계를 지킨다. 사미가 되면 십계를 지킨다. 그런데 이런 계는 불교뿐만 아니라 외도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십선행을 말씀했다. 십선행을 보면 오계에서의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져 있는 것이 정신적 행위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타종교와 차별화 된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이다. 이는 청정한 삶으로 완성된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탐, , 치를 소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십선행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를 꾸살라행이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로운 삶이다.

 

지혜로운 자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계를 잘 지킨다. 계를 지키지 않으면 자기에게 손해가 되고 오랜 기간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는 업과 업의 법칙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견을 가진 자를 말한다.

 

정견을 가지고 있으면 사견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사견이 가장 무거운 업이라는 사실이다. 살인을 하여 악처에 떨어져도 업이 다하면 이전에 지은 선업이 남아 있어서 선처에 날 수 있다. 그러나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사견을 가지고 있다면 무간업 보다 더 가혹한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우주기가 끝나도 구제 받지 못한다고 했다.

 

불교의 십악행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신체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은 계율로 정해져 있지만, 정신적 행위에 대한 세 가지는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정신적 행위에 대한 세 가지, 즉 탐욕과 성냄과 사견에 대한 것은 계율로 정해져 있지 않지만 불도를 닦는 자라면 반드시 소멸시켜야 한다. 그래서 정신적 행위에 대한 세 가지에 대하여 무한계율이라 한다.

 

번뇌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것이 무한계율이다. 정신적 행위는 무한계율이고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는 유한계율이다. 한계율 보다 무한계율 지키기가 훨씬 더 어렵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뿌리는 잠재 되어 있어서 매순간 어기게 된다. 그래서 십선행 열가지 중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정신적으로 짓는 행위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서로 씻어 주는 지혜와 계행

 

지혜로운 자는 계율을 어기지 않는다. 계율을 잘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자라 볼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모든 악업이 탐진치에서 따른 것이고 그에 따라 신구의 삼업을 짓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천수경 참회게에서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신탐진치 종신구의지소생라는 표현으로 잘 나타나 있다.

 

탐진치를 소멸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다. 지혜로운 삶을 사는 자는 유한계율뿐만 아니라 무한계율도 잘 지킨다. 지혜 있는 곳에 계율이 있고, 계율 있는 곳에 지혜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바라문이여, 손이 다른 손에 씻겨지고 발이 다른 발에 씻겨지는 것과 같이, 지혜는 계행에 의해서 씻겨지고, 계행은 지혜에 의해서 씻겨집니다. 계행이 있는 곳에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계행이 있습니다. 계행과 지혜는 이 세상에서 최상이라고 불립니다.(D4.22)

 

 

2019-04-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