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날에 세 가지 행사를 갖는가? 담마와나선원 ‘붓다의 날’ 행사를 보고
설을 두 번 쇠는 것을 이중과세라 한다. 불교에도 이중과세가 생겼다.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두 번 치루는 것을 말한다. 사월초파일날 한번 치루고 일주일 후에 붓다의 날이라 하여 한번 더 치루었다. 부처님의 탄생과 성도와 열반을 한꺼번에 한날에 치룬 행사를 말한다.
붓다의 날에 대하여
붓다의 날을 전세계적으로는 베삭(Vesak)이라고 한다. 또 다른 말로 붓다푸르미나(Buddha Prumina)라고도 한다. 푸루미나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꽉찬달, 즉 보름달을 말한다. 또 붓다자얀띠(Buddha Jayanti)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탄생한 날을 뜻한다.
붓다의 날은 전세계불교인들의 축제날이다. 그러나 각불교전통에 따라 행사날자가 다르다. 동아시아의 경우 사월초파일에 행사를 하는데 부처님 탄생만을 축하하는 날이다. 부처님 성도와 부처님 열반은 별도로 치룬다. 사월초파일 행사를 치루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동아시아권이지만 대만의 경우 사월초파일이 아니다. 대만은 1999년부터 5월 두 번째 일요일에 치루도록 정부에서 정해 놓았다. 이 날은 ‘어머니의 날(Mother’s day)’이라 하여 같은 날에 행사를 치룬다.
일본의 경우 양력으로 4월 8일에 치룬다. 1873년 메이지정부 시절 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마츠리라 하여 벚꽃이 절정일 때 행사를 치루지만 한국처럼 성대한 행사는 아니다. 일본은 종파불교를 지향하기 때문에 부처님 탄생일 보다는 개산조 탄생일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 듯하다.
전세계적으로 붓다의 날 행사는 음력 사월 보름날에 치룬다. 심지어 몽골조차도 붓다의 날 행사는 사월 보름날이다. 스리랑카, 캄보디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네팔, 인디아, 싱가포르, 타일랜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 불교국가에서는 사월 보름날이 붓다의 날이다. 그래서일까 유엔에서는 1999년 사월 보름날에 열리는 베삭데이를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홀리데이(Holy day)로 공식인정한 바 있다.
부처님오신날 행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과 일주일전까지만 해도 울긋불긋 연등과 함께 불자들 최대 잔치가 열렸다. 연등축제를 하고 산사음악회를 여는 등 축제분위기였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자 텅빈 객석을 보는 것처럼 지나간 먼 일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주일 간격을 두고 붓다의 날 행사가 열린 것이다.
실내 탁발행사를 가졌는데
2019년 5월 19일 서울 청파동에 있는 담마와나선원에서 붓다의 날 행사가 열렸다. 오전 9시 반에 탁발행사를 시작으로 법문과 공양 등 법회가 열리는 날이다. 담마와나선원은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 소속의 서울선원이다.
이른 아침 선원으로 향했다. 날씨가 좋지 않았다. 간간히 비가 뿌린 것이다. 이런 날씨라면 야외 탁발행사가 불가능하다. 한국불교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테라와다불교 교단 스님들의 탁발행렬이 기대 되었는데 무산되었다. 그 대신 실내탁발 행사를 가졌다.
붓다의 날 행사가 열리는 담마와나선원은 비좁기가 그지 없다.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선원은 2층과 3층을 사용하고 있다. 2층 거실에 법당이 있고, 3층 방에는 선원장 처소와 공양공간이 있다. 실내탁발 행사는 3층에서 가졌다. 평소보다 많은 60명 가량이 왔는데 자리가 몹시 비좁아서 어깨와 어깨가 부딪칠 정도였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비좁은 계단에 공양물을 올리기 위한 줄이 형성 되었다. 모두 표정이 밝다. 즐겁고 기쁜 표정이다. 아홉 명의 스님들에게 보시하기 위하여 각자 가져 온 쇼핑백을 들고 있다. 떡이나 과자 등과 같은 먹을 것도 보인다. 이른바 사대필수품이라 하여 먹을 것, 입을 것 등 생필품을 보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스님들이 발우를 들고 서 있다. 신도들은 각자 정성껏 준비한 공양물을 발우에 넣었다. 불전함에 넣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런 장면은 한국불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테라와다불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보시 하는 그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보시하는 자도 즐겁고 보시 받는 자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다.
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보시는 생활이고 일상과도 같은 것이다. 사원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사원은 불자들의 보시에 의해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탁발에 의존하는 스님들은 신도들의 보시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먹을 것 등 생필품 위주로 보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난 1월초에 미얀마에 갔었다. 그때 보름가량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 집중수행 했었다. 그런데 선원에서는 행사가 자주 열렸다. 그 중에서도 수계식이 있었다. 수계식이 열리는 날은 보시하는 날이다. 미얀마 불자들은 먹을 것 등 생필품 위주였지만 한국불자들은 미얀마 돈을 준비했다. 미얀마에서는 보시가 일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재가자는 재보시하고 출가자는 법보시한다. 탁발행사가 끝나면 법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재보시보다 더 수승한 것이 법보시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출가와 재가는 소통한다. 부처님 당시부터 면면히 전승되어온 전통이다.
법회의식에 따라
탁발행사가 끝나고 2층 법당에 모였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스님은 모두 아홉명이다. 사회자 소개에 따르면 법랍순으로 빤냐와로, 빤냐완따, 사사나, 수마나, 알로까담미까, 빤냐왐사, 떼자사미, 떼짓사라, 로까히따 스님이다. 모두 테라와다 교단 스님들로서 붓다의 날이나 까티나행사 때 볼 수 있다.
법회는 법회의식에 따라 진행되었다. 붓다의 날 법회의식이 별도로 규정되어 있어서 법요집을 보면서 따라 하면 된다. 가장 먼저 자애경을 독송했다. 길이가 있어서 한글로 번역된 것을 독송했다. 이어서 붓다의 날 게송을 독송했다. 핵심 내용은 “이제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시고 깨달으시시고 열반에 드신 4월 보름에 이곳 담마와나선원에 함께 모여 부처님을 회상합니다.”라는 문구이다. 이 문구로 알 수 있는 것은 붓다의 날은 탄생뿐만 아니라 성도와 열반도 함께 기념하는 날이다.
꽃 공양을 하고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불상 이외 다른 것은 없다. 신중탱화도 없고 연등도 달려 있지 않다. 불전함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불교에서 초파일날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아기부처님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관정식도 없다. 불단 앞에는 꽃만 보인다.
불단은 꽃으로 장엄되어 있다. 본래 불상이나 불탑에는 촛불, 향, 꽃, 청정수가 공양물로 올라간다. 한국불교에서는 육법공양이라 하여 향, 등, 차, 과일,·꽃, 쌀이 공양물로 올라간다. 그러나 테라와다에서는 과일과 쌀이 빠진 네 가지만 올려진다. 그런데 이와 같은 네 가지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촛불공양을 하는 것은 스스로 몸을 태워 빛을 내는 것이라 한다. 빛을 내서 무명이라는 어둠을 없애기 때문에 촛불공양하는 것이다. 향을 공양하는 것은 법의 향기가 널리널리 퍼져 가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 전단향도 따가라향도 말리까향도, 그러나 참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니 참사람의 향기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간다.”(Dhp.54)라고 했다. 계의 향기는 바람과 관계 없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세상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향공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담마와나 법요집에 따르면 촛불, 향, 꽃, 청정수 공양게송이 있다. 그러나 불단에는 초도 보이지 않고 향도 보이지 않고 청정수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꽃만 보인다. 꽃 공양과 관련된 게송은 다음과 같다.
“여기 이 한아름의 꽃다발은 신선하며 향기롭고 아름답네.
향기로운 이 꽃들을 연꽃같이 성스러운,
부처님의 두 발 아래 올리옵고 합장공경 하옵니다.
부처님께 향기로운 이 꽃들을 올리오니,
이 공덕 바탕이 되어 해탈의 길로 들어서길 바랍니다.
향기롭던 이 꽃들도 때가 되면 시들듯이,
이 몸 또한 사라지고 마는 것을 되새깁니다.”
게송을 보면 꽃공양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불단을 보기 좋게 장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처님의 무상의 가르침을 알기 위함이다. 꽃은 시들기 마련인데 시들어 가는 꽃을 보면서 이 몸 역시 사라지고 마는 것을 되새긴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없이 버려진 채, 머지 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Dhp.39)라고 했다.
꽃공양의 의미를 알고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아직까지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게송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단을 장엄하는 용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처럼 심오한 무상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다.
소박한 불단이다. 불상도 사이즈가 작고 불단도 매우 심플하다. 꽃 이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불자들은 각자 꽃공양을 했다. 선원에서 준비한 장미 한송이를 올렸다. 참석한 모든 불자들은 네 명이 일개조가 되어 빠짐 없이 꽃공양을 했다.
아름다운 꽃송이를 바친다는 것은 해탈하신 부처님의 두 발 아래에 바치는 해탈의 의미가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이내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이 몸도 사라지고 마는 것을 새김으로써 꽃공양을 바치는 자가 스스로 해탈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꽃공양과 관련하여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부처님시대에 천상세계를 순회하면서 설법하던 목갈라나 존자가 천상세계에서 한 천녀를 만났다. 그녀의 전생을 물으니, 라자가하 시 동쪽의 나라까 마을에서 쎄싸밧티라는 여인으로 살았다. 그녀가 사리뿟따 존자를 만나서 기쁜 나머지 많은 꽃을 바쳤는데, 그 때문에 사후에 지금의 천상세계에 태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따타가따(tathagata)의 의미에 대하여
꽃공양이 끝나고 빤냐와로 스님 법문시간이 되었다. 스님은 따타가따(tathagata)의 의미에 대하여 설명했다. 여래라고 번역되어 있는 따타가따에 대하여 ‘진리에 이르신 분’이라고 했다. 적합한 단어가 없어서 고심한 끝에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 따타가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부처님은 부처님 자신을 지칭할 때 따타가따라 했다. 여기서 따타가따는 3인칭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나라는 일인칭을 쓰지 않고 삼인칭을 사용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삼인칭이 더 공신력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과 단체에서 말하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부처님이 나라고 하지 않고 여래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진리에 이르신 분’임을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이 따타가따라고 한 것은 우리들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서라고 한다. 진리의 맛을 보여 주기 위해서 따타가따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에 이르신 분은 어떤 분일까? 그것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아는 분을 말한다. 무엇을 아는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은 여래에 의해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아졌으며, 여래는 그 세상을 벗어났다. 세상의 발생은 여래에 의해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아졌으며, 여래는 그 세상의 발생을 끊어버렸다. 세상의 소멸은 여래에 의해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아졌으며, 여래는 그 세상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닦았다.
수행승들이여,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보여 지고 들려지고 감지되고 인식되고 파악되고 탐구되고 정신으로 고찰된 것은 모두 여래에 의해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아졌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하는 것이다.”(It. 121)
이띠붓따까 ‘세계의 이해에 대한 경’에는 여래에 대한 설명이 있다. 부처님은 여래에 대하여 깨달은 날 밤부터 열반의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한다.”(It. 121)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래에 대하여 “승리자이지 패배자가 아니며, 분명하게 보는 자재자이다.”(It. 121)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여래에 대하여 “일체의 세계를 곧바로 알고 일체의 세계에서 여실히 알아 일체의 세계에서 벗어나 일체의 세계에 의착하지 않는다.”(It. 121)라고 했다.
따타가따(tathāgata)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는 따타(tathā)와 아가따(āgata)의 합성어로서 ‘이렇게 온’의 뜻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이렇게 오신 님’이라고 번역했다. 한자어로는 이렇게 왔다고 하여 여래(如來) 라고 한다. 이와 같은 따타가따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여덟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오셨기 때문에(tathā āgato),
이렇게 가셨기 때문에(tathā gato),
이러한 특징에 도달했기 때문에(tathalakkhaṇaṃ āgato),
이러한 법에 일치하도록 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았기 때문에(tathādhamme yathāvato abhisambuddho),
이렇게 현현하기 때문에(tathadassitāya),
이와 같이 설하기 때문에(tathavāditāya),
이와 같이 행하기 때문에(tathākāritāya),
승리자이기 때문에(abibhavanaṭṭhena), 그렇게 불린다.”(Srp.II.287)
빤냐와로 스님은 이날 법문에서 네 가지만 설명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시험해 보고 나서 말하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생명이기 때문에 따타가따라고 했다.
왜 한날에 세 가지 행사를 갖는가?
테라와다불자들은 공양올릴 때 “이당 메 다낭 수키 혼뚜”라며 빠알리어로 말한다. 이 보시공덕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공양이든지 최종적으로는 “이당 메 다낭 아사왁카야 와양 혼뚜”라 하여, “저의 이와 같은 보시공덕으로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발원합니다.”라고 말한다.
불교인들의 궁극적 목적은 닙바나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닙바나에 이르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수행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보시와 지계 등 십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부처님이 탄생게에서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M123)라고 말한 것은 십바라밀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바라밀의 힘으로 부처가 된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붓다의 날이라 하여 탄생과 성도, 열반을 한꺼번에 한날에 기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탄생일 따로 있고, 성도절 따로 있고, 열반절 따로 있어서 별도로 기념을 갖는다. 이에 반하여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세 가지 사건에 대하여 한날에 기념한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자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M123)라는 게송을 들어 설명했다.
부처님의 탄생게를 보면 “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라고 했다. 마지막 탄생이라는 것은 다시는 윤회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번 생에 깨달음을 얻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모든 것이 마지막이 된다. 따라서 태어남도 마지막이고, 깨달음도 마지막이고 열반도 마지막이 되어서 세 가지가 모두 똑 같은 의미가 된다. 그래서 탄생과 성도, 열반을 함께 기념하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세 가지 사건을 거추장스럽게 따로 기념하지 않는다. 세 가지 사건을 한번에 기념하는 것은 한번 하더라도 제대로 하기 하기 위해서라고도 볼 수 있다.
“사두! 사두! 사두!”하며
빤냐와로 스님 법문이 끝났다. 법회가 끝나면 지은 공덕을 모두 회향한다. 공덕회향 게송을 보면 모두 아홉 가지이다. 먼저 불, 법, 승 삼보에 예경 올린다. 이어지는 나머지는 발원문이다. 가르침을 실천수행하여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발원하고, 보시공덕으로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발원하고, 계행공덕으로 닙바나에 이를 조건이 되길 발원 하고, 수행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은 공덕의 힘으로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 정진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회향게송이 끝나자 대중들은 “사두! 사두! 사두!”하며 마무리했다.
김밥으로 점심공양을 하고
테라와다 상가에서는 오후불식을 준수한다. 그래서 12시까지는 식사를 마쳐야 한다. 그래서 11시에 식사를 한다. 이날은 법문이 늦게 끝나서 11시 30분에 점심 공양이 시작되었다.
점심공양은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이 왔기 때문에 선원에서는 김밥을 준비했다. 누군가 떡을 보시해서 떡도 나왔다. 사람들은 밥을 함께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최상의 공양이란 무엇일까?
부처님오신날을 두 번 쇠었다. 불교전통이 다르다 보니 모든 것이 달랐다. 한국불교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부처님 계율대로 살고자 하는 모습이 달라 보였다. 그렇다고 붓다의 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는 등 평소 법회 하던 것의 연장일 뿐이다.
붓다의 날에 꽃 공양을 했다. 장미꽃 한송이를 불단에 올려놓고 삼배를 했다. 꽃공양은 꽃으로 불단을 장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꽃은 시들듯이, 이 몸도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열반할 때 사라쌍수의 꽃들이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해 부처님의 몸에 쏟아질 때에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배받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D16)
부처님은 최상의 공양에 대하여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꽃으로 불단을 장엄하고 향, 등, 청정수를 공양하는 것도 좋지만 부처님이 바라는 것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르침을 실천할 때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공양이라고 했다.
조용한 움직임을 보고
테라와다불교에서 본 붓다의 날 행사를 보았다. 가르침대로, 계율대로 살고자 하는 것을 보았다. 어느 것 하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이제 창립된지 10년 밖에 되지 않은 신생교단이지만 어쩌면 한국불교의 희망이 될지 모른다.
첨탑이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성전도 아니고 고래등 같은 커다란 가람도 아니다. 주택을 개조한 비좁고 누추한 선원이다. 신도들이 십시일반 힘을 합하여 운영하는 선원이기도 하다. 물려 받은 유산이 없어서 맨땅에서 시작한 것이다.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했기에 여법하게 할 수 있다. 작고 가난한 선원에서 조용한 움직임을 보았다.
2019-05-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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