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기본기에 충실하고자, 명칭붙이기를 권장하는 마하시전통

담마다사 이병욱 2019. 6. 9. 22:07

 

기본기에 충실하고자, 명칭붙이기를 권장하는 마하시전통

 

 

이번에는 늦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또다시 늦고 말았다. 2019 6 9일요일 담마와나 선원 가는 날이다. 오후 12 30분까지 도착하기 위하여 한시간 전에 출발했다. 그런데 전철이 신도림역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전철이 멈추었다. 안내방송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누군가 전철에 뛰어 든 것이다. 모두 내려야 했다. 가장 뒷칸에서 가장 앞칸으로 이동하여 내렸다.

 

선원에 30분 늦게 도착했다. 이미 법회가 진행 중에 있었다. 서울담마와나선원장 떼자사미 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아비담마 강좌인줄 알고 갔으나 집중수행 마지막날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사띠하기

 

사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처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띠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띠는 좌선이나 행선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띠는 명상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사띠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사띠가 끊어져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선원에서 묵언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삶의 현장에서 일상사띠도 가능한 것일까?

 

선원에서는 팔계를 지키며 살아간다. 수행 외에 따로 특별히 할 것이 없다.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전에 선원에서 제공되는 아침과 점심 두 끼를 먹고 짝수시간에는 좌선을 하고, 홀수 시간에는 행선을 하면 된다. 그 밖에 달리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선원에서는 하루 종일 사띠가 유지될 수 있다.

 

생계를 위한 삶의 현장에서는

 

선원에서는 일상사띠가 가능하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삶의 현장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일을 하면 말을 해야 하고 머리를 써야 한다. 묵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가능할 것이다. 옷을 입을 때, 대소변을 볼 때, 세수를 할 때, 설거지를 할 때 등이다. 그래서일까 대념처경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나아가고 돌아 오는 것에 대해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고, 앞을 보고 뒤를 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굽히고 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드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가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 있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춘다.”(D22)

 

 



이것이 일상사띠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상에서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심지어 대소변 보는 것까지 올바로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을 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써서 하는 것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달리기를 한다든가 운전을 하는 경우는 어떨까?

 

선원에서는 천천히 행동하라고 한다. 걷는 것도 천천히 걷는다. 선원에서 급하게 빨리 걸으면 옐로우카드 받는다. 선원에서 달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 그럴까? 행동을 천천히 해야 관찰하기 쉽기 때문이다. 달린다면 행동이 너무 빨라서 관찰하기 힘들 것이다. 운전할 때 역시 가능하지 않다. 속도가 있는 모든 것은 관찰하기 힘들다.

 

삶의 현장에서 하루 종일 사띠가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하거나 공부할 때, 달릴 때, 운전할 때는 가능하지 않다. 일할 때는 일을 하고, 공부할 때는 공부하고, 운전할 때는 오로지 운전만 해야 한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옷을 입을 때, 밥 먹을 때, 대소변을 볼 때는 가능한 것이다. 천천히 할 때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예비명상

 

마지막 시간에 좌선이 있었다. 2시부터 3시까지 한시간 동안 집중했다. 방석이 푹신하고 더구나 엉덩이용 러버쿠션까지 있어서 통증은 오지 않았다. 평좌 대신 반가부좌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왼손 위에 오른손을 얹어 놓고 두 엄지가 닿을 듯 말 듯 하게 했다.

 

떼자사미스님이 유도명상을 했다. 자애경에 대한 것이다. 선원법요집에 실려 있는 자애경을 나지막히 읽어 주었다. 그렇다면 좌선을 시작할 때 자애명상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예비명상이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좌선에 들어 가기 전에 네 가지 예비명상이 있다. 보통 불수념, 자애관, 부정관, 사수념을 한다.

 

불수념은 “부처님, 위빳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통해 모든 정신적 오염원과 장애를 타파하시어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성취하셨고, 그럼으로써 일체중생의 존경과 흠모를 받을 가치가 있으신 분”이라고 숙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기쁨을 느껴 열심히 수행할 수 있도록 고무된다.

 

자애관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라고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부정관은 “몸은 창자, , 가래… 등과 같은 불결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숙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숙고하면 몸에 대한 애착을 줄일 수 있다.

 

사수념은 “내가 지금은 비록 살아 있지만 지금 당장, 또는 내일이나 모레 등 어느 순간이라도 죽을 수 있다.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숙고하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게으름 피울 수 없다.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

 

준비단계 수행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좌선에 들어간다. 방법은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마하시전통에 따른 방식이다. 아나빠나사띠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빠나사띠는 위빠사나 수행에 적합하지 않다.

 

아나빠나사띠는 사마타수행에 적합하다. 이는 아나빠나사띠가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에 포함 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아나빠나사띠의 경우 코 부근에 집중하다 보면 상기가 될 수도 있어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이유 등으로 마하시전통에서는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 즉 배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러나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고요한 상태에서 복부의 움직이 잘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강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다리 저림과 같은 통증도 보이지 않는다. 배에서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해야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잡념이 치고 들어 왔다. 관찰해 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분명하지 않으니 집중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도중에 방법을 바꾸었다. 그것은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복부에 마음을 집중한 상태에서 일어남’ ‘꺼짐하며 명칭을 붙인 것이다. 집중이 잘 되었다. 잡념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효과를 보았다. 종칠 때까지 자세한번 바뀌지 않고 집중할 수 있었다.

 

명칭붙이기를 권장하는 마하시전통

 

안되면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이제까지 좌선과 행선이 잘 안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방식대로 했기 때문이다. 안되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잡념만 일어날 뿐이다. 집중이 안되니 지루하고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내력 테스트하기 위해서 앉아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초심자에게 명칭붙이기를 권장하고 있다. 위빠사나수행 지침서라고 볼 수 있는 찬먜사야도의 위빳사나수행 28’을 다시 열어 보았다. 명칭과 관련하여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로 설명하고 있다. 법념처는 앞의 세 가지 즉,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위주로 명칭붙이기가 설명되어 있다.

 

신념처의 경우 행선을 포함하여 일상에서 모든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일상사띠에 대하여 행수행(行修行)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명칭 붙이는가? 서있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서 있음하는 것이다. 의자나 바닥에 앉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앉음, 앉음,…’하며 명칭 붙이는 것이다.

 

몸과 관련하여 모든 경우에 명칭이 붙여진다.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뻗음, 뻗음,…’라고 명칭 붙이는 것이다. 음식을 입에 넣을 때는 넣음, 넣음,…’라고 명칭 붙인다. 음식을 삼킬 때는 삼킴, 삼킴,…’라고 명칭 붙여야 한다.

 

수념처와 관련하여 명칭 붙일 수 있다. 수행을 하여 삐띠(piti)가 발생했을 때 마음속으로 환희, 환희,…’하며 명칭 붙인다. 행복감이 일어날 때는 행복, 행복,…’라고 명칭 붙인다. 슬픔이 발생하면 마음속으로 슬픔, 슬픔,…’하며 명칭붙여 관찰한다.

 

심념처는 어떻게 명칭 붙이는 것일까?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잡념이 일어날 수 있다. 마음이 대상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이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바로 , ,…’하며 명칭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 마음의 영상을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 ,…’라며 명칭 붙여야 한다. 영상이 사라질 때까지 명칭 붙이며 계속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통증이 발생할 수 있다. 방석이 얇은 경우 좌선한지 이삼십분이 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저린다. 이런 경우 종칠 때까지 자세를 유지하라고 한다. 그러나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한번 바꾸어 줄 수 있다. 이때 바꾸려는 의도가 일어난다. 그럴 때에도 의도, 의도,…’하면서 바꾸려는 의도를 관찰하라는 것이다.

 

마하시방법은 복부관찰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복부만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복부에서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하고 있을 때 가려울 수가 있다. 동시에 강한 대상 두 개가 발생한 것이다. 가려움이 심하다면 주관찰 대상을 가려움으로 바꾸어야 한다. 강한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려움, 가려움,…’하며 명칭 붙여 관찰하는 것이다. 가려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끈질기게 관찰한다. 가려움이 사라지면 다시 주관찰 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으로 복귀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명칭 붙여야 한다. 마음을 복부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복부가 불러올 때는 불러옴이라고 명칭 붙인다. 복부가 불러옴은 한번 밖에 일어나지 않음으로 단지 한번 불러옴하는 것이다. 꺼짐의 경우 꺼짐이라고 명칭 붙여 관찰한다. 이렇게 불러옴과 꺼짐을 명칭 붙여 관찰하다 보면 점차 집중이 된다. 그래서 복부의 움직임과 관찰하는 마음만 남게 된다. 이 우주에 단지 불러오고 꺼지는 육체적 움직임의 과정과 그것을 관찰하는 정신적으로 아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우주에 움직임과 관찰하는 마음만 남게 되었을 때 사람이라든가, 존재라든가, 자아, 영혼, , 너와 같은 개념은 발을 붙이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 몸과 마음이 오직 육체적-정신적 과정일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위빠사나 첫번째 지혜이다. . 이를나마루빠 빠릿체다 냐나(nāmarūpa pariccheda ñāna)’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말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경행을 매우 중요시하게 여긴다. 천천히 걸으면서 행위를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행선(行禪) 또는 보수행(步修行)이라고 한다. 미얀마 레디사야도 계통의 수행전통에서는 경행이 없다. 오로지 아나빠나사띠와 같은 좌선 수행만 한다. 그러나 마하시전통에서는 어떤 면에서는 좌선보다 경행을 더 중시한다. 그것은 경행이 좌선보다 성품(paramattha dhamma)을 더 보기 쉽기 때문이다.

 

경행을 할 때는 천천히 한다. 천천히 하는 이유는 성품을 보기 쉽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왼발, 오른발하며 한단계로 관찰한다. 10분 정도 관찰한 다음에는 -내림이라 하여 두 단계로 관찰한다. , 발을 들어서 내리는 두 가지 동작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때도 역시 명칭을 붙인다.

 

발을 들 때는 이라고 명칭 붙이고, 발을 내릴 때는 내림이라고 명칭 붙인다. 이렇게 10분 관찰한다. 다음으로 세 단계 관찰이 있다. 이는 --내림이다. 다섯 단계는 --내림-닿음-누름이다. 때로 올림을 추가하여 -올림--내림-닿음-누름이라고 하여 여섯 단계로 관찰할 수 있다.

 

경행이 좌선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의도이다. 발을 옮길 때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전에 먼저 의도를 관찰해야 한다. 다섯 단계 경행이라면 의도--올림--내림-닿음-누름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곱 단계 관찰이 된다.

 

천천히 하면 모든 행위에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발을 들기 전에 의도가 있고, 발을 올릴 때 의도가 있고, 발을 밀 때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도--의도-올림- 의도-- 의도-내림-닿음- 의도-누름이 된다. 다만 닿음은 의도가 없다. 닿는 것은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원에서는 무엇이든지 천천히 하라고 한다. 선원에서는 절대로 뛰는 일이 없다. 이렇게 천천히 하는 이유는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속도가 나면 관찰하기 어렵다. 빨리 걷는다면 들어 올려서 밀고 내리고 닿고 누름을 관찰할 수 없다. 가급적 천천히 해야 한다.

 

마치 슬로우모션을 보듯이 천천히 움직여야 의도--의도-올림- 의도-- 의도-내림-닿음- 의도-누름을 관찰할 수 있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우주에 오로지 움직임과 관찰하는 마음만 남게 된다. 우주 그 어디에도 사람이라든가, 존재라든가, 자아, 영혼, , 너와 같은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힘들게 좌선을 하고 경행하면서 똑 같은 행위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오로지 정신적-물질적 과정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 있다. 우주 그 어디에도 나, , 영혼처럼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우주에는 오로지 일어남과 꺼짐, 그리고 이를 관찰하는 마음만 남아 있다. 여기서 일어남은 원인이고, 이를 관찰하는 마음은 결과이다. 꺼짐도 마찬가지이다. 경행을 할 때는 의도를 알게 되는데, 의도가 원인이고 발을 드는 것이 결과이다. 이는 다름 아닌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빠사나 두번째 지혜라고 하여 빳짜야빠릭가하냐나(paccaya pariggha ñāna)’라고 하는데, 이를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라고 한다.

 

기본기에 충실해야

 

오늘 담마와나 선원에서 좌선을 하면서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명칭붙이기이다. 좌선을 할 때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불러움’ ‘꺼짐하며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명칭을 붙이면 집중이 잘 된다. 그리고 잡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명칭을 붙인다는 것은 마치 만병통치약 같은 느낌이 든다.

 

사띠를 놓치면 마음이 대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럴 때 헤맴, 헤맴,…’하며 명칭붙이면 잡념은 사라지고 다시 대상으로 마음이 붙는다는 것이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순간 명칭 붙여야 한다. 이는 경행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행선을 하는 동안 모든 동작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내림-닿음-누름하며 명칭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다섯 단계 또는 여섯 단계로 관찰하려면 천천히 해야 할 것이다.

 

7월초에 집중수행을 앞두고 있다. 7 2()부터 7 7()까지 직지사에서 위빠사나 템플스테이가 예정되어 있다. 담마마마까 선원장 에인다까 사야도가 지도한다. 통역은 담마마마까 창건주 혜송스님이 하기로 되어 있다. 집중수행을 앞두고 기본에 충실하려고 한다. 그것은 명칭붙이기이다. 본래 마하시전통에서는 초심자에게 명칭붙이기를 권장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기본기가 충실해야 실력을 발휘한다. 위빠사나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초심자가 하라는 대로 따라 했을 때 좋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이번 집중수행에서는 명칭붙이기를 하여 기본에 충실하고자 한다.

 

 

2019-06-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