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길상(吉祥)의 조건에 대하여, 담마와나선원 가사공양 까티나법요식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0. 28. 21:17


길상(吉祥)의 조건에 대하여, 담마와나선원 가사공양 까티나법요식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문이 열렸다면 기분 좋은 것이다. 무언가 행운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간다. 자동차운전을 하는데 푸른 신호등이 연속이면 역시 기분이 좋아 진다.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간다. 반면 물건을 떨어뜨려 깨뜨렸다든가 음식을 흘려 옷이 더러워졌다면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간다. 이럴 때는 좀 더 주의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특히 운전할 때가 그렇다.

 

예로부터 아침에 까치가 울면 귀인이 올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침에 특별한 사람을 만나면 재수없다는 말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상서로운 길조으로 보고 어떤 경우는 재수없는 징조로 본다. 살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사람 사는 곳에서는 이익과 불이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은 다반사로 벌어진다. 길조와 징조는 어떤 연유로 생겨나는 것일까?

 

탁발은 진행되고

 

한국테라와다불교 서울선원이라고 볼 수 있는 담마와나선원에서 까티나법요식이 열렸다. 작년 선원 개원후에 처음 열렸고, 올해로 두 번째이다. 20191027일 일요일 오전부터 열리는 까티나법요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남영동행 전철을 탔다. 역에서 숙대입구역까지는 약 10분가량 걸어가야 한다. 도중에 신호등이 많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 오전 930분부터 야외탁발이 있다고 하는데 놓치지 않기 위해서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탁발은 진행되고 있었다. 다섯 명의 스님이 맨발로 탁발하는 모습을 보니 남방테라와다불교에서 보는 것 그대로이다. 다만 붓다데이나 까티나법요식 때와 같이 특별한 때에만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신도들은 준비한 공양물을 들고서 일렬로 서있다. 스님들이 지나가면 발우에 정성스럽게 준비한 공양물을 넣는다. 미얀마 수행센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담마와나선원 까티나법요식

 

꼭 일년만이다. 작년 까티나법요식은 1029일 열렸다.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에서 서울 청파동에 위치하고 있는 담마와나선원에서 연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경우 두 번 열렸다. 일주일전에 울주 붓다의길따라선원에서 까티나법요식이 열렸다. 그리고 서울에서 또 한번 열렸다. 이렇게 두 번 열려서일까 작년보다는 사람들이 적게 왔다.

 

이번 청파동 까티나법요식에는 빤냐와로 삼장법사를 비롯하여 모두 여섯 명의 스님이 참석했다. 대부분 낯익은 스님들이다. 이날 눈에 띄는 스님도 있었다. 법주스님이다. 이름은 많이 들어 보았다. 그러나 한번도 이야기 나눈 적이 없다. 노랑가사를 입었는데 검붉은 가사를 입은 스님들과 대조적이다.

 




법요식은 까티나법요식 식순에 따라 진행되었다. 까티나치와라뿌자라 하여 의례집에 실려 있다. 마치 매뉴얼처럼 보인다. 사회자가 해야 할 말과 대중들이 따라 하는 말, 그리고 장로스님이 해야 할 말 등 15페이지에 걸쳐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은 삼귀의와 오계이다. 특히 오계를 빠뜨리지 않는다. 테라와다에서는 어떤 법회를 하든지 오계를 받아 지니는 것이다. 이런 점은 대승불교전통에서 보는 법회와 차별화된다.

 

까티나법요식은 가사공양법요식과 동의어이다. 안거를 마친 수행승들에게 재가자들이 가사를 보시하는 행사를 말한다. 안거가 끝나고 한달이내 하는 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까티나축제철이다. 한국 전국각지에서 10월 한달 동안 이곳 저곳에서 가사공양축제가 열린다. 주로 주말에 열리는데 이선원 저선원에서 행사가 있다보니 겹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두 곳 또는 세 곳, 그 이상 참석하기도 한다.

 

대가사를 펼치면

 

가사공양법요식의 하일라이트는 가사펼쳐보이기이다. 가사를 펼쳐보면 그 크기에 놀란다. 마치 두 세 명이 덮을 수 있는 이불같다. 실제로 그렇다. 세 벌 옷 중에서 대가사는 야외에서 잘 때 이부자리로 사용되는 것이다.

 




율장대품 까티나옷의 다발을 보면 다섯 가지 까티나특권이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1)허락없이도 다니는 것, 2)착의하지 않고 다니는 것, 3)별중으로도 식사하는 것, 4)필요한 만큼의 옷감을 받는 것, 5)어떤 옷감이 생겨나든, 그들의 옷이 된다.”(Vin.I.254)라는 항목이다. 여기서 두 번째 항목 착의하지 않고 다니는 것에 대한 주석을 보면 수행승이 외출할 때는 반드시 세벌 옷을 갖고 가야한다. 그러나 이의로 외출할 때는 그날 승원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그날 안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세벌 옷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계율에 저촉된다. 그러나 까티나옷을 만드는 경우에는 세벌 옷 가운데 어느 하나가 없이 다른 곳에서 지내도 된다.”(율장대품 987번 각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라고 되어 있다.

 

수행승이 하루 밤 이상 외출을 할 때에는 반드시 세 벌 옷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상의와 하의를 입고 대의를 어깨에 매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대의를 대가사 또는 중복가사라 하고 빠알리어로 상가띠(saghāi)라고 한다. 대가사는 추위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나무밑이나 숲에서 잘 때 이부자리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까티나법요식때 대가사를 펼치면 그 크기에 놀란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길상(吉祥)

 

가사공양에 이어서 빤냐와로스님의 짧은 법문이 있었다. 준비된 프린트물에는 망갈라숫따(magalasutta, Sn2.4)가 인쇄되어 있다. 빠알리원문과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다. 숫따니빠따에서는 볼 수 없는 천인들의 게송이 눈에 띄었다. 서문에 있는 것을 옮겨 보면 “12년간 망갈라가 무엇인지, 인간과 천인들이 함께 생각했지만, 행복을 가져오는 38가지 망갈라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네. 그리하여 천인들 중 최고의 천인이신 부처님께서 설하셨네. 이제 모든 악을 소멸하고, 모든 세상의 축복속에 머무는, 그 망갈라게송을 독송하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서문은 일종의 인연담과 같은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숫따니빠따 주석에도 천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전인도의 도시의 집회당에서 어떠한 것이 축복인가에 대하여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대부분 감각적인 것들이다. 형상이나 소리 같은 것이다. 이른 아침에 까치소리를 듣는 것 등이 해당된다. 요즘 같으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든가 푸른신호등이 연속으로 걸리는 것 등이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것들이 상서로운 길조가 아니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길상은 모두 38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망갈라경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센 것이다. ‘어리석은 자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로부터 시작하여 평온하다로 끝난다. 이러한 행위를 했을 때 길상이 기대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고 한다. 로또 같은 것이다. 꿈을 잘 꾸었을 때 복권을 사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당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로또를 기대하느니 로또와 같은 길상이 임하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이 더 빠를지 모른다. 망갈라숫따에 언급된 38가지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선한행위가 있으면 길상이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세 가지 길상(吉祥)의 조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세 가지 길상의 조건에 대하여 말했다. 그것은 에띠 까라나 (eti karaa)’라고 해서 성공하기 위한 조건들이고, ‘밧디 까라나(vaḍḍhi  karaa)’라고 해서 성숙하기 위한 조건들이고, 마지막으로 삼마 삼빳띠 까라나(samma sampatti karaa)’라고 해서 충족된 상태에 이르기 위한 조건들을 말한다. 공통적으로 까라나(karaa)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까라나는 영어로 ‘doing; making’의 뜻이다. 낮은 단계에서부터 높은 단계로 조건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띠로 설명했다.

 

에띠 까라나는 구비하기 위한 조건을 말한다. 약한 사띠라고 볼 수 있다. ‘밧디 까라나는 성숙조건들로서 강한 사띠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어느 정도 지혜가 갖추어진 상태라고 했는데 이 단계가 되면 자연스럽게 사띠가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삼마 삼빳띠 까라나충족조건으로서 지혜가 완성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마지막 삼마 삼빳띠 까라나는 항상 길상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삶 자체가 축복인 것이다.

 




왜 망갈라(magala)라고 하는가?

 

길상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상서로운 것을 보았거나 상서로운 소리를 들었다고 하여 행운이나 축복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등 38가지가 있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열반이다. 열반에 이르면 세상사에 부딪쳐도 동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슬픔도 없고 티끌도 없이 안온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9)라고 했다.

 

망갈라(magala)라는 말은  ‘auspicious’ ‘lucky’ ‘good omen’의 뜻이다. 한자어로는 길상(吉祥)이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축복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번역한 곳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망갈라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복에 대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입학식이나 결혼식에서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망갈라경 말미에 일종의 유통분이라고 볼 수 있는 게송이 있다. 게송에서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번영이라는 말은 솟띠(sotthi)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well-being’의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잘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다름 아닌 축복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는 항상 상서로운 징조가 있고 번영만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망갈라라고 하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 파멸에

 

망갈라숫따가 축복에 대한 경이라면 반대로 파멸에 대한 경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빠라바와숫따(parābhavasutta, Sn1.6)가 바로 그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축복의 경을 설하면서 동시에 파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축복에는 조건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파멸에도 조건이 있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 파멸에 이른다고 했다.

 

빠라바와숫따는 파멸의 경이라고 한다. 모두 25가지 파멸의 조건이 있다. 파멸의 문 제1조건은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가르침을 사랑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가르침을 싫어 하는 사람은 파멸합니다.”(Stn.92)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가르침을 싫어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감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본능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내려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탐, , 치로 사는 사람들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다보면 파멸하게 되어 있다. 파멸의 문 25가지 조건 중에 감각적인 것을 들라면 여색에 미치고 술에 중독되고 도박에 빠져있어”(Stn.106)라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색, , 도박에 빠지면 패가 망신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파멸의 경에 꼴불견도 있다. 그것은 젊은 시절을 지난 남자가 띰바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못 이룬다면”(Stn.110)이라는 말이다. 젊은 시절을 지난 남자란 중년 또는 노인을 말한다. 돈은 있지만 힘이 약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여인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을 때 탐욕과 분노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룰 것이다.

 

부처님이 파멸의 경을 설한 것은 이유가 있다. 주석에 실려 있는 인연담을 보면, 천인들이 세존께서는 축복의 경으로 뭇삶의 성공과 행복을 설하고 일방적인 번영만을 설했을 뿐 파멸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다. , 그것으로 사람들이 쇠퇴하고 멸망하는 이유가 되는 파멸에 대해서도 물어보자.”(Prj.I.166-16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파멸의 경은 축복의 경 못지않게 독송되고 있다고 한다.

 

측량할 수 없는 공덕의 다발

 

까티나축제가 끝났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붓다데이와 함께 까티나법요식은 두 번째로 큰 명절이다. 안거를 끝낸 수행승에게 가사공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공덕지을 찬스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청정한 수행자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까티나행사는 부처님당시에도 있었다. 안거기간동안 수행승들은 유행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하여 한곳에 모두 모여 살았던 것은 아니다. 각자 처소가 있어서 처소에서 산 것이다. 수행도 각자 처소에서 했다. 커다란 강당이 있어서 강당에 모여 수행한 것이 아니다. 강당은 모여서 수행하는 장소가 아니라 모여서 설법 듣는 장소였던 것이다.

 

까티나행사를 하면 각처소에 있는 수행들이 모여 들었다. 재가불자들은 평소 알고 지내는 수행승에게 가사를 보시했다. 그래서 가사를 보시할 때는 수행승을 지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 가사를 누구 수행승에게 보시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거를 마친 수행승은 매우 청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자에게 보시한 공덕은 어느 정도일까? 앙굿따라니까야 공덕의 넘침의 경’(A4.51)에 따르면, 무량한 삼매를 성취한 수행자에게 보시하면 측량할 수 없는 공덕의 다발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바닷물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큰 바다에 물을 두고 물이 얼마만큼의 뒷박이고 물이 얼마만큼의 백 뒷박이고 물이 얼마만큼의 백천뒷박인지 그 양을 헤아리는 것은 쉽지 않다. 단지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물의 다발이라고 말 할 수 있을 뿐이다.”(A4.51)

 

 

 

2019-10-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