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차욱타지 와불, 미얀마 성지순례기9

담마다사 이병욱 2019. 2. 27. 14:26

 

차욱타지 와불, 미얀마 성지순례기9

 

 

2019 1 12일 오전

 

마하시 예익타선원을 출발하여 와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불과 오분도 안되어 도착한 것 같다. 툰툰님은 와불이 있는 곳에 대하여 척탓지라 했다. 그리고 좌불이 있는 곳을 앗타치라 했다. 미얀마 발음은 알아 듣기 어렵다. 여러 번 물어도 와불 있는 곳에 대하여 척탓지라 했다. 검색해 보니 ‘Chaukhtatgyi Buddha Temple’이다. 인터넷에서는 차욱타지라 부르고 있다.

 

차욱타지는 어디에

 

차욱타지는 마하시센터 바로 아래에 있는 듯 하다. 대체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지도를 찾아 보니 마하시센터에서 900미터 거리로 차로 3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차욱타지는 양곤의 관광명소 중의 하나에 속한다. 미얀마에 관광가거나 성지순례 할 때 필수 코스 중의 하나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너른 주차장이 잘 갖추어져 있다. 입구에는 마치 천상세계를 연상시키는 듯한 황금색 첨탑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와불은 보수중

 

커다란 창고 같기도 하고 커다란 체육관 같기도 한 건물에 들어 갔다. 들어가자 마자 놀란 것은 엄청난 크기의 와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상은 아니다. 편안한 자세로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다.

 


 


크기는 얼마나 될까? 검색해 보니 67미터 길이에 17미터 높이라 한다. 가던 날 본 와불은 공사중이었다. 대나무 같은 재료를 이용하여 와불전체를 둘러 놓았다. 보수공사 중인 모양이다. 쉐다곤파고다 역시 보수중이었다. 툰툰님에 따르면 5년에 한번 있는 일이라 한다. 이곳 차욱타지 와불도 때가 되어서 보수하고 있는 것이리라.

 

부처님이 잠을 잘 때에는

 

성지순례 하다 보면 종종 부처님열반상을 볼 수 있다. 한국에도 열반상이 많이 있다. 일본 남장사로 순례 갔었을 때 엄청난 크기의 열반상을 보았다. 돈황 성지순례 갔었을 때도 열반상도 무척 컸다. 인도성지 순례 갔었을 때 열반상은 가장 거룩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열반상은 왜 오른쪽으로 누운 형상을 하고 있을까?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자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열반상은 부처님의 잠 자는 모습일 것이다. 경전에서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누웠다.”(S4.7)라고 묘사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구는 정형화 되어 있어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잠을 잘 때 새김을 확립하고 잠을 잔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띠하며 자는 것을 말한다. 잠을 드는 순간까지 사띠하는 것이다. 다만 잠들었을 때는 사띠할 수 없다. 그래서 잠을 잘 때에는 사띠가 쉰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잠에서 깨면 다시 사띠를 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누웠다.’라 했는데, 이는 다시 일어날 것을 의도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말한다. 잠을 깨자 마자 다시 사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도 사띠가 유지되고, 잠에서 깨어서도 사띠가 유지되는 것이다.

 

네 가지 휴식이 있는데

 

차욱타지에서 보는 와불상도 잠자는 모습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눈을 뜬 상태에서 편안한 상태로 누워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휴식을 취하는 부처님 상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 휴식의 경’(A2.244)이 있다. 경에 따르면 네 가지 휴식하는 자세가 있다. 차례로 나열해 보면, 1)등을 바닥에 대고 휴식하는 것, 2)왼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휴식하는 것, 3)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휴식하는 것, 4)선정에 들어 휴식하는 것, 이렇게 네 가지 휴식이 있다.

 

첫째, 등을 바닥에 대고 휴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죽은 자의 휴식(petaseyyā)’ 이라 했다. 왜 죽은 자의 휴식인가?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대부분의 죽은 자는 등을 바닥에 대고 휴식을 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죽은 자의 휴식은 이와 같다.”(A4.244)라고 말씀 했기 때문이다.

 

둘째, 왼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휴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자의 휴식(kāmabhogīseyyā)’이라 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쾌락을 누리는 자는 왼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휴식을 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쾌락을 누리는 자의 휴식이란 이와 같다.”(A4.244)라고 말씀 했기 때문이다.

 

셋째,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휴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자의 휴식(sīhaseyyā)’이라 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백수의 왕인 사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한 발에 다른 발을 포개고 대퇴부 사이에 꼬리를 감추고 휴식을 취한다. 그는 일어나면 상반신을 구부려서 하반신을 살펴본다. 수행승들이여, 백수의 왕인 사자가 자신의 몸이 흐트러진 것이나 무너진 것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백수의 왕인 사자는 기뻐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백수의 왕인 사자가 자신의 몸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것이 없거나 무너진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백수의 왕인 사자는 기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사자의 휴식이라 한다.”(A4.244)라고 말씀 했기 때문이다.

 

넷째, ‘여래의 휴식(tathāgataseyyā)’이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네 가지 선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 번째 선정에 대한 것을 보면 부처님은행복과 고통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에 든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여래의 선정이라 한다.” (A4.244)라고 말씀했다. 이렇게 선정에 드는 것에 대하여 여래의 휴식이라 한다.

 

등을 대고 눕는 것에 대하여

 

잠을 자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성전협) 전재성선생이 번역한 것을 보면 빠알리어 ‘seyya’에 대하여 휴식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 번역을 보면 으로 번역했다. 어느 번역이 적합할까?

 

빠알리어 ‘seyya’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영어로 ‘Lying, sleeping; a bed, couch’라 되어 있다. 한자어로는 臥床으로 되어 있다. 누워 있는 모습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과 잠을 자는 모습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빠알리어 세이야(seyya)’에 대하여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본다면 1)죽은 자의 휴식(등을 바닥에 댐), 2)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의 휴식(왼쪽 옆구리를 댐), 3)사자의 휴식(오른쪽 옆구리를 댐), 4)여래의 휴식(선정상태)이 된다. 이것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방식이다.

 

빠알리어 세이야(seyya)’에 대하여 을 자는 것으로 본다면 1)아귀가 자는 자세(등을 바닥에 댐), 2)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자가 자는 자세(왼쪽 옆구리를 댐), 3)사자가 자는 자세(오른쪽 옆구리를 댐), 4)여래가 자는 자세(선정상태)가 된다. 이것은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방식이다.

 

번역에 두 가지 차이가 있다. 하나는 첫번째 번역의 차이는 빠알리어 뻬따(peta)의 번역에 대한 것이다. 성전협에서는 죽은 자라 했고, 초불연에서는 아귀라 했다. 빠알리어 사전에서는 Peta에 대하여‘dead; departed. (m.) a ghost’라 했다. 죽은 자의 뜻도 있지만 아귀라는 뜻도 있다.

 

한역사전을 보면 뻬따(Peta)에 대하여 亡者, 餓鬼, 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등을 대고 누워 있는 형상은 마치 송장과도 같은 형상임을 알 수 있다. 송장을 옆으로 놓거나 엎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있는 자에 대하여 죽은 자처럼 누워 있는 것이라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이 더 적합해 보인다.

 

선정은 부처님의 휴식

 

두번째 번역의 차이는 여래의 휴식에 대한 것이다. 성전협에서는 여래의 휴식이라 번하여 네 가지 선정에 드는 것에 대하여 휴식하는 것이라 했다드. 이에 반하여 초불연에서는 여래의 잠이라 하여 네 가지 선정에 드는 것에 대하여 잠자는 것이라 했다. 어느 번역이 적합할까?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수행할 때 선정에 드는 것을 쉬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을 끊임 없이 관찰하는 것은 힘이 들고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면 마치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하다 힘들면 사마타 수행으로 전환한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네 가지 선정에 드는 것은 성전협 번역과 같이 여래의 휴식이라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잠을 자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잠을 잔다는 것은 사띠를 놓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잠이 드는 순간까지 사띠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잠이 들면 사띠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다시 사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세이야(seyya)’에 대하여 으로 번역하여 부처님이 선정에 드는 것에 대하여 잠자는 것으로 본다면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미얀마 차욱타지 사원에서 보는 와불은 잠을 자는 모습일까? 선정에 든 모습일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일까?

 

차욱타지 와불상은 사자의 휴식

 

차욱타지 와불상을 보면 눈을 뜨고 있다. 눈을 감고 있다면 잠자는 형상이거나 열반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오른 손을 받치고 있어서 머리가 치켜 든 상태이다. 잠을 자는 형상이 아니라 휴식을 취하는 형상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네 가지 휴식을 취하는 자세 중에서 세번째에 해당되는 사자의 휴식(sīhaseyyā)’ 자세라 볼 수 있다.

 

와불상이 선정상태로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선정상태로 휴식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여래의 휴식(tathāgataseyyā)’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정자세는 좌선일 것이다. 가부좌 자세를 취하여 선정에 들기 때문이다. 이는 디가니까야 새김의 토대의 큰 경’(D22)에서 부처님이 수행승이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맛지마니까야 호흡새김의 경’(M118)에서도 똑같이 말씀했다. 위빠사나이든 사마타이든 공통적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차욱타지 와불상은 선정상태에서 휴식을 취하는 부처님의 휴식상이 될 수 없다. 남는 것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사자의 휴식상이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있는 것에 대하여 사자의 휴식이라 했다. 이런 상태에서 잠이 든다면 부처님의 잠자는 방식이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하루에 두 시간만 잤다고 한다. 주석서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의 하루일과를 보면 부처님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후야 두 시간 동안이라 한다.

 

부처님은 두 시간 잤다. 새벽 3시에 잠이 들어 4시까지 한시간 동안 취침을 하고, 새벽 4시부터 5시까지 한시간 동안은 열반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 외 시간은 활동하는 시간이다.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보면 깨어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수행승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일반사람들이나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다. 중야인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4시간 동안은 하늘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제도하는 시간이라 한다. 부처님이 잠을 자는 시간은 후야인 새벽 3시부터 5시까지 2시간뿐이다.

 

휴식과 잠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사띠의 여부에 달려 있다. 휴식한다고 할지라도 사띠는 유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잠을 자면 사띠는 쉬어야 한다. 따라서 휴식과 잠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부처님이 오른쪽 옆구리로 하여 누운 자세를 취했다면, 더구나 눈을 뜬 상태라면 사자의 휴식자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차욱타지 사원의 와불상은 사자의 휴식자세임에 틀림 없다.

 

세 가지 세상이 표현된 108 발바닥문양

 

초기경전에서는 종종 부처님을 백수의 왕인 사자에 비유하고 있다. 경에서도 사자의 휴식자세에 대하여 백수의 왕인 사자가 자신의 몸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것이 없거나 무너진 것이 없는 것을 본다.”라 했다. 차욱타지 와불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한 발에 다른 발을 포개고라 했는데 이는 차욱타지 와불상 발 모양으로도 확인 된다.

 

 


 

와불상을 보면 발바닥에 문양이 있다. 모두 108가지라 한다. 설명문을 보면 ‘The distinguishing marking on the soles of the Buddha’라 되어 있다. 부처님을 특징 짓는 마크가 108가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108가지 상징에 대하여 세 가지 세상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오까사로까 (okāsaloka)라 하여 59가지 상징이 있고, 삿타로까(sattaloka)라 하여 21가지 상징이 있고, 상카라로까(sakhāraloka)라 하여 28가지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세상은 모두 경전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오까사로까 (okāsaloka)는 현상계를 말한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다. 이를 물질적 세상이라 한다.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상인 현상계를 말한다.

 

삿타로까(sattaloka)는 중생계를 말한다.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 사는 삼계가 이에 해당된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S22.94)라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뭇삶들이 사는 중생계를 말한다.

 

상카라로까(sakhāraloka)는 조건계를 말한다. 이는 세상에 원리가 있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 다름 아닌 오온십이처십팔계의 세상이다. 초기경전을 예로 든다면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S2.26)라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형성의 원리로 성립된 조건계를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세상이 차욱타지 와불상 발바닥에 108가지 상징으로 표현 되어 있는 것이다.

 




와불상 조성역사를 보면

 

차욱티지 와불상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19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얀마의 뽀 타(Po Tha)’라는 사람이 1899년 스폰서가 되어서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조성된 와불상은 1950년대에 완전히 해체 되었다. 해체된 이유는 균형잡히지 않았고 더구나 부처님의 얼굴이 공격적인 이미지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현재 보는 와불상으로 대체 된 것은 1973년의 일이다. 구와불상이 해체 된 그 자리에 새로운 와불상이 조성된 것이다. 구와불상과는 달리 온화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취침상도 아니고 열반상도 아니다. 부처님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사자의 휴식자세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차욱타지 와불상은 46년 된 것이다. 길이는 67미터이고 높이는 17미터에 이른다.

 




반야용선에 태워 보내 듯

 

중국관광객들이 도르래를 잡아 당기는 모습을 보았다. 와불 상층부까지 공양물  을 실어나르는 것이다. 작은 배모양에 돈이나 물품을 넣고 줄을 잡아 당기는 것이다. 그러면 작은 배는 상층부까지 이동된다. 배가 다 올라 가면 수거하는 사람이 있어서 공양물을 올린다. 이런 광경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했다. 마치 반야용선에 태워 보내는 것 같다.

 




부처님의 위대한 힘으로 승리와 행운이

 

와불상 앞에는 미얀마 불자들이 앉아서 예불 올리고 있다. 미얀마 전통복장을 하고 있다. 사원에 갈 때에는 가장 잘 차려 입고 가는 것 같다. 이런 점은 한국불자들도 배워야 한다. 한국에서 일요일 오전 교회 가는 사람들은 예식장 가는 것처럼 잘 차려 입는다. 그런데 불자들은 절에 갈 때 아무렇게나 입고 가는 것 같다. 등산복 차림도 많다. 이는 불자의 예의가 아니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어느 성지이든지 성지에 갈 때는 최고로 좋은 옷을 입고 가는 것 같다. 그것도 미얀마 전통복장이다. 이런 점이 한국과 다르다.

 










 

미얀마 불자들은 와불상 앞에 앉아 삼배를 하고 난 다음 앉아 있다.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모습은 와불상 뒤에서도 볼 수 있다. 와불상 주변에서 예경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이 기도로 비추어 질 수도 있다. 미얀마가 수행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기복이 우세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부처님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소원을 들어 주는 절대적 적 존재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존할 수 있다.





부처님의 위신력은 자야망갈라가타에서 볼 수 있다. 악마의 군대는 자애의 가르침으로 섭수했고, 흉폭한 야차는 인내와 자제로, 날뛰는 코끼리는 자비의 세례로,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신통변화로, 가짜 임신녀 찐짜는 적멸과 안온으로, 논쟁의 달인 삿짜까는 지혜의 불로, 간교한 난도빠난다 용은 신통변화로, 삿된 견해를 가진 하느님 바까는 지혜의 의약으로 물리친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승리의 힘이 나에게는 물론 그대에게도 임하길 바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승리의 힘이 나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면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 임하길 바랍니다.”라며 수호게송을 외는 것이다. 또한 가족이나 상대방에게는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그대에게 임하길 바랍니다.”라며 수호게송을 외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호게송을 암송하는 것은 절대자에게 비는 기도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자야망갈라가타에서는 여덟 개의 승리와 축복의 게송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유통분 게송이 있다.

 

 

이 부처님의 승리의 축복을 나타내는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오니

닥쳐 오는 수많은 여러가지 위험을 극복하고

슬기로운 자가 되어 해탈과 지복이 함께하여지이다.”



 

2019-02-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