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응아타지 대불, 미얀마 성지순례기10

담마다사 이병욱 2019. 2. 28. 14:44

 

응아타지 대불, 미얀마 성지순례기10

 

 

2019 1 12일 오전

 

미얀마어는 알아듣기도 힘들고 발음하기도 어렵다. 안내자 툰툰님이 다음 행선지가 아타치라 했다. 그러나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 아타지라는 말은 검색되지 않는다. 그래서 양곤 대불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하면 응아타지라는 말이 뜬다. 영어 스펠링으로는 Nga Htat Gyi’라 한다. 차욱타지 파고다 바로 옆에 있는 응아타지 파고다로 향했다.

 

 






응아타지는 차욱타지에서 길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다. 북쪽에는 차욱타지가 있고 남쪽에는 응아타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광객들이 응아타지 사원은 잘 것같다. 와불이 있는 차욱타지사원은 사람들이 붐비지만 좌불이 있는 응아타지 사원은 상대적으로 한산한 느낌이다. 이는 주차장 크기로도 나타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응아타지사원은 조용한 분위기이다. 주차장도 넓지 않다. 도심이라 하지만 시골에 있는 사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한가한 느낌이다. 날씨는 맑고 깨끗하고 청명하다. 점심시간대이어서일까 온도가 거의 30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햇살은 따갑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선선하다. 입구에는 미얀마 특유의 황금으로 장식된 문이 있다. 마치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보인다.

 

 






응아타지 대불

 

긴복도를 따라 들어 가다 보면 좌측에 커다란 홀에 이른다. 엄청난 크기의 홀에는 백색의 부처님이 항마촉지인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에는 황금 보관을 쓰고 있다. 마치 잠자리 날개처럼 보이는 황금색의 장식이 붙어 있다. 불상의 상호는 전형적인 미얀마사람 모습이다.

 



 

불상의 높이는 14미터이다. 아파트 육층가량 된다.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중국등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좌불과 비교하면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상의 크기로 불심을 재단할 수 없다. 어느 곳이든지 그곳 만의 독특한 정서와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 응아타지 대불 또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정서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부처님의 발 아래에서

 

사람들은 대불 앞에 조용히 앉아 있다. 대불을 쳐다 보며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갈구하는 듯 하다. 사람들은 불상 앞에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부처님을 바라 보는 순간 마음에는 부처님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부처님은 피난처와 같다.

 




삼보는 귀의처이고 의지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난처이기도 하다. 마치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섬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가르침을 섬으로 하라’(S22.43)고 했다. 거센 삶의 현장은 폭풍우 치는 바다와 같은 곳이다. 배를 타고 가다 잘 못하면 침몰할 수 있다. 그래서 상어와 나찰 그리고 무서운 파도가 출몰하는 건너기 어려운 바다”(S35.228)라 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있을 수 없다. 건너서 저쪽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섬이다.

 

거센 물살을 건너 섬에 이르면 평화롭다. 때로 동굴에 있는 것처럼 안은하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섬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섬이라고 한다.”(S43.20)라 했다. 섬은 안전지대이다. 동굴 역시 마찬가지이다. 탐욕의 바다, 성냄의 바다, 어리석음의 바다에서 빠져 나와 안전지대로 가는 것이다. 안전지대가 바로 사원이다. 그래서 사원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사원으로 피난 가는 것이다.

 

피난처로서 불교를 생각해 본다. 부처님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온전히 의지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을 피난처로 삼겠다는 것이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부처님에게 투신 하는 것과 같다.

 






불교를 종교로 가지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막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가 없는 삶과 같다. 지혜가 없다는 것은 무지한 것을 말한다. 무지하게 살았다는 것은 어리석게 산 것을 말한다. 어리석게 살면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른다.

 

어느 날 문득 무언가 크게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어리석은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어서 나타났을 때 괴로움으로 귀결되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했다.

 

대부분 문제는 풀리기 마련이다. 병이 나도 시간이 되면 낫는다. 이런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시간되면 해결되는 문제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평생 안고 가는 문제가 그렇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나에게 닥쳤을 때 당황하게 된다. 젊은 사람은 이 젊음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아가게 된다. 건강한 사람은 이 건강이 평생 지속될 것처럼 여기게 된다. 이는 자만이다. 젊음에 대한 교만, 건강에 대한 교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잘 모른다. 행위가 익어서 과보로 나타나면 비로소 알게 된다. 이럴 때 문제의 해법을 찾고자 한다.

 

불교에 해법이 있었다. 모르고 있었던 것이 다 있었던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이 있었다. 인류가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에 대한 해법이 가르침 안에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해법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신심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경

 

사람들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속수무책이다.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럴 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그 분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부처님 그 분을 생각하면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것이라 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를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테라와다불교권 불자들은 수호경을 암송해 왔다. 마치 한국불자들이 천수경을 외는 것과 같다. 그런 수호경 중에 마하자야망갈라가타(Mahajayamagalagāthā)’가 있다. 우리말로 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경이라 한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자야망갈라가타와 다르다. 자야망갈라가타가 여덟 가지 사건에 대하여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것을 노래한 것이라면,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 위주로 되어 있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가 비록 초기경전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예로부터 신심 있는 불자들이 초기경전에서 좋은 문구를 모아 엮어 만든 것이다. 마치 한국의 천수경 같은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천수경을 생활경전이라 한다. 천수경은 경전에서 좋은 문구를 모아 만든 경전으로서 한국에서만 볼 수 있다. 가장 핵심적인 심묘장구대라니를 중심으로 하여 전송과 후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테라와다불교권에서 생활경전 중의 하나라 볼 수 있는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다음과 같다.

 

 

 모든 뭇삶의 요익을 위하시는

크나큰 연민의 수호자께서

모든 초월의 길을 이루시고

위없는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했사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1)

 

 보리수 아래서 승리하시어

싸끼야 족에게 환희를 가져다주었사오니

이처럼 제게(그대에게) 승리가 함께하여

승리의 축복을 성취하여지이다.”(2)

 

 부처님의 보배에 귀의하오니

하늘사람과 인간의

가장 위없고 가장 탁월한 약초

부처님의 위력있는 공덕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파괴되고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어지이다.”(3)

 

 가르침의 보배에 귀의하오니

타오르는 고통 식혀주는

가장 위없고 가장 탁월한 약초

위력있는 가르침의 공덕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파괴되고

모든 두려움이 소멸되어지이다.”(4)

 

 참모임의 보배에 귀의하오니

섬길 만하고 공양할 만한

가장 위없고 가장 탁월한 약초

참모임의 위력있는 공덕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파괴되고

모든 질병이 소멸되어지이다.”(5)

 

 세상 어떠한 종류의 보배이든지

엄청나게 많은 갖가지 것들이 있지만

부처님에 견줄 보배는 없사오니

제게(그대에게) 이 진실로 행복이 함께하여지이다.”(6)

 

 세상 어떠한 종류의 보배이든지

엄청나게 많은 갖가지 것들이 있지만

가르침에 견줄 보배는 없사오니

제게(그대에게) 이 진실로 행복이 함께하여지이다.”(7)

 

 세상 어떠한 종류의 보배이든지

엄청나게 많은 갖가지 것들이 있지만

참모임에 견줄 보배는 없사오니

제게(그대에게) 이 진실로 행복이 함께하여지이다.”(8)

 

 제게 다른 귀의처 없고

부처님이 저의 위없는 귀의처이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9)

 

 제게 다른 귀의처 없고

가르침이 저의 위없는 귀의처이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10)

 

 제게 다른 귀의처 없고

참모임이 저의 위없는 귀의처이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11)

 

 모든 재앙 진압되고

모든 질병 소멸되고

모든 장애 사라지어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12)

 

 모든 축복이 함께하고

모든 하늘사람들이 수호하소서.

부처님의 모든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언제나 평안이 함께하여지이다.”(13)

 

 모든 축복이 함께하고

모든 하늘사람들이 수호하소서.

가르침의 모든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언제나 평안이 함께하여지이다.”(14)

 

 모든 축복이 함께하고

모든 하늘사람들이 수호하소서.

참모임의 모든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언제나 평안이 함께하여지이다.”(15)

 

 별들과 야차들과 귀신들

악령들의 장애로부터

수호 게송의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제거되어지이다.”(16)

 

 별들과 야차들과 귀신들

악령들의 장애로부터

수호 게송의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제거되어지이다.”(17)

 

 별들과 야차들과 귀신들

악령들의 장애로부터

수호 게송의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제거되어지이다.”(18)

 

 하늘이나 땅위에 살고 있는

위신력을 지닌 신들과 용들께서는

이러한 공덕을 기뻐하여

영원토록 세상에서 가르침을 수호하소서.”(19)

 

 하늘이나 땅위에 살고 있는

위신력을 지닌 신들과 용들께서는

이러한 공덕을 기뻐하여

영원토록 세상에서 가르침을 수호하소서.”(20)

 

 하늘이나 땅위에 살고 있는

위신력을 지닌 신들과 용들께서는

이러한 공덕을 기뻐하여

영원토록 세상에서 가르침을 수호하소서.”(21)

 

(마하자야망갈라가타, 예경지송 수호경전품 239p)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괴로움, 두려움, 질병이 파괴되고 소멸되기를 바라며 삼보를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그대에게’ 라 하여 특정인에게도 삼보의 가피가 함께 하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게송이다.

 

돈으로 만든 화환

 

홀 입구에는 공양단이 보인다. 불상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불상 앞에는 꽃만 보인다. 공양단은 한켠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공양단을 보니 쌀이 보인다. 푸대로 된 것이다. 특이한 공양물을 보았다. 한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돈으로 된 화환이다. 돈을 동그랗게 만들어 공양 올린 것이다. 천짯이 25장 가량되니 25천짯이다. 우리 돈으로 16,000원 가량이다. 돈화환에 글씨가 쓰여 있다. 대부분 미얀마글씨이다. 한문도 보인다. 중국인인들이 공양했을 것이다. 영어도 있고 태국어도 있다. 그 많은 돈화환 중에 한국어는 보이지 않는다.

 



 

돈화환은 이곳에 참배 하러 온 사람들이 보시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시를 하지 않았다. 입장료도 무료였는데 사진만 찍고 온 것 같다. 안내자 툰툰님은 성지를 갈 때 마다 반드시 무릎 꿇고 참배 했다. 그런데 사진 찍는데 정신이 팔려 삼배 하지 못한 곳도 많다. 지금 생각해 보니 대단히 실례한 것 같다. 어느 사원에 가든지 반드시 보시하라고 했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것 같아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든다. 이렇게 글로서라도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일종의 보상이 될 것이다.

 




왜 용상(龍象)이라 하는가?

 

응아타지 대불 주변에는 볼 거리로 가득하다. 커다란 종이 있다. 한국의 종과 유사하다. 두 마리의 용이 종머리에 걸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는 용의 모습과는 다르다. 나가(nāga)라는 용이다. 용이라기 보다는 뱀에 가까운 모양이다.

 



 

응아타지에는 나가가 많이 보인다. 나가는 영어로 ‘a cobra, an elephant’로 설명되어 있다. 코브라 또는 코끼리라는 것이다. 나가를 코브라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나가는 용이라기 보다는 뱀에 더 가까운 말이다. 그런데 코끼리라고도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사전을 보면 ‘a noble person’의 뜻도 있다. 이는 부처님도 자신을 나가라 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사자, 코끼리, 황소 등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의 우월한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32상에 대한 것을 보면 ‘사자와 같은 윗몸’이나 ‘사자와 같은 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을 나가로 묘사했을 때에는 이는 코끼리에 대한 것이기 쉽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세상에 있으면서 어떠한 죄악도 짓지 않고, 온갖 족쇄와 속박을 잘라버리고, 해탈하여 어떠한 곳에서든 집착이 없다면,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를 코끼리라고 합니다.(Stn.522)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때 코끼리는 숭고한 자(a noble person)’를 말한다.

 

나가가 용으로 묘사된 경우도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열가지 능력을 갖추고 삼매에 든 위대한 코끼리를 이 세상의 최상의 승리자들 갈애는 그들에게 찾아볼 수 없네.(S22.76)라는 게송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코끼리는 용으로도 번역된다. 부처님의 두 상수 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용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도 큰스님을 지칭할 때 용상(龍象)’이라 한다. 이 말은 두 상수제자를 두 명의 큰 용으로 비유한 것에서 연원한 것이다.

 

간교한 용왕 난도빠난다

 

초기경전에서는 나가에 대하여 용 또는 코끼리로 보고 있다. 그런데 나가가 용왕의 이미지로 묘사된 경우도 있다. 이때 용의 이미지는 간교하고 사악한 것이다. 난도빠난다 용왕이 대표적이다.

 

응아타지 모서리 한켠에는 용 두마리가 서로 엉켜 있는 조형물을 볼 수 있다. 그 옆에는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지나가고 있다. 이것이 테라와다불교에서 널리 회자 되고 있는 난도빠난다 용왕 길들이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난도빠난다 용왕 길들인 이야기라 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난도빠난다 용왕 길들인 이야기

 

어느 때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급고독)장자가 세존의 설법을 들은 후 ‘세존이시여, 내일 아침 5백명의 비구들과 함께 저희 집에서 공양을 드십시요’라고 초대를 하고 돌아갔다. 세존께서는 승낙하셨다. 낮의 남은 기간과 반의 일부분이 지난 뒤 이른 새벽에 일만 세계를 둘러보셨다. 그 때 난도빠난다(Nandopananda)라는 용왕이 세존의 지혜의 영역에 와 있었다.

 

세존께서 ‘이 용왕이 나의 지혜의 영역에 와 있구나. 그에게 삼보를 신뢰함에 강하게 의지 하는 조건이 있는가’라고 전향하시고는 ‘ 이 용왕은 사견을 가졌고, 삼보에 청정한 믿음이 없다’고 보셨다. ‘누가 이 용왕을 사견으로 부터 벗어나게 할 것인가’라고 전향하시면서 목갈라나 장로를 보셨다. ‘아난다여, 여래가 천상으로 간다고 5백명의 비구에게 알려라.

 

그날 용들은 난도빠난다 용왕을 위해 연회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천상의 보석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천상의 하얀 일산을 쓰고 세 무리의 무희들과 용왕의 권속들에 둘러싸여 천상의 그릇에 담겨진 음식과 마실 것을 쳐다보면서 앉아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500명의 비구들과 함께 궁전을 지나 삼십삼천을 향해 가는 것을 용왕이 볼 수 있도록 하면서 지나갔다.

 

그때 난도빠난다 용왕에게 이와 같은 사악한 견해가 일어났다. ‘이들 까까머리 사문들이 우리 궁전 위를 바로 지나 삼십삼천의 세계를 들락날락하는구나. 지금 이후 부터 내 머리 위에 발먼지를 뿌리면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그는 일어나 수미산 기슭에 가서 그의 본래의 몸을 버리고 그의 사리로 수미산을 일곱번 감고 그의 목을 위로 펴서 삼십삼천을 그의 목으로 덮어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때 랏타빨라(Ratthapala)존자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 드렸다. ‘세존이시여, 전에는 이 장소에 서서 수미산을 볼 수 있었고, 수미산의 성벽을 볼 수 있었고, 삼십삼천을 볼 수 있었고, 웨자얀따(Vejayanta)궁전을 볼 수 있었고, 웨자얀따 궁전 위의 깃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무엇 때문에 지금은 수미산도 보이지 않고... 웨자얀띠 궁전의 깃발도 보이지 않습니까?’랏타빨라여, 난도빠난다라는 용왕이 우리에게 화가 나서 수미산을 그의 사리로 일곱 번 감고 목을 위로 펴서 그것을 막아 어둡게 만들고 서 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 자를 길들이겠습니다.’ 세존께서는 승낙치 않으셨다. 그때 밧디야(Bhaddiya)존자와 라훌라(Rahula)존자와 모든 비구들이 차례대로 일어나서 청을 드렸다. 그러나 세존께서 승낙하지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목갈라나 장로가 ‘세존이시여, 제가 길들이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목갈라나여, 그대가 길들이게’라고 세존께서 승낙하셨다. 장로는 본래의 몸을 버리고 큰 용왕의 모습을 창조하여 난도빠난다를 자기의 사리로 14번 감고 난도빠난다의 목위에 자기의 목을 편 뒤 수미산에 대고 압착했다.

 

용왕은 연기를 뿜었다. 장로도 ‘네 몸에만 연기가 있는 것이 어니라 내 몸에도 있다’고 말하면서 연기를 내뿜었다. 용왕의 연기는 장로를 괴롭히지 못했지만 장로의 연기는 용왕을 괴롭혔다.

 

그 다음에 용왕은 불꽃을 내 뿜었다. 장로도 ‘너의 몸에만 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몸에도 역시 불이 있다’고 말하면서 불꽃을 내 뿜었다. 용왕의 불은 장로를 괴롭히지 못했지만 장로의 불은 용왕을 괴롭혔다.

 

용왕은 ‘이 자가 나를 수미산에 대고 압착한 뒤 연기와 불꽃을 내뿜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 ‘난다여, 나는 목갈라나다.’ ‘존자시여, 당신의 비구의 모습을 되찾으십시오.’ 장로는 그 용의 모습을 버리고 용왕의 오른쪽 귓구멍으로 들어가서 왼쪽 귓구멍으로 나오고, 왼쪽 귓구멍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귓구멍으로 나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른쪽 콧구멍으로 들어가서 왼쪽 콧구멍으로 나오고, 왼쪽 콧구멍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콧구멍으로 나왔다. 그 다음에 용왕이 입을 열었다. 장로는 입으로 들어가서 뱃속에서 동쪽 서쪽으로 경행했다.

 

세존께서는 ‘목갈라니여, 목갈라나여, 조심하라. 이 용왕은 큰 신통을 가졌다’라고 말씀 하였다. 장로는 ‘세존이시여, 저는 네 가지 성취수단(如意足)을 닦고, 많이 공부 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닦습니다. 세존이시여, 난도빠난다 뿐만 아니라 난도빠난다 같은 용왕 백, , 백 천도 길들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용왕은 생각했다. ‘들어갈 때는 내가 보지를 못했다. 이제 나올 때에는 그를 이빨 사이에 넣고 씹어 물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스님이시여, 밖으로 나오세요. 배 안에서 위 아래로 경행하면서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했다. 장로는 나와서 밖에 서 있었다. 용왕은 ‘이사람이구나’라고 보자마자 코로 질풍을 날렸다. 장로는 제4선에 들었다. 그 바람은 장로의 몸 털 하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나머지 비구들도 그 때 장로가 나투었던 신통을 처음부터 모두 나툴 수 있었지만 이 코로 질풍을 날리는 곳에 이르러서는 이처럼 빨리 알아차린 뒤 입정할 수 없다고 아시고 세존께서 그들에게 용왕을 길들이는 것을 승낙치 않으셨다고 한다.

 

용왕은 ‘내가 콧속의 질풍으로 이 사문의 몸털 하나도 움직일 수 없구나. 이 사문은 큰 신통을 가진 자로구나.’라고 생각했다. 장로는 그 몸을 버리고 금시조로 변하여 금시조의 질풍을 보이면서 용왕을 쫗아갔다. 용왕은 그 몸을 버리고 동자의 모습으로 변하여 ‘존자시여, 당신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장로의 발에 절을 올렸다. 장로는 ‘난다여, 스승님이 오셨다. 이리 오너라. 가서 뵙자’하면서 용왕을 항복시키고 독이 없게 만든 뒤 세존의 곁으로 데리고 갔다.

 

용왕은 세존께 절을 올리고 ‘세존이시여, 당신께 귀의합니다.’라고 했다. 세존께서는 ‘용왕이여, 행복해라’고 말씀하시고는 비구 대중에 싸여 아나타삔디까의 집으로 가셨다. 아나타삔디까는 ‘세존이시여, 무슨 일로 늦게 오셨습니까?’라고 여쭈었다. ‘목갈라나와 난도빠난다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네.’ ‘세존이시여, 누가 이기고, 누가 졌습니까?’ ‘목갈라나가 이기고 난도빠난다가 졌다네.’ 아나타삔디까는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7일 동안 빠짐없이 제가 공양을 올리는 것과, 7일 동안 장로를 공경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요’라고 말씀드린 뒤 7일 동안 부처님을 위시한 500명의 비구들에게 큰 경의를 표했다.

(Vism.17.106-116, 청정도론, 12장 신통변화)

 

 

목갈라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부처님의 상수제자이다. 목갈라나 존자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신통제일로 잘 알려져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신통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iddhimantāna agga)’라고 표현되어 있다. 신통제일 목갈라나 존자가 난도빠난다 용왕의 신통에 맞서 신통으로 제압한 것이다. 후대에 이를 게송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자야망갈라가타 7번 게송이다.

 

자야망갈라가타 7번 게송은 간교한 난도빠난다 용이 비록 영험하지만 제자인 장로 목갈라나를 통해서 성자들의 제왕은 신통변화를 섭수하셨으니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 임하소서.”라고 표현 되어 있다. 난도빠난다 용왕 길들인 이야기는 부처님의 위대한 여덟 가지 승리 중의 하나에 속한다.

 

미얀마의 스카이라인을 보면

 

난도빠난다 용왕이야기를 보면 부처님이 오백명의 빅쿠들과 함께 삽심삼천에 가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것도 용왕의 궁전을 하늘길로 가로 질러 가는 것이다. 삼십삼천에도 궁전이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베자얀따(vejayanta)궁전아라 한다. 삭까천신의 궁전이다. 삭까는 삼십삼천의 우두머리로서 신들의 제왕으로 인드라신 또는 제석천이라 한다.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7)을 보면 베자얀따 궁전에 대한 아름다움이 묘사 되어 있다.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목갈라나 존자에게 존자 목갈라나여, 이 베자얀따 궁전의 아름다움을 보십시오.”(M37)라며 말했다. 하늘나라에서 이 보다 아름다운 궁전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 베자얀따 궁전에는 백개의 첨탑이 있고, 하나 하나의 첨탑에는 칠백 개씩의 누각이 있고, 하나하나의 누각에는 일곱선녀가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선녀에게는 일곱 하녀가 있습니다.” (M37)라고 묘사 되어 있다. 미얀마의 사원을 보면 경전속에 등장하는 베자얀따 궁전이 연상된다. 그것은 첨탑과 누각이라는 말 때문이다.

 

 


 

미얀마의 사원은 첨탑과 누각을 특징으로 한다. 쉐다곤파고다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미얀마의 스카이라인을 보면 첨탑은 어디에서나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교회 첨탑처럼 사방 어디서나 보이는 것과 같다. 백개의 첨탑과 칠백개의 누각을 가진 삼십삼천 천상이 떠 오른다.

 

응아타지 사원 창가에 서니 멀리 차욱타지 사원이 보인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첨탑이 곳곳에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붉은 색 지붕을 가진 누각의 누각 모서리는 살짝 들려져 있다. 마치 한국 절의 팔작지붕 처마를 연상케 한다. 양곤의 스카이라인을 보면 백개의 첨탑과 칠백개의 누각을 가진 천상의 베자얀따 궁전이 연상된다. 나만 그런 것일까?

 

 

2019-02-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