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약자의 고통을 외면말자, 정평불 5월 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9. 5. 19. 18:17

 

약자의 고통을 외면말자, 정평불 5월 법회

 

 

사람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갖가지 모임이나 단체가 있지만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다 못해 먹는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 모임이 끝나면 식사하는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참석한다.

 

2019 5월 정평법회가 우리함께빌딩 6층에 있는 우리는선우법당에서 열렸다. 5 18일 열린 법회에서 정평불 이도흠 상임대표가 법문했다. 그러나 참석률은 낮았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은 날씨도 좋아 놀러 가기에 딱 좋은 계절이고 또한 각종 모임이 많아서일 것이다. 더구나 토요일의 경우 각종 모임이 몰려 있어서 더욱더 참석자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일부로 시간 내서 오시는 분들이 있다. 이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약자는 인내할 수밖에 없는데

 

5월 법문 주제는 사회적 고와 깨달음의 사회화에 대한 것이다. 법사 이도흠 선생은 네 페이지로 요약된 자료를 준비했다. 그러나 법문할 때는 보고 하지 않았다. 모두 암기한 상태에서 법문에 임한 것이다. 또한 이번 달 법문부터는 영상자료를 남기기로 했다. 비록 스마트폰이기는 하지만 유튜브에 올릴 동영상을 제작했다.

 




법문을 듣고 작은 노트에 받아 적었다. 가장 마지막 부분에 모든 것이 요약되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약자의 고통에 대한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이달의 법문 주제인 사회적 고와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법문주제와 가장 맞아 떨어지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약자들은 항상 인내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을의 위치에 있는 자는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만일 약자가 자기 주장을 한다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약자들은 단체를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 노동조합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강자에게는 힘이 있다. 힘 있는 자는 힘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힘이 정의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이다. 5공시절이 대표적이다. 그때 정부구호는 정의사회구현이었다. 여기서 정의는 다름 아닌 힘에 의한 정의였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한다. 말로 안되니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것이다. 조폭들이 그렇다. 조폭에게 있어서 정의는 곧 주먹이었다. 권위주의 정권 역시 정의는 주먹과 같았다. 그래서 강력한 처벌로 누르고 억압하고 다스리고자 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임계점에 이르면 폭발하기 때문이다.

 

2016년 광화문 촛불이 있었다. 전국민이 들고 일어났다. 임계점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폭발하려면 응축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요인으로는 세월호 사건을 들 수 있다. 이전에도 크고 작은 사건이 있었다. 힘이 쌓이고 쌓여서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폭발한 것이다.

 

광화문촛불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그렇다. 80년대 6.10 항쟁도 그렇고, 더 오래 전에 4.19혁명도 그랬다. 응축된 힘이 자극받았을 때 분출한 것이다. 그래서 거대한 분노의 물결이 정권을 집어 삼켰다.

 

정의롭지 못한 지도자가 출현하면

 

강자가 인내해야 한다. 약자에게 인내를 강요하면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다. 정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강자가 인내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S11.4)

 

 

약자는 늘 인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힘없는 자에게 인내를 강요하면 가혹한 세상이 된다.

 

강자가 힘을 행사하려 하면 모든 것이 뒤틀려지게 된다.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은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왕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왕자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되고, 왕자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사제들과 장자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되고, 사제들과 장자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도시와 지방의 백성들도 정의롭지 못하게 된다. (A4.70)라고 했다.

 

최고 지도자가 정의롭지 못하면 나라 전체가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 된다. 가장 힘 없는 백성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에 따르면 “도시와 지방의 백성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 해와 달도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A4.70)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세상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었을 때 축생의 세계와 다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질서가 무너진 것과 같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우주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고 한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었을 때 우주의 운행질서 마저 뒤틀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경에 따르면 계절과 년도가 바르게 돌지 못하면, 바람이 바르게 불지 못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불면, 신들이 분노하게 된다. 신들이 분노하면, 비가 바르게 내리지 않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바르게 익지 않은 곡식들을 인간이 먹으면, 수명이 짧아지고, 용모가 추하고 힘이 쇠하고 질병이 많게 된다. (A4.70)라고 했다.

 

정의롭지 못한 지도자가 출현하면 재앙이 일어난다. 오로지 힘으로만 억누르려 했을 때 심하게 뒤틀려서 파국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힘있는 자가 인내하는 것이다. 약자는 항상 인내 하기 때문에 힘 있는 강자가 인내 했을 때 정의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상호조건자(inter-conditionder), 상호생성자(inter-becoming), 상호의지자(inter-depender)

 

약자의 고통을 아는 것이 사회적 고를 이해하고 깨달음의 사회화로 가는 길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도흠 선생은 법문에서 연기법을 재해석 해야 된다고 말했다. 연기법을 확장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인터비커밍(inter-becoming)으로 설명했다. 상호생성자를 말한다.

 

연기는 조건발생하는 것에 기반한다. 이를 사회로 확장하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님을 말한다. 숨을 예로 든다면 서로 공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숨을 내쉴 때 빨강물감을 탄다면 오래지 않아 이 세상은 빨갛게 변할 것이다. 결코 나홀로 사는 세상이 아니다.

 

자연인이 산속에 숨어 산다고 하지만 결코 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공기를 공유하고 있다면 공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생의 대상은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축생은 물론 미생물도 대상이 된다. 호흡할 때 마다 수 많은 미생물이 내 몸안에서 들어오고 나간다. 고기를 먹을 때 축생들을 먹는 것과 같다. 다른 생명을 먹어서 내 몸이 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공유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인간은 연기적 존재이다. 호흡을 할 때에도 음식을 먹을 때에도 연기적 존재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조건자(inter-conditionder)이고, 상호생성자(inter-becoming)이고, 상호의지자(inter-depender)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약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자비의 분노를

 

사회적 약자는 이 세상 살아 가기가 쉽지 않다.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 이 세상 살아 가는 것이 고통이듯이, 가진 것이 없는 사회적 약자는 이 세상 살아 가는 것이 고달프다. 특히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구조적 폭력이다.

 

약자는 돈이 없다. 돈이 없어서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기 힘들다. 중병이 걸려 병원에 갖는데 돈이 없어서 거절 당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다름 아닌 폭력이다. 병원이 구조적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폭력은 병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곳곳에 구조적 폭력이 행사되고 있다.

 

약자는 보호 되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 역시 보호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약자가억압받는다면 분노해야 한다.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정의로운 분노가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이도흠 선생은 자비로운 분노로 설명한다.

 

자비로운 것과 분노는 정반대이다. 그럼에도 자비로운 분노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약자의 고통에 대하여 모른 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자가 나타났을 때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분노를 하되 자비로운 방법으로 표출해야 한다. 그것이 때로 폭력적일 수도 있다. 티벳대장경에서 보는 대비선장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티벳장경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경이 하나 있다. 그것은 대방편경에 있는 대비선장 이야기가 그것이다. 선장은 5백명이 탄 배에서 499명을 살리기 위해 악한 자 한명을 죽이고자 했다. 한명을 죽여서 499명을 구한다면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달라이라마는 중생에 대한 자비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약자는 늘 인내할 수밖에 없다. 구조적 모순임에도 인내를 강요한다면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힘을 가진 강자가 인내해야 한다. 그럼에도 변화를 두려워하여 계속 힘으로 억압하려 한다면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때는 분노해야 한다.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자비의 분노를 내야 한다.

 

최상자가 정의로우면

 

법문이 끝나고 눈부처 바라보기 시간을 가졌다.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한마디씩 했다. 일종의 3분 스피치라 볼 수 있다. 어느 선생이 고통이 있는 곳에 깨달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불완전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은 연기적으로 얽혀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축생, 심지어 미물 들도 함께 사는 세상이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사회적 약자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사회적 고통이 따른다. 사회가 완전하다면 약자의 고통도 없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는 보호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힘 있는 자가 인내해야 한다. 강자가 인내하면 세상이 달라진다. 최상자가 정의로우면 정의로운 세상이 된다.

 

 

소들이 강을 건너는데,

우두머리 황소가 바로 가면,

지도자가 바른 길을 가기 때문에

모두가 바른 길을 따르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라.

최상자라고 여겨지는 자가

정의로우면,

그 백성들이야 말해 무엇하리.

왕이 정의로우면,

왕국 전체가 행복을 누리리.”(A4.70)

 

 

2019-05-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