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수다원이 되는 네 가지 조건,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6

담마다사 이병욱 2019. 7. 19. 22:23

 

수다원이 되는 네 가지 조건,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6

 

 

2일차 2019 7 3일 저녁, 우 에인다까 사야도 저녁법문

 

사람들이 수행처에 모였다. 5 6일 동안 집중수행 하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에도 좌선을 여러 차례 한다. 행선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알아차림 수행한다. 특히 행선의 경우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행선을 하면 느릿느릿 학처럼 춤추듯이 걷는 행위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는 도저히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화끈하게 108배나 천배, 삼천배를 한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수행처에 들어와 재미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수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빠사나 수행 하는 궁극적 목적은

 

직지사템플스테이 위빠사나 집중수행 2일차 저녁에 사야도 법문이 있었다. 새벽법문에 이어 두 번째이다. 아마 56일 일정이기 때문에 압축법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10일 일정이라면 하루에 한번 법문 할 것이다. 그런데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번씩 수행점검이 있기 때문에 하루에 총 네 번 사야도를 접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행운이고 복받았다고 볼 수 있다.

 




사야도 법문은 전에 볼 수 없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법문이다. 왜 그럴까? 한국불교에서는 열반을 좀처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보살행을 강조한다. 특히 선불교 전통에서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 하여 열반에 대하여 번뇌와 같은 것이라 본다. 그러다 보니 열반에 이르는 수행법을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런데 미얀마 사야도들은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열반에 이르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한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열반에 들어 삼계윤회를 벗어나는 것이다. 열반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집중수행하는 목적은 열반에 이르기 위함이다. 그런데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위빠사나지혜의 단계로 설명한다. 모두 16단계가 있다.

 

위빠사나지혜가 높아질수록 열반에 이르는 길은 빨라진다. 그러나 열반의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지금 이대로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존재의 끝이라고 보는 열반의 길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쩌면 삼계윤회의 길을 더 바라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겪는다면 존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것이다. 행복할 때는 지금 이대로가 좋지만 괴로울 때는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사성제는 철저하게 괴로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에 이르기 위함이다. 그런데 열반은 단계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이다. 그 첫단계가 수다원이다. 수다원이 되면 아무리 느려도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삼계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사야도는 저녁에 수다원이 되는 조건에 대하여 법문했다.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사야도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한부류는 범부이고 또 한부류는 성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범부중생과 성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보고 듣고 대상과 부딪칠 때마다 사띠가 없으면 범부중생입니다.”라고 했다.

 

대상을 볼 때 알아차림 하면 번뇌가 없다. 그런데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면 탐욕이 일어나고, 싫어하면 분노가 일어난다. 어리석음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래서 볼 때 마다 번뇌가 일어나는 사람에 대하여 범부중생이라고 했다.

 

성인은 볼 때는 보임뿐이고, 들릴 때는 들림뿐이다. 늘 알아차림 하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야도는 , , 치 번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범부는 삼계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날 기약도 없다. 보장해 주는 사람도 없다. 공덕을 지어서 좋은 세계에 태어난다. 누리고 나면 낮은 세계에 태어나 고생한다. 생을 마칠 때 사악도에 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다원이 되면 절대로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일곱생을 넘지 않아서 삼계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사야도는 말했다.

 

수다원이 되는 조건은 네 가지

 

사야도는 원음을 낭송했다. 원고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기억에 의존하여 빠알리 원문을 낭송한 것이다. 그것은 법문 주제인 수다원이 되는 조건과 관계 있는 경이다. 부처님이 질문했을 때 사리뿟따가 읊은 것을 사야도가 낭송한 것이다. 이렇게 원음을 읊고 나자 혜송스님은 싸두, 싸두, 싸두했다. 대중들도 따라서 싸두, 싸두, 싸두했다. 그렇다면 원음은 어떤 것일까?

 

수다원이 되는 조건은 네 가지이다. 사야도가 말한 것을 보면 1)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하고, 2)훌륭한 법문을 들어야 하고, 4)정확한 수행방법을 실천수행해야 하고, 4)여래가 설한 수행법 그대로여야 한다라고 이렇게 네 가지를 말했다. 그래서 원문을 찾아 보기로 했다.

 

사리뿟따와 수다원 조건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다. 상윳따니까야 사리뿟따의 경2’(S55.5)에서 사야도가 읊은 게송을 찾을 수 있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appurisasasevohi bhante, sotāpattiyaga, saddhammasavana sotāpattiyaga, yonisomanasikāro sotāpattiyaga, dhammānudhammapaipatti sotāpattiyaganti.

 

세존이시여, 참사람과 사귀는 것이 흐름의 듦의 고리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흐름의 듦의 고리입니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이 흐름의 듦의 고리입니다.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이 흐름의 듦의 고리입니다.”(S55.5)

 

 





참사람과 사귀는 것(Sappurisasasevohi),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는 것 (saddhammasavana),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yonisomanasikāro), 그리고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dhammānudhammapaipatti) 이렇게 네 가지가 수다원이 되는 조건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참사람은 스승을 의미하고, 올바른 가르침(正法)은 스승으로부터 설법이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은 가슴에 오롯이 간직하고 실천수행하는 것을 말하고,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은 도과를 성취하도록 실천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수다원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보시, 지계, 수행공덕 짓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신구의 삼업이 청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야도는 위빠사나 수행지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을 스승이라고 하는데 사띠빳타나 위빠사나 수행지도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사야도는 부족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우빠띳싸와 꼴리따의 스승이었던 산자야 벨랏뿟따를 들었다. 우빠띳싸와 꼴리따는 부처님을 만나기전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말한다. 우빠띳싸와 꼴리따는 회의론자였던 산자야 밑에 있었기 때문에 한 개의 도와 과도 성취하지 못했다.

 

사야도는 스승의 중요성을 말했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미얀마어로 뚜도까웅탕 친깟양 으흐만 띤ㅎ라띠라고 읊었다. 대중들도 따라서 합송했다. 이 말은 훌륭한 이를 의지하여 함께 살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그 의미를 더욱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혜송스님이 두 번 읊었다. 이에 대중들은 두 번 따라 합송했다.

 




훌륭한 법문을 들어야

 

수다원이 되는 두 번째 조건은 훌륭한 법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 서 설하신 법문은 많이 있다. 보시, 지계, 사마타, 위빠사나에 대한 법문이다. 그런데 보시, 지계, 사마타 법문만으로는 수다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띠빳타나 위빠사나를 설할 수 있는 스승으로부터 법문을 들어야 수다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한 게송으로 뚜도땃야- 호뿟냐- -짜띤랏띠라고 합송했다. 이 말은 그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설법을 들어야 한다.”라는 말이다.

 

실천수행해야

 

수다원이 되는 세 번째 조건은 실천수행하는 것이다.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확한 방법으로 실천수행해야 한다.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을 가기 때문이다. 정확한 법문을 듣고 정확한 방법으로 실천수행하는 것이다. 의심이 나면 언제든지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심을 풀어야 수행이 탄력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확한 수행일까?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신-물질 현상을 잘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불선법이 생겨나면 반드시 몸으로 돌아 오라고 했다. , , 치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안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바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몸으로, 느낌으로, 마음으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겉모양은 무시하라고 했다. 실제 성품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 세상은 겉모양일 뿐이라고 했다, 행선할 때 오른발, 왼발 하며 걷지만 처음에는 발생각 하는데 이것이 겉모양이라고 했다. 그런데 행선하다 보면 집중력이 생겼을 때 어느 순간 들릴 때 가벼움을 느끼고, 내릴 때 무거움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성품이라고 한다.

 

겉모양은 남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하는 성품은 남에게 보여 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지나 것은 생각하지도 말고 아직 오지 않은 것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오직 현재 이 순간만을 보라고 했다. 찰라찰라 변하는 실제성품을 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게송이 생각났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31)

 



 

사띠빳타나 위빠사나 수행법 그대로여야

 

수다원이 되는 네 번째 조건은 부처님이 설한 사띠빳타나 위빠사나 수행법 그대로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네 가지 방법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사념처를 말한다.

 

몸관찰에 대하여 까야누빠싸나 싸띠빳타나(kāyānupassanā - satipaṭṭhāna)라고 한다. 몸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대하여 주의하여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몸관찰하여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아난존자의 예를 들었다.

 

느낌관찰에 대하여 웨다나누빠싸나 싸띠빳타나(vedanānupassanā - satipaṭṭhāna)라고 한다. 몸에서 일어나는 쑤심, 저림, 가려움, 결림, 무거움, 상쾌함 등 좋고, 나쁘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가지가지 느낌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쁘띠갓따띳사(Putigattatissa) 존자의 예를 들었다. 존자는 병이 들었을 때 느낌관찰을 하여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관찰에 대하여 찌따누빠싸나 싸띠빳타나(cittānupassanā - satipaṭṭhāna)라고 한다. , 진, 치가 일어나는 즉시 바로바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족족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상가락키따 장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장로는 사띠하는 방법을 몰라서 망상으로 소설을 쓴다고 했다.

 

망상으로 소설을 쓴 상가락키따 장로 이야기

 

상가락키따 장로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법구경 37번 게송 인연담에 장로의 망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장로 쌍가락키따와 관련된 이야기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300-304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에 계실 때, 조카인 장로 쌍가락키따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싸밧티 시의 한 가문의 젊은이 쌍가락키따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해서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그는 장로 쌍가락키따라고 불렸다. 그의 여동생이 아이를 낳았는데, 오빠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므로 그 아이는 조카 쌍가락키따라고 불렸다.

 

그도 나이가 들자 장로 밑의 승단으로 출가했다. 그래서 구족계를 받고 우기를 보내기 위해 한 마을의 승원에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재가신도로부터 가사 두 벌을 보시받았다. 그는 우기의 안거가 끝나자 한 벌을 친교사인 외삼촌에게 주려고 외삼촌이 있는 승원을 찾아갔다. 그는 승원에 들어서면서 장로의 대낮의 주처를 청소하고 발 씻을 물을 준비하고 자리를 마련하고 장로가 오는 길을 바라보았다.

 

 장로가 다가오자 그는 발우와 가사를 받아들고 “존자여, 여기 앉으십시오.”

라고 자리에 앉게 하고 종려나무로 만든 부채로 부채질을 해 주고 마실 물을 드리고 발을 씻겨 드렸다. 그리고는 가사 한 벌을 가져와서 장로의 두 발 앞에 놓고 존자여, 이 가사를 입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로는 조카에게 쌍가락키따여, 나에게는 완전한 가사가 있다. 그것은 그대가 입으라,”라고 말했다. “존자여, 저는 이 가사를 받는 순간부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사용하십시오.” “쌍가락키따여, 상관 없다. 나의 가사는 완벽하다. 그대가 착용하라.” “존자여, 거절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가사를 입으면, 제게 큰 공덕이 될 것입니다.”젊은 수행승이 여러 번 요청하였으나 장로가 매번 가사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젊은 수행승은 장로에게 부채를 부쳐주면서 장로가 재가자였을 때에 나는 그의 조카였다. 그가 수행승이 된 다음부터, 나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친교사로써 나의 재물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나의 재물을 함께 나누려하지 않는다면, 내가 더 이상 수행승으로 남아 있을 필요가 있는가? 나는 다시 재가자가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에게

재가자의 생활은 산다는 것도 어렵다. 내가 다시 가장이 된다면,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 것인가?’라는 생각이 닥쳤다.

 

그는 마침내 가사를 시장에 내다팔면 암염소 한 마리는 살 수 있을 것이고, 암염소가 새끼를 낳으면, 새끼를 키워 팔아 여러 마리의 암염소를 살 수 있고 많은 염소를 키워 부자가 되면 결혼해서 아내를 맞이하고, 아내와 함께 외삼촌을 찾아갈 것이고, 아마도 서로 아이를 안으려 하다가 아내가 아이를 품에서 놓쳐 수레에 깔리고 그렇게 해서 내가 아내에게 아이를 내게 주지 않고 감당할 수 없으면서 아이를 맡다니. 네가 나를 망쳤구나.’라고 말하며 그녀를 몽둥이로 때릴 것이라고 망상을 하다가 들고 있던 부채로 장로의 머리를 내리쳤다.

 

 장로는 쌍가락키따가 왜 내 머리를 때렸을까?’라고 생각하고는 곧바로 조카의 마음에서 일어난 모든 생각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쌍가락키따여, 너는 여인을 때리지 못하고 이 연로한 장로에게 화풀이를 하는가?”라고 말했다. 젊은 수행승은 . 나는 망했다. 친교사께서 내가 생각한 것마다 모두 알아챘다. 더 이상 수행자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생각하고 종려나무 부채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사미들이 그를 쫒아가서 붙잡아 부처님에게 데려왔다. 그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멀리 있는 대상도 받아들여 생겨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해탈하도록 정진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이어서 멀리 미치고 홀로 움직이고 신체가 없이 동굴에 숨어 있는, 마음을 제어하는 님들은 악마의 밧줄에서 벗어나리라.”(Dhp.37)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조카 장로 쌍가락키따는 흐름에 든 님이 되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장로 쌍가락키따와 관련된 이야기, 전재성역 법구경 311-312)

 

 

인연담을 보면 상가락끼따는 망상을 피웠음을 알 수 있다. 망상의 집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사띠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즉시 알아차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림 하지 못했을 때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마음관찰하나만 제대로 해도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성품이 생멸하는 것을 보면

 

법관찰에 대하여 담마누빠싸나 싸띠빳타나(dhammānupassanā - satipaṭṭhāna)라고 한다. 실제성품을 보아 버리면 법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앞의 세 가지 즉,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하는 것 세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 법관찰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품이 생멸하는 것을 보는 것이 법관찰이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들릴 때는 들림이라고 알아차림 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소리의 파장으로 생멸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야도는 바히야 존자의 예를 들었다. 사야도에 따르면, 부처님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Ud.6)라고 설할 때 바히야 존자는 들림을 사띠하기 시작하여 도와 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법관찰을 제대로 하면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자비관 게송으로 마무리를

 

사야도는 수다원이 되는 네 가지 조건을 설했다. 핵심은 사띠빳타나 위빠사나이다. , , , 법 네 가지를 잘 닦으면 수다원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수다원이 되고 나서 역시 네 가지를 잘 닦으면 사다함이 되고, 아나함이 되고 아라한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야도는 법문을 마무리 하고 축원해 주었다. 사야도는 축원문에서 이 고귀한공덕 인연으로 심신이 평화롭고 번뇌없는 열반을 장애없이 성취하세요라고 축원했다. 또 오늘 지은 보시, 지계, 수행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했다. 그래서 오늘 지금 모든 공덕을 부모님, 스승님, 권속, 이웃과 자신을 보호해주는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라고 했다. 마무리로서 자비관 게송을 합송했다.

 



 

“아얏새 미앳나네 아-ㄹ롱도 땃뜨와 두위

베이양 낀짯바-

쌔이싱예 낀짯바-

꼬싱예 낀짯바-

꼬 쎄이 ㅎ넛피아 찬-다 스와핑

밋밋도 칸다 윙고 유엣사웅 나잉짜 바-세”

 

“사방에 있는 모든 생명들

위험과 해악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마음의 근심이 사라져서 행복하기를!

몸의 고통이 사라져서 행복하기를!

몸과 마음이 모두 평화롭게

자신의 업을 잘 실어 나를 수 있기를!

 

 

2019-07-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