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열반의 행복에 대하여,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8

담마다사 이병욱 2019. 7. 23. 22:22

 

열반의 행복에 대하여,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8

 

 

3일차 2019 7 4일 오전, 우 에인다까 사야도 인터뷰지도

 

어느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수행자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그대 수행자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드십시오고 말했다. 일 하지 않는 자에게는 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라고 말했다. 숫따니빠따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Sn1.4)에 있는 가르침이다.

 

마음의 밭을 가는 수행자

 

선가에서는 일일부작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이라 하여 “하루 동안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식사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외부 지원 없이 고립되어 살아 가는 선가에서는 노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탁발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일체 노동을 할 수 없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은 일하지 않고 얻어 먹는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밥을 얻어 먹으려거든 일을 하라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마음의 밭을 가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바라문은 수행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Stn77)라고 말했다.

 

선원에서는 일을 하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 잘 때까지 오로지 좌선과 행선, 그리고 일상싸띠만 한다. 마음의 밭을 가는 것이다. 도구는 무엇일까? 부처님이 말씀하신대로 지혜가 멍에와 쟁기라고 했다. 또 싸띠(새김)가 쟁기날과 몰이막대라고 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도구는 싸띠일 것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싸띠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싸띠로 마음 밭을 가는 것이다.

 

오늘 가는 사람 먼저 나오세요.”

 

일을 하면 보상이 따른다. 일을 잘 하면 칭찬받지만 일을 못하면 야단 맞는다. 마음의 밭을 가는 수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른바 인터뷰라 불리우는 수행점검을 통하여 얼마나 마음의 밭을 갈았는지 평가 받는 것이다. 2019 7 4일 오전과 오후에 두 차례 수행점검 시간이 있었다.

 

오전 인터뷰는 9시부터 약 1시간 20분 가량 진행되었다. 집중수행 세 번째 인터뷰시간이다. 만덕전 명상홀에 수행자들이 모였다. 남이 인터뷰하는 것을 듣는 것도 수행과정 중의 하나이다. 보면서 배우는 것이다. 혜송스님은 먼저 오늘 가는 사람 먼저 나오세요.”라고 말했다. 23일 일정을 마치고 먼저 가는 수행자들을 말한다.

 

 



인터뷰할 수행자들이 앞으로 나왔다. 집중수행한지 3일차 밖에 되지 않았지만 수행과정에서 몸의 변화나 느낌에 대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아무런 수행 진척이 없어도 보고할 수 있다. 수행이 잘 안된다고 하는 것도 보고가 되기 때문이다.

 

몸의 변화에 대하여 오롯이 세밀하게 관찰해야

 

수행자 A가 보고 했다. 숨이 잘 안잡힌다고 했다. 호흡과 관련된 복부의 움직임에 대한 것이다. 이에 사야도는 숨쉬기 어려운 것은 고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행선이 잘 안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아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몸과 마음은 무상, , 무아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혜가 생겨야 무상, , 무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의 변화에 대하여 오롯이 세밀하게 관찰하라고 말했다.

 

수행자 B가 보고했다. 아토피에 대하여 질문했다. 이에 사야도는 가려움을 참고 견디면 집중력이 생겨나서 생멸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렵다고 긁지 말라는 것이다. 관찰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혜송스님은 발가락 열개가 터지는 것을 관찰하여 이겨냈다고 말했다. 아픈 곳을 관찰하면 해결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야도는 이 수행 만난 것은 복이 많은 겁니다.”라고 말했다.

 

수행자 C는 행선에 대하여 보고했다. 이에 사야도는 행선이 얼마나 좋은 수행인지 알 것 이라고 말하면서 행선이 좌선보다 빠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행선함으로 인하여 실제 성품을 더 잘 볼 수 있음을 말한다.

 

마음 다스리는 것은 싸띠 말고 없습니다.”

 

수행자 D는 번뇌가 끊이지 않게 일어난다고 하소연했다. 사야도는 마음만큼 일 많이 하는 것 없음을 말하고 마음은 피곤해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싸띠하면 번뇌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했다.

 

사야도는 마음에 대하여 원숭이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제멋대로 일어나고 설치고 돌아다니는 마음에 대하여 원숭이 보다 더 하다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S12.61)라고 말했다.

 

마음은 제멋대로 일어났다가 제멋대로 살아진다. 원숭이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가는 것과 같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한다.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고,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마음은 제멋대로이고, 마음은 무엇보다 불선하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해야 제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마음 다스리는 것은 싸띠 말고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싸띠 말고 나의 의지대로 되는 것은 없음을 말한다.

 




원인을 찾지 마십시오.”

 

수행자 E는 몸이 아픈 것에 대하여 물었다. 이에 대하여 원인을 찾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미 결과로서 나타난 것에 대하여 바꿀 수 없음을 말한다. 그대신 아픈 부위를 잘 관찰하라고 했다. 사야도는 몸이 있기 때문에 병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서는 병이 나면 원인을 찾아 치료 하려고 하지만, 선원에서는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법치료라고 했다.

 

인터뷰시간에는 몸의 변화나 느낌 등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만 질문해야 한다. 그럼에도 개인사에 대한 질문도 종종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사야도는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현재 성당에 다니고 있는데 불교로 개종하고 싶다고 어느 수행자가 말하자 사야도는 수행하다 보면 바람직한 종교선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라고 말했다. 누군가 나는 카톨릭이다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가톨릭은 없다고 했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수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버려질 것이라는 말이다.

 

열반의 행복에 대하여

 

수행자 F는 해탈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했다. 이런 질문은 난감한 것이다. 개념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야도는 답변을 해 주었다. 사야도에 따르면 해탈은 열반과 같은 뜻이라고 했다. 질문자가 지켜 보는 자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마음이 있으면 열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사야도는 열반의 행복에 대하여 고요와 적정으로 설명했다. 마치 깊은 잠을 잘 때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숙면하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또 숙면하면 좋은 것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깨고 나면 매우 상쾌하다는 것이다. 열반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열반의 행복은 어떤 것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 열반의 행복에 대한 경’(A9.34)이 있다. 사야도에 따르면 열반은 깊은 숙면을 취하는 것과 같아서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의식(viññāa)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데 마음이 사라져 버렸으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에서는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Stn.1037)라고 했다. 여기서 그것이란 명색(nāmarūpa)을 말한다.

 

의식은 마음을 일컫는 또다른 말이다. 마음이 사라지면 마음부수도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존자 아지따는 부처님에게 존자여, 지혜, 새김(sati)과 더불어 명색(정신-신체적 과정)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Stn.1037)라고 물어 본 것이다. 의식이 사라짐에 따라 명색도 통째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열반이라고 볼 수 있다.

 

관찰하는 마음도 아는 마음도 모두 사라졌을 때 열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열반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마음이 없으니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열반에서 나오면 의식도 명색도 되살아 나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있으나 열반에 들어간 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왜 열반이 행복일까?

 

앙굿따라니까야 열반의 행복에 대한 경에 따르면 사리뿟따는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하고 다녔다. 마음도 명색도 사라진 열반상태는 알 수 없는 것임에도 왜 사리뿟따는 열반을 행복이라고 했을까? 이에 우다인은 벗이여 싸리뿟따여,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느낌이 없는데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A9.34)라며 물었다. 이런 물음은 당연한 것이다. 열반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상수멸정 상태에서는 느낌과 지각이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열반이 행복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리뿟따가 열반이 행복이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사리뿟따는 우다인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열반이 행복인 이유에 대하여 설명했다. 사리뿟따는 벗이여, 바로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라고 말했다. 대단히 역설적인 말이다. 느낌과 지각이 소멸된 상태가 열반임에도 느낌이 없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했다.

 

사리뿟따는 왜 열반이 행복이라고 말했을까? 이어지는 경에 따르면, 사리뿟따는 오욕락에 따른 감각적 쾌락의 행복에서부터 네 가지 색계의 행복, 그리고 네 가지 무색계의 행복에 대하여 말하고서는 최종적으로 벗이여, 또한 수행승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이 소멸에 듭니다. 지혜로 보아, 그에게 모든 번뇌는 부서집니다. 벗이여, 이러한 이유로 실로 열반은 행복으로 지각될 수 있습니다.”(A9.34)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상수멸정을 설명한 것이다.

 

상수멸정은 느낌(: vedanā)과 지각(: saññā)이 완전히 소멸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느낌도 지각도 없다. 그래서 열반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리뿟따는 열반이 행복이라고 했다. 역설적으로 느낌 지각도 없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빠라마수카라 하여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했다.

 

열반에 들면 아무것도 느낄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열반에서 나오면 마치 숙면에서 깬 것과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적멸 체험은 수다원에서도 할 수 있는데 짧은 것이라고 했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길다고 했다. 그래서 사야도는 수다원과 아라한의 적멸은 짧고 긴 차이만 있을 뿐 똑 같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망상이 일어나는 즉시 주관찰 대상으로

 

수행자 G는 머리가 허옅게 센 여성수행자이다. 매일 집에서 좌선하는데 오륙개월 되었다고 한다. 몸과 통증이 분리 되었는데 몸이 사라짐을 느꼈다고 했다. 통증만 남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객관적으로 관찰 할 수 있음을 말하면서 정신과 물질이 분리 되는 것은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 해당됩니다.”라고 말했다.

 

수행자 H는 탐심에 대하여 질문했다. 탐심이 일어나서 끝까지 관찰했다고 말하자 아는 즉시 순발력 있게 호흡으로 돌아 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호흡이란 호흡과 관련된 복부의 움직임을 말한다. 이 말은 망상을 왜 보아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망상이 일어나는 즉시 주관찰 대상으로 순발력 있게 복귀해야 함을 말한다.

 

동통이 점차 심해져서

 

오전 인터뷰가 끝났다. 동통이 점차 심해져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을 감고 있으면 괜찮지만 사야도가 법문할 때나 인터뷰할 때 필기하면 집중으로 인하여 동통이 심해서 무척 괴로웠다. 점심식사후에 병원에 갔다. 임형범 선생 차를 이용하여 함께 김천시내에 있는 안과에 찾아 갔다.

 

안과에서 응급조치를 하고 약을 타왔다. 오른쪽 눈에 염증이 생겼다고 한다. 눈약을 주면서 주기적으로 넣어 주라고 했다. 동통이 생긴 것은 무리한 작업 탓이다. 집중수행 하루 전에 안구가 건조된 상태에서 납기를 맞추기 위하여 컴퓨터 작업 한 것이 화근이다. 여기에다 장문의 글을 썼으니 눈을 혹사한 것이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시간 지나면 낫는 병이다. 그래서 이삼일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흘이 되어도 차도가 없자 병원에 간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깨끗이 나았다. 병원에서 가서 처방을 받아서 나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나을 만해서 나았다고도 볼 수 있다.

 

 

 

2019-07-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