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처에서 말하는 팔정도란?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10
3일차 2019년 7월 4일 저녁, 우 에인다까 사야도 저녁법문
집중수행 후기를 쓰고 있다. 3일차임에도 10편째이다. 이렇게 후기 쓰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는 사람도 있다. 집중수행 기간 중에는 오로지 집중수행에 집중해야 함에도 노트를 한다는 것은 덜 집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 두고 싶은 말이나 법문이 있을 때 노트를 해두고 싶은 것은 본능에 가깝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지나가면 생각나지 않는다. 종종 기억 나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기 쉽다. 어렵게 휴가 내어 마련한 자리인데 그냥 흘러 보낼 순 없다. 그래서 사야도법문과 인터뷰에 대하여 노트했다. 노트하다 보니 한권을 다쓰고 부족해서 빌려서 쓰게 되었다.
하루를 빡세게 보내다 보면
집중수행 3일차 저녁법문시간이다. 매일 두 번 법문이 열린다. 수행기간이 5박6일로 짧아서일 것이다. 10 집중수행이라면 하루 한차례 법문 해도 될 것이다. 매일 새벽과 저녁에 법문을 하고, 오전과 오후 인터뷰를 하기 때문에 하루일정이 빡빡하다. 그렇다면 수행은 언제 하는가?
선원에서는 가진 것은 시간 밖에 없다. 법문듣고 인터뷰하고 밥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은 모두 자신의 것이다. 가진 것은 시간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에 좌선도 하고 경행도 한다. 그러다 보니 거의 하루종일 만덕전 명상홀에 있게 된다.
새벽 3시 30분에 숙소에서 나와 다시 숙소에 들어가면 저녁 10시가 된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아무생각 없이 곧바로 잠을 잔다. 잠을 잘 때는 송장처럼 움직이지 말고 자라고 했다. 하루를 빡세게 보내면 몸도 고단하기 때문에 잠도 잘 올 것이다.
사야도 축원문
직직사템플스테이 위빠사나 집중수행 3일차 2019년 7월 4일 저녁법문 시간이 되었다. 저녁 7시 가까이 되자 수행자들이 너른 만덕전 명상홀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저녁 7시가 되자 우 에인다까 사야도가 입장했다.
사야도는 정확한 시간에 입장한다. 먼저 오지도 않고 늦게 오지도 않는다. 정시에 입장하기 때문에 앉자 마자 곧바로 법회가 시작된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미리 앉아 있어야 한다. 나중에 입장하는 것은 실례가 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법회는 여법하게 진행된다. 법문을 하기 전에 먼저 “오까-땃, 오까-땃, 오까-땃”하며 미얀마식 빠알리어로 “예경함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세 번 요청한다. 이어서 수행자들은 신구의 삼업으로 지은 허물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며 예경함을 허락해 주기를 바란다. 이에 사야도는 축원해 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복덕, 공덕, 지혜와 계-정-혜 삼학이 일체 우주에서 가장 으뜸인 ‘부처님보배’!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어린 아들을 사랑하는 어버이의 대자비심으로 붓다께서 45년 동안 법을 설해 준 팔만사천 ‘담마보배’! 이 고귀한 법이 사라지지 않고, 오염되지 않도록 익히고 실천수행하여 보존하고 계승해 온 ‘상가보배’!
이러한 삼보공덕을 예경 찬탄하며 여러분이 아침, 점심, 나와깜마(보시금) 등을 공양한 보시공덕! 5계, 9계, 10계, …등을 받아서 잘 지닌 지계공덕! 따띳빠따낫 윗빳사낫을 실천 수행한 바왓나 공덕!
이 모든 공덕 인연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든 위험과 해악, 삼재팔란, 5종의 도적, 사백사병, 사견 등등 일체 장애가 연잎에 물이 묻지 않듯 영원히 소멸하기를 기원합니다.
언제나 안전하고, 평화롭고, 장수하고, 용모가 아름답고, 건강하고 행복하며, 출중한 에너지, 훌륭한 지혜를 성취하십시오.
여러분, 모두 따띳빳타낫 위빳사낫을 지성으로 실천수행하여 신심, 지계, 상식, 보시, 지혜, 두려움, 부끄러움(수다원 7종 공덕)이 더욱 성숙하여 번뇌 없고, 노병사가 없으며, 일체에 걸림 없는 대자유인의 경지, 최상의 행복 닙바나에 도달하는 특별하고 고귀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꽤 긴길이의 축원문이다.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미얀마어로 운율을 넣어 낭송하는 축원문을 듣고 있으면 축복받는 느낌이 된다. 이럴 때 표현은 ‘충만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눈물을 안흘릴 자신이 없으면 법문을 못한다고 했는데..”
저녁법문 주제는 팔정도에 대한 것이다. 팔정도를 닦아야 도와 과를 성취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부처님이 최후의 제자라 부르는 수밧다 존자에 대한 팔정도 법문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그날 부처님이 침상에 누워 법문한 것이라고 한다.
사야도는 법문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까지 과정에 대하여 설명했다. 부처님이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고 4아승지와 10만겁동안 십바라밀을 닦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부처님은 29세에 출가하여 6년 고행을 한후에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어 전법했다.열반에 든 그날까지 45년동안 쉬지 않고 법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은 80세가 되던 해 1월 달에 상가를 모이게 해서 세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라고 했다. 그때 아라한은 사띠를 하며 미동도 없었으나 범부들은 눈물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열반을 선언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연로하여 나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대들을 버리고 가니
나 자신을 피난처로 삼았네.
수행승들이여, 방일하지 말고
새김을 확립하고 계행을 잘 지켜라.
질 집중된 사유로
자신의 마음을 수호하라.
이 가르침과 계율을
방일하지 않고 닦는 자는
태어남의 윤회를 버리고
괴로움을 종식하리.”(D16.95)
사야도는 빠알리어로 게송을 읊었다. 사야도 게송이 끝나자 혜송스님은 합장하며 “싸두, 싸두, 싸두”했다. 수행자들도 따라서 “싸두, 싸두, 싸두”했다. 사야도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그대로 낭송한 것에 대한 예경의 표현이다.
사야도는 부처님의 최후공양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금세공사의 아들 쭌다가 부처님에게 ‘공양청’한 것이 마지막 공양이 된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 외에는 먹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돼지고기로 만들었다는 ‘숫까라맛다바’라는 음식인데 천인이 영양소를 너무 많이 넣은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쭌다의 공양을 받고 나서 남은 음식을 모두 구덩이에 파서 묻으라고 했다. 부처님은 부처님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이 요리를 소화시킨자를 보지 못했습니다.”(D16.100)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씀했을까? 그것은 부처님 혼자만 드신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다른 사람의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스스로 수용하고 남은 것을 수행승들에게도 사람들에게도 주지않고 구덩이에 버렸다.’고 들으면,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Smv.568)라고 표현해 놓았다.
부처님 최후의 하루는 눈물겹다. 부처님은 음식을 드신 뒤에 배탈이 났다. 출혈과 함께 설사를 한 것이다. 칼 끝으로 찌르는 듯 했다고 한다. 이런 고통을 바라밀의 힘으로 참아 냈지만 100억 마리 코끼리 힘이 빠져 나가는 듯 했다고 한다. 부처님은 열반지까지 무려 26번 쉬며 길을 걸어 갔다.
사야도가 부처님의 최후를 설명할 때 목이 매었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야도 말을 전하는 혜송스님도 목이 매여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혜송스님은 “눈물을 안흘릴 자신이 없으면 법문을 못한다고 했는데 눈물을 흘렸네요.”라며 말했다.
부처님 최후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을 읽다 보면 숙연해질 때가 있다. 특히 부처님이 열반에 드는 순간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이다. 그런데 눈물을 보일 정도라면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난존자가 그랬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하자 아난존자는 비탄해 했다. 이에 부처님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부처님이 오랫동안 바래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아난다를 격려 했다. 죽어 가는 자가 산 자에게 안심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경에 따르면 “아난다여, 그만두어라. 슬퍼하지 말하. 아난다여, 참으로 내가 미리 ‘모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들과 살아서 헤어지기 마련이고, 죽어서 이별하기 마련이고, 달라져 흩어지기 마련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생겨나고 생성되고 형성되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을 여래의 신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부서지지 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D16.114)라고 말했다. 어쩌면 사야도는 이 대목에서 목이 매였는지 모른다.
법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45년동안 설법했다. 그렇다면 최후의 설법은 어떤 것일까? 이는 부처님의 마지막 하루 동안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부처님이 외도수행자 수밧다에게 설한 팔정도법문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직전에 팔정도를 설했다. 외도 수행자가 간청해서 설한 것이다. 외도수행자 수밧다는 부처님이 열반에 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서둘렀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보려고 한 것은 나이가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나는 연로하여 고령이고 스승들의 스승인 유행자들이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참으로 드물게 세상에 출현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 밤의 후야에 수행자 고따마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실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진리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나는 수행자 고따마께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수행자 고따마께서 진리에 대한 의심을 제거하도록 내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 것이다.”(D16.119)
수밧다는 바라문 출신이다. 바라문 대부호 출신 유행자였다. 이 경에서와 같이 부처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수밧다가 부처님을 친견하려 한 것은 법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정말 도와 과를 이루어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아홉가지 출세간법에 대한 의심이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팔정도 수행이 없으면 번뇌를 다 소멸한 이가 없다.”
아난다는 수밧다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부처님이 너무 피곤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밧다는 한사코 부처님을 만나고자 했다. 이렇게 실갱이 하기를 세 차례 했다. 부처님은 이런 대화를 듣고 “아난다여, 그만해라. 쑤밧다를 막지 말라.”라고 말하면서 수밧다에게 팔정도 법문을 들려 주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쑤밧다여, 가르침과 계율에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없다면, 거기에는 수행자가 없고, 거기에는 두 번째 수행자도 없고, 거기에는 세 번째 수행자도 없고, 거기에는 네 번째 수행자도 없습니다. 쑤밧다여, 가르침과 계율에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있다면, 거기에는 수행자가 있고, 거기에는 두 번째 수행자도 있고, 거기에는 세 번째 수행자도 있고, 거기에는 네 번째 수행자도 있습니다. 쑤밧다여, 이 가르침과 계율에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있습니다. 쑤밧다여, 그러므로 여기에 는 수행자가 있고, 여기에는 두 번째 수행자도 있고, 거기에는 세 번째 수행자도 있고, 거기에는 네 번째 수행자도 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이론에는 수행자가 결여 되어 있습니다. 쑤밧다여, 수행승이 올바로 지낸다면, 세상에는 거룩한 님이 결여되어 있지 않습니다.”(D16.120)
부처님은 팔정도가 없으면 수행자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수행자가 네 번 나오는데 이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팔정도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아홉 가지 출세간법, 즉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수밧다는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그래서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로 시작되는 귀의문을 말했다. 그리고부처님 교단에 출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외도의 경우 넉 달 동안 시험삼아 머물러야 한다. 넉 달이 지나 수행승들이 그에게 만족하면 출가를 허락하는 것이다. 이에 사야도는 “맥긴싯피어 멋싯야- 낏레따-녜인-뚜 멋신뻬-“라며 미얀마식 빠알리어를 두 번 낭송했다. 수행자들도 따라서 합송했다. 혜송스님이 의미를 더욱 더 분명히 하기 위해 두 번 낭송했다. 수행자들도 따라서 두 번 합송했다. 이 말은 “팔정도 수행이 없으면 번뇌를 다 소멸한 이가 없다.”라는 뜻이다.
수행처의 팔정도에 대하여
사야도는 팔정도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런데 한국불자들이 알고 있는 팔정도와 다르다. 경전에 있는 팔정도와 다른 것이다. 사야도는 ‘정견’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것, 통증이 강하거나 약한 것 등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정견이라고 했다. ‘정사유’에 대해서는 마음이 달아날 때 호흡이나 통증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관찰대상으로 순발력있게 복귀하는 것을 말한다.
수행처에서 정어와 정업, 정명은 경전의 가르침과 같다. 그러나 정정진에 대해서는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한 개도 놓치지 않고 사띠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념에 대해서는 현재 순간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아차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정에 대해서는 관찰대상에 대하여 몰입하여 집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팔정도 중에서 정어와 정업, 정명 세 가지는 선원에 살면 자동적으로 지켜 지는 것이다. 매일 새벽예불시간에 9계를 받기 때문에 9계대로 생활하면 세 가지는 자연스럽게 지켜진다. 그러나 나머지는 하기 나름이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선원에 살면 자동으로 계는 지켜진다. 그렇다고 선원에 산다고 하여 자동으로 도와 과가 성취되지 않는다. 팔정도 수행을 닦아야 한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팔정도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정견에 대하여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사유에 대하여 ‘욕망을 여읜 사유, 분노를 여윈 사유, 폭력을 여읜 사유’라고 말하지 않고 수행대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수행처에서의 팔정도에 설명은 어느 수행처 입문서에서든지 같다. 마하시계통에서는 모두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이 있다. 우 쿤달라 사야도가 지은 10일 동안 법문한 것을 엮은 책이다. 참고로 우 쿤달라 사야도는 땃담마란디(Saddhammaransi) 국제선원을 만든 분으로 현재 담마마마까 선원장 우 에인다까 사야도와 담마마마까 창건주 혜송스님의 스승이다. 또 우 쿤달라 사야도는 마하시사야도의 직제자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우 쿤달라 사야도가 지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은 2009년에 구입했다. 그때 당시 한국명상원 묘원선생 추천으로 구입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바이블과 같은 지침서라고 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읽을 때마다 새롭다. 진리를 말하는 책은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틈나면 읽어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집중의 다발과 지혜의 다발에 대한 것을 보면
수행과 관련된 팔정도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먼저 집중의 다발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집중에는 정정진, 정념, 정진이 있다. 배의 ‘일어남’을 알아차릴 때, 일어남을 알아차리려는 정신적 노력이 정정진이다. 일어나자마자 즉시 알아차리는 것은 현재에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이므로 이것을 정념이라고 한다. ‘일어남’의 시작과 ‘일어남’의 끝에 마음을 겨냥하고 지속되기 때문에 이것을 정정이라고 하며, 이상 세 가지가 없으면 ‘알아차림’이 있을 수 없다.”(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370쪽)
팔정도 중에서 집중과 관련된 정정진, 정념, 정진 세 가지 설명이다. 초기경전과는 달리 수행적 관점에서 설명되어 있다. 수행대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정진’임을 알 수 있다. 대상에서 일어나고 변화되어 사라지는 현상을 오롯하게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정념’이다. 수행대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다 보면 마음이 대상에 머물게 되는데 이를 ‘정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정진, 정념, 정진 이 세 가지는 한꺼번에 동시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집중의 다발로 본다. 다음으로 지혜에 대한 것이다.
“지혜에는 정사유와 정견이 있다. 배의 ‘일어남’에 아는 마음을 두고 노력하는 것을 정사유라고 한다. 여기서 사유는 ‘마음을 감각기관에 두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일어남’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이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370쪽)
정견과 정사유에 대한 설명을 보면 초기경전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철저하게 수행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배에서 ‘일어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정견’이라고 한다. 여기서 일어남은 무슨 의미일까? 일어남은 육체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일어남이라고 아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복부에서 일어남이라는 육체적 현상이 있고 이를 일어남이라고 아는 정신적 현상이 있다. 오로지 두 가지 현상, 즉 정신-육체적 현상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정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정견과 정사유에 대하여 지혜의 다발로 보는 것이다.
법문 없는 수행을 상상할 수 없다
사야도의 팔정도 법문이 끝났다. 집중수행에서 매일 법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함일 것이다. 매일 법문을 통하여 방법을 알려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마음을 다 잡게 하기도 한다. 법문을 통하여 더욱더 분발하게 하는 목적도 있다.
인터뷰없는 수행을 상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법문 없는 수행을 상상할 수 없다. 만일 인터뷰도 법문도 없이 수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 길을 아는 사람이 알려 주어야 한다. 집중수행할 때 사야도가 아침저녁으로 법문해주고 오전오후로 인터뷰해주는 것은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서 효과를 내게 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2019-07-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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