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이고 천번이고 똑 같은 동작을,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9
3일차 2019년 7월 4일 오후, 우 에인다까 사야도 인터뷰지도
이번 집중수행에서 제대로 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행선(行禪)이다. 경행이라 하지 않고 행선이라고 한다. 가볍게 걷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로 워킹메디테이션(Walking Meditation)이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보수행(步修行)이라고 한다.
왜 행선인가?
왜 행선인가? 중요한 몸관찰 수행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수행이라 하여 앉아서 하는 좌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좌선 못지 않게 행선을 중요시한다. 좌선 한시간 하면 행선 한시간 하는 식이다. 좌선 하는 시간만큼 동일하게 행선하는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 행선을 좌선 못지 않게 중요시 여기는 것은 ‘몸관찰’ 수행이기 때문이다. 사념처 중에서 신념처에 해당된다. 몸관찰 수행에서 좌선을 하면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호흡과 관련된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복부관찰은 아나빠나사띠와는 다른 것이다.
들숨날숨으로 표현 되는 아나빠나사띠에서 들숨날숨에 집중하는 것은 사마타수행방법이다. 그러나 들숨날숨이 아닌 복부의 움직임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 해당된다. 지수화풍 사대 중에서 주로 풍대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선에서뿐만 아니라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도 위빠사나수행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념처경에서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D22)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명칭을 붙여서
직지사템플스테이 위빠사나 집중수행에서는 행선에 비중을 두었다. 그것도 명칭을 붙여서 해보았다.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는 명칭을 붙이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단계별로 진행했다.
처음에는 ‘왼발, 오른발’하는 1단계로 몸을 풀듯이 행선하다가 차츰 단계를 높여 갔다. 2단계는 한걸음에 두 번 알아차리는 ‘듦, 놓음’이다. 3단계에서는 ‘듦, 나감, 놓음’이고, 4단계는 ‘듦, 나감, 놓음, 누름’이다. 이렇게 차츰 단계를 높여 나가다가 6단계에 이르면 ‘듦, 올림, 나감, 내림, 놓음, 누름’이 된다. 어느 단계이든지 명칭을 붙였다.
행선을 처음부터 6단계부터 할 수 없다. 차츰 단계를 높여 가다가 최종적으로 6단계가 되어야 한다. 낮은 단계에서는 걸음걸이가 비교적 빠른 편이다. 그러나 단계가 높아질수록 느려진다. 동작 하나하나를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6단계가 되면 아주 느려질 수밖에 없다.
행선시간은 보통 한시간 주어진다. 좌선을 한시간 하면 행선도 한시간 하기 때문에 지루한 감도 없지 않다. 한시간 동안 걷는다며 4키로가 될 것이다. 명상홀에서 한시간동안 행선한다는 것은 지루하고 따분하기 때문에 일이십분하다가 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6단계에 이르러 명칭을 붙여 집중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카니까사마디(khaṇika samādhi)
행선을 하면 움직임만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의도도 관찰된다. 발을 들 때 들려고 하는 의도를 관찰하는 것이다. 올릴 때는 올리려는 의도, 나갈 때는 나가려는 의도를 관찰한다. 행선 6단계 마다 모두 의도를 관찰하려면 동작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행선을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실제성품을 보는데 있어서 대단히 효과적이다. 특히 지수화풍 사대의 성품을 알 수 있다. 발을 들었을 때는 가벼운 느낌으로 풍대와 화대를 알 수 있고, 발을 내릴 때는 무거운 느낌이기 때문에 지대와 수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관찰할 때는 움직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이와 같은 순간집중에 대하여 카니까사마디(khaṇika samādhi)라고 한다.
카니까사마디는 사마타에서와 같이 고정된 대상에 몰입하여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몸의 움직임을 순간포착하여 관찰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 그런데 집중을 하면 선정에서 말하는 희열과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순간집중을 뜻하는 카니까사마디 역시 집중에 따른 희열과 행복이 있다.
카니까사마디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도 “행복을 잉태하여 성숙시키면 찰나삼매와 근접삼매와 근본삼매의 세 가지 삼매를 완성시킨다.”(Vism.4.99)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찰나삼매는 카니까사마디를 말한다.
삼매에는 찰라삼매, 근접삼매, 근본삼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사마타수행을 할 때는 근접삼매로 시작하여 근본삼매로 들어간다. 고정된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깊게 집중할 수 없다. 변화하는 성품을 알아차리려면 찰나찰나 순간순간 집중해야 한다. 이를 순간집중, 찰라삼매, 순간삼매, 카니까사마디 등으로 불리운다. 그렇다면 삼매를 닦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수행승들이여, 삼매에 들면 수행승은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S22.5)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삼매는 찰라삼매, 근접삼매, 근본삼매 모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삼매를 닦으면 “물질의 발생과 소멸, 느낌의 발생과 소멸, 지각의 발생과 소멸, 형성의 발생과 소멸, 의식의 발생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S22.5)라고 했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아는 것이다. 삼매를 닦으면 실제 하는 성품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똑 같은 동작을
좌선을 하고 행선을 하는 이유는 실제하는 성품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모든 성품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몸에서 관찰되는 것도 그렇고 느낌으로 관찰되는 것도, 마음으로 관찰되는 것도, 법으로 관찰되는 것도 그렇다. 어느 것 하나 생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집중이 되어서 지혜의 힘이 생기면 이런 성품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좌선과 행선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제 하는 성품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한다. 좌선이라면 강한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행선이라면 발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이다.
행선 6단계를 하면 동작 하나하나를 알아차림 할 수 있다. 한걸음에 6단계를 아는 것이다. 처음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일일이 명칭을 붙인다. 몸에 익을 때까지 계속 반복해야 한다. 한두시간에 되지 않는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똑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공부에 왕도가 없다고 한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은 공부 못하는 사람보다 공부절대량에 있어서 월등히 많다. 어떤 일이든지 전문가가 되려면 절대적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만시간의 법칙’이 나왔을 것이다. 한사람의 전문가가 탄생하려면 하루에 서너시간씩 꾸준히 십년 해야 된다는 것이다. 행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선에 왕도가 없다. 행선한 시간만큼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한두시간 한 사람과 하루이틀한 사람 다르고, 하루이틀 한 사람과 한두달 한 사람 다를 것이다. 똑 같은 행위를 매일매일 반복해야 한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똑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행선을 하면 한꺼번에 두 가지를
매일매일 하다 보면 몸에 붙어서 자동적으로 될 것이다. 행위 하나하나 알아차림 하며 앞으로 나아 갈 때 자신이 걷는다기 보다는 물질과 정신이 걷는다는 느낌이 올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가 소위 ‘위빠사나 제1단계 지혜’에 해당되는 ‘정신과 물질을 식별하는 지혜’에 해당될 것이다.
행선을 하다 보면 발의 움직임과 이를 관찰하는 마음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가 있다는 것을 잊어 버리는 것이다. 좌선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복부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나가 있다는 것을 잊어 버린다. 오로지 관찰대상과 관찰하는 마음만 남게 된다. 그래서 정신과 육체 두 과정만 있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을 때 위빠사나지혜가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행선을 하면 좌선과 달리 하나를 더 보게 된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사실이다.
행선을 하면 좌선과 달리 의도를 볼 수 있다. 움직이는 대상으로 알아차림 하기 때문에 의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좌선에서도 의도를 볼 수 있다. 다리저림 등으로 인하여 통증이 극에 달했을 때 자세를 바꾸고자 하는 의도를 말한다. 그런데 행선을 하면 매순간 움직임을 관찰하기 때문에 움직임마다 의도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움직이려 하는 의도가 원인이 되고 움직임이 결과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에 대하여 ‘위빠사나 제2단계 지혜’라고 한다.
행선을 하면 한꺼번에 두 가지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행선을 하면 때로 좌선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마하시전통에서는 행선을 매우 중요시하게 여긴다.
부처님도 행선을 했다
3일차 7월 4일 오후에 인터뷰시간이 있었다. 오후 3시 30분에 시작하여 1시간 10분 가량 진행되었다. 혜송스님은 “아직 인터뷰 안한사람 나오세요.”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총 3번 인터뷰가 있었는데 한회당 12-13명 가량되기 때문에 40명 가량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 보고하지 않은 사람 나오라는 것이다.
오후 인터뷰시간에 행선에 대하여 보고 했다. 이번 집중수행에서 행선 하나 만큼은 제대로 해 보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행선위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야도는 좌선과 행선을 균형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선을 할 때 명칭을 붙여서 한다고 말했더니 “초기에는 명칭을 붙여서 하는 것이 집중하는데 좋습니다. 숙달되면 명칭을 떼 버리고 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사야도는 부처님도 행선을 했다고 말하고 행선을 하면 이점이 많다고 했다.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자 A가 경행 중에 망상이 일어남을 보고 했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사띠는 순발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일어나자 마자 사띠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사야도는 지나간 것을 보면 현재 것을 놓친다고 했다. 그래서 “지나간 생각은 확 무시하고 몸으로 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가 났을 때 죽으면 어떻게 될까? 사야도에 따르면 바로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화를 사띠해야 할까? 화는 사띠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만약 진심을 사띠한다면 낮은 세계에 태어나는 이유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A5.161)이 있다. 이를 ‘절복진노경’이라고도 한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A5.161) 라는 가르침이 있다.
사야도가 탐심이나 분노를 내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따라가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선법이든 불선법이든 사띠의 대상이 된다.
사띠를 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포착이라고 본다. 그 다음은 세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빠자나일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 통증 같은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물론 탐심이나 분노도 해당 된다. 희열이나 평안도 해당된다. 이렇게 관찰해야 고유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 났을 때 마음이 대상으로 향한다. 그때 싫어하고 불쾌하고 불편하고 폭발하는 분노의 고유성품을 본다. 분노에 끄달리면 망상이 된다. 한번도 아니고 연이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본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제멋대로 일어났다가 사라짐을 본다. 통증을 끝까지 관찰하여 성품을 보듯이, 마찬가지로 분노도 끝까지 성품을 관찰하여 성품을 본다. 사야도는 이런식으로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분노 하는 대상에 대하여 사띠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사람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면 사띠를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사야도는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면 냉정하게 내려 놓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수행자 B는 사야도의 새벽법문을 듣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부처님에게 감사드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처님과 사야도, 통역을 해 준 혜송스님에게 감사드린다고 했다.
수행자 C는 호흡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호흡과 관련된 복부의 움직임을 말한다. 이런 보고에 대하여 혜송스님은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미 말한 것이라고 했다. 또 인터뷰시간에도 말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복부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을 때 엉덩이로 가라고 했다. 엉덩이의 닿는 느낌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움직임이 느껴지면 다시 주관찰대상으로 가라고 했다.
“데려오면 열반을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
열 명 가량 보고가 있었다. 마무리 시간에 혜송스님은 수행자들에게 당부했다. 이런 조건을 가진 기회가 없다고 했다. 이를 미얀마 선원과 비교하여 설명했다.
미얀마 국제선원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수행자들이 있다. 그런데 기후, 말, 음식 등에서 불편이 많다고 한다. 특히 언어 문제가 크다고 했다. 자국 언어를 쓰는 수행자가 많으면 통역이 있어서 문제가 없으나 한 두사람 있는 선원에서는 통역이 없어서 애로사항이 많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고액의 통역비를 내고 외부에서 사람을 데려 와야 한다. 이에 비하여 한국에서 그것도 환경이 잘 갖추어진 대찰 선원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복 받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사야도가 법문하고 오전오후로 인터뷰하는 나날이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더구나 통역이 있어서 의사소통이 전혀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 혜송스님은 이런 좋은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미얀마에서 정진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혜송스님은 다음에 이런 법회가 열리면 혼자만 오지 말고 주변사람들과 함께 오라고 했다. 그것도 열명 데려 오라고 했다. 이번 집중수행에 많이 온 것 같지만 미얀마에 비하면 매우 적다고 했다. 담마마마까에서는 평소 120명에서 150명 정도 스님과 재가수행자들이 살고 있지만 집중수행기간이 되면 1500명에서 1700명 가량 몰린다고 한다.
수련회가 열리면 주변에 알리라고 했다. 또한 다른 곳에서 수련회가 열리면 참석하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혜송스님은 “데려오면 열반을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수련회에 다니는 나는 당연히 열반에 갈 수 있는데 데려 오면 열반으로 이끌기 때문에 열반을 선물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2019-07-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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