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용맹정진 법문,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14

담마다사 이병욱 2019. 8. 6. 12:15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용맹정진 법문,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14

 

 

5일차 2019 7 6일 새벽, 우 에인다까 사야도 새벽법문

 

그 동안 수많은 수행서적을 읽었다. 머리로만 이해했다. 마치 경전 읽듯이 수행관련 책을 읽은 것이다. 그런데 집중수행을 해 보니 경전에 쓰여 있는 말씀이 사실 알고 보면 모두 수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경전에서 그렇게 강조된 사띠(sati)가 사실은 수행 용어였던 것이다.

 




다음 생에 갈 것 없이 이 생에서

 

직지사템플스테이 위빠사나집중수행 5일차 새벽이 되었다. 5 6일 일정에서 이제 하루만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날은 오전 일정만 있으므로 5일차가 실질적으로 마지막 일정이라고 볼 수 있다.

 

2019 7 6() 새벽법문 시간이 되었다. 새벽예불의식에 이어서 곧바로 새벽법문이 시작되었다. 법문을 하고 수행을 하고 인터뷰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세 개 중에 하나라도 빠진다면 제대로 된 집중수행이라고 볼 수 없다.

 

사야도는 매일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 생에 갈 것 없이 이 생에서 도와 과를 성취하기 위함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 , 의 삼업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5부 니까야와 84천 법문에서 핵심을 간추린다면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짓는 삼업인데, 삼업을 고치는 것이 수행이라고 했다.

 

아리야(ariya) 세 가지 특징

 

삼업을 청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야도는 매순간 사띠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인은 매순간 사띠하지만 범부중생은 현재 이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탐진치만 쌓여 가는 존재라고 했다.

 

성인을 아리야(ariya)’라고 한다. 아리야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순백청정이고, 둘째는 고귀한 존재이고, 셋째는 번뇌가 소멸된 자라고 했다.

 

범부중생이 아리야가 되려면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면 된다고 했다. 수행을 하여 마음을 다스리면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허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 고치는 것이 수행이라고 했다,

 

앗빤난깟(용맹정진)법문

 

사야도는 세 가지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한번만 들어도 실천하는 사람, 많이 들어야 실천하는 사람, 말을 해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 이렇게 세 부류가 있다고 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갖가지 방편으로 설했다고 한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하면 100% 아라한이 된다고 했다. 부처님은 갖가지 중생에 대하여 8 4천가지 방편으로 교화 했는데 그 중에서도 아리야가 되는, 아라한이 되는 가르침이 있다. 사야도는 이를 앗빤난깟법문이라 하여 새벽법문에 법문했다.

 

사야도가 말한 앗빤난깟(용맹정진)법문이란 무엇일까? 사야도는 크게 세 가지라고 했다. 첫째는 안이비설신의를 대상으로 하여 한개도 놓치지 않고 사띠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음식을 적절하게 섭취할 줄 아는 것이고, 셋째는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하루종일 사띠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야도는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실천하면 빠른 시기에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사야도가 말한 세 가지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수레의 비유에 대한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은 바로 현세에서 즐겁고 기쁘게 지낸다. 모든 번뇌의 소멸에 근본이 되는 것도 그것에서 시작한다. 세 가지 원리란 무엇인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S35.239)라고 말씀 했기 때문이다.

 

첫째,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

 

아리야가 될 수 있는 첫번째 조건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눈을 예로 들어서 모든 탐진치는 눈으로 대상을 볼 때 일어납니다. 탐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것을 치()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사야도는 육근을 닫고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눈과 관련해서는 자기 앞을 쳐다 볼 정도로,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을 잘 간수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맹인이 가장 유리할 것이다. 장님은 보이는 대상에 따라 탐진치가 일어날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맹인은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번뇌가 일어날 것이다. 눈이 안보여도 귀가 잘 들린다면 귀를 통해서 탐진치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야도는 그대의 눈이 밝더라도 장님처럼 행동하라.”라는 마하가전연 존자의 게송을 인용했다. 귀에 대해서는 그대의 귀가 밝더라도 귀머거리처럼 행동하라.”가 된다. 이 게송은 담마마마까 법요집 예불문에 실려 있다. 테라가타에 근거가 있는 이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Thag.501, 마하깟짜야나)

 

 

게송에서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라고 했다. 이 말은 눈 있는 자라도 포기해야 할 것이 보일 때에 눈먼 자가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Thag.II.210)라는 뜻이다. 만일 포기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야도는 눈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하여 선인과 왕비이야기를 해 주었다.

 




선인과 왕비이야기

 

부처님이 전생에 선인으로 살았을 때의 이야기라고 한다. 최고선정을 성취한 선인은 왕의 초대를 받고 궁전에 갔다. 그런데 왕비의 치마가 흘러 내리는 바람에 왕비의 은밀한 곳을 보게 되었다.

 

선인의 선정은 한순간에 파괴 되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번뇌가 일어나서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왕은 왕비를 데려다 사십시오.”라고 말했다. 선인은 환속하여 왕비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혼자 살 때 와는 달리 왕비가 이것 저것 너무 많이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왕비를 버리고 다시 산에 들어가서 선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사야도는 왜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까? 그것은 감각기관의 단속이 매우 중요함을 말한다. 최고 선정을 성취한 선인도 눈 단속을 하지 못하여 한순간에 선정이 파괴된 것을 말한다.

 

사야도의 이야기를 듣고 인연담을 검색해 보았다. 선인과 왕비, 선정을 키워드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언젠가 읽은 기억이 있어서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뭄빠다(12연기)를 열어 보았다. 거기에 선인과 왕비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무둘락카나 본생경(Mudulakkhaa jātaka)(J.66)에 따르면 보살은 선인(仙人)이었는데 공양을 받기 위해 왕궁으로 갔습니다. 선인은 신통이 있었기 때문에 날아서 갔는데 선인이 갑자기 나타나자 왕비가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걸치고 있던 옷이 흘러내렸습니다. 왕비의 매혹적인 몸매는 곧바로 오랫동안 잠재하고 있던 선인의 성욕을 솟구치게 했습니다. 선인은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통도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걸어서 거처로 돌아간 선인은 욕정과 애욕의 불꽃으로 괴로워하며 누워 있었습니다.

 

사건의 전모를 들은 왕은 언젠가는 이전의 높은 본성을 되찾을 성자의 능력을 확신했기 때문에 선인에게 왕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왕비에게 선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은밀히 지시했습니다.

 

선인은 왕비를 데리고 왕궁을 떠났습니다. 일단 왕궁 문을 나오자 왕비는 선인에게 되돌아가서 왕에게 집을 요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낡은 집을 받았지만 똥과 오물을 치우기 위한 광주리 및 손도끼를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선인은 몇 번이고 필요한 다른 물건들을 요구하러 왕에게 가야 했습니다. 왕비의 요구대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느라고 기진맥진 했지만, 선인은 아직도 욕정과 애욕에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킨 일을 모두 다 한 다음에 선인은 좀 쉬려고 왕비 곁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왕비는 선인의 수염을 확 잡아당기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애욕과 욕망을 없애는 것이 목적인 사문(沙門)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세요?”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선인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명을 알아차렸습니다. 왕비를 왕에게 돌려준 다음 히말라야의 숲으로 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신통도 회복하고 죽어서 범천계에 이르렀습니다.”(마하시사야도 12연기 34.난해한 연기법)

 

 

선인과 왕비이야기는 자따까에 근거가 있다. 최고 선정을 성취한 선인도 눈 단속을 하지 못했을 때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책에서 마하시 사야도는 감각접촉[]은 때때로 매우 폭발적이며 폭발적 감정과 욕정, 분노 등을 표출하게 합니다.”라고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것은 고대 스리랑카의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i) 왕 때 한 젊은 비구가 소녀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소녀도 비구를 쳐다보았고, 그 둘은 불타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급기야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이다. 어떤 장로 비구도 마하나가(Mahā-nagā) 왕의 왕비를 알아차림 없이 쳐다보았다가 미친 일도 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 , , , , 마음을 매우 잘 간수해야

 

최고 선정을 성취한 선인이라도 색욕이 한번 일어나면 선정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모든 출가자는 눈, , , , , 정신을 잘 간수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감각기관 단속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했다.

 

 

시각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시각능력을 이렇게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S35.239)

 

 

여섯 가지 감각능력 중에서 시각능력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경을 보면 공격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눈을 단속하지 못했을 때 인상(nimitta)과 연상(anubyañjana)으로부터의 공격이다. 선인이 벗은 왕비의 모습을 보았을 때 와 같은 것이다. 알아차림 없이 보았을 때 번뇌로부터 공격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처의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사야도는 초보수행자라면 도시와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이 수행하기에 좋다고 했다. 조용한 절도 좋다고 했다. 육근을 잘 간수할 만한 힘이 없을 때는 사람이 많은 도시보다는 산속이나 숲속이 좋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도 권장한 것이라고 했다.

 

사야도는 의미를 더욱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미연마어로 에인드래잇ㅎ마 쌋웅씨-까 까웅수아싯얏미-“라며 두 번 게송을 읊었다. 수행자들도 따라서 두 번 합송했다. 혜송스님이 의미를 더욱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두 번 더 합송했다. 수행자들도 따라서 두 번 더 합송했다. 우리말로 , , , , , 마음을 매우 잘 간수해야 한다.”라는 뜻이다.

 




둘째, 음식의 적당량을 아는 것

 

아리야가 될 수 있는 두번째 조건은 음식의 적당량을 아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려면 음식을 적절하게 섭취해야 함을 말한다. 왜 그럴까? 음식을 잘못 먹으면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음식을 맛있다고 하여 과도하게 먹어도 안되고 음식이 맛 없다고 하여 안먹어도 안된다는 것이다.

 

사야도의 음식이야기를 듣고 우 꾼달라 사야도가 지은 책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서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가 떠 올랐다. 그것은 맛이 있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거기에 탐심이 있다는 것이다. 맛이 없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성냄이나 슬픔이 있다는 것이다.”(153) 라는 말이다.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이제까지 음식을 먹을 때 아무 생각없이 먹었다. 맛이 있으면 많이 먹고 맛이 없으면 그만 두었다. 그런데 이 모든 행위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두 가지 중의 하나이기 쉽다. 하나는 탐욕으로 먹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분노로 먹는 것이다. 그런데 우 꾼달라 사야도에 따르면 여러분은 음식이 맛이 있든 없든 알아차리도록 해야 한다. 좋거나 나쁘거나 수행자는 모두 알아차려야 한다.”(153) 라고 말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사띠해야 함을 말한다.

 

계율로 먹는 음식

 

밥 먹는 것도 수행이다. 사야도는 아라한이 되고 싶거든 음식을 적절하게 먹어야 하고 사띠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야도는 음식은 세 가지 방식으로 먹는다고 했다. 하나는 계율로 먹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마타로 먹는 것이고, 세번째는 위빠사나로 먹는 것이라고 했다.

 

계율로 먹는 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욕망으로 먹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경전을 근거로 하여 말했다.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수레의 비유에 대한경에서는 계율로 먹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있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 (S35.239)



부처님은 음식을 먹을 때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하여 몸을 유지 하기 위해 먹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수레바퀴에 기름칠 하듯, 상처난 부위에 연고 바르듯이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빠알리 공양게송이라고 볼 수 있다.

 

빠알리 공양게송을 보면 그 어디에도 음식을 약으로 알아 먹어라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대승공양게송이라고 볼 수 있는 오관게와 매우 대조적이다. 오관게에서는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正思良藥爲療形枯)”라고 했다. 그러나 빠알리율장에 따르면 환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사마타로 먹는 음식

 

초기경전에서는 음식에 대하여 지계로 먹는 방법 하나만 소개 되어 있다. 그런데 사야도는 사마타로 먹는 것과 위빠사나로 먹는 것도 소개 했다. 사마타로 먹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는 담마마마까 법요집에 실려 있다. 사야도는 법요집에 실려 있는 사마타로 먹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음식이 여기에 오기까지 보시한 사람,

만든 사람, 먹는 사람,

이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위험과 해악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마음의 고통이 소멸하기를!

몸의 고통이 소멸하기를!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신의 업을 잘 실어 나를 수 있기를!”

 

 

이것이 사마타로 먹는 것이다. 음식을 먹기 까지 보시 해준 사람, 공양제자, 그리고 선원봉사자들을 생각하면서 먹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고통과 해악해악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자애관을 하면서 먹는 것이다.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는 아침과 점심 식사하기 전에 자애관 게송을 합송한다. 이와 같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먹는 것을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먹는 것이라고 한다.

 

위빠사나로 먹는 음식

 

위빠사나로 먹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알아차리면서 먹는 것이다. 음식을 집는 것부터 시작하여 입에 대는 것, 씹는 것, 넘기는 것까지 전과정을 사띠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로 먹는 것에 대해서는 담마마마까 법요집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음식을 볼 때는 , 이라고 알아차리고, 음식을 향하여 팔을 뻗을 때는 뻗음, 뻗음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음식을 입에 넣을 때는 넣음, 넣음이고, 음식을 씹을 때는 씹음, 씹음이고, 음식을 넘길 때는 삼킴, 삼킴이라고 한다.

 

우 꾼달라 사야도는 책에서 이것은 마하시 사야도가 음식을 한 입 먹을 때마다 알아차린 방법이다.”(146)라고 했다. 특히 공손하면서도 꿰뚫어보듯이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했다.

 

우 꾼달라 사야도는 책에서 음식을 먹을 때 처음에는 전부를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집중하다 보면 전과정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씹음은 어떻게 알아차리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이야기를 곁들였다.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씹음에 대하여 잘 관찰하면 아래턱이 움직인다고 했다. 위턱은 머리와 연결되어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음식을 씹을 때 주의깊게 관찰하면 아래턱이 움직여서 음식을 씹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음식을 사띠하면서 먹으면 엄청난 집중력이 생겨서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우 에인다까 사야도는 미얀마어로 엇싸-엇싸- -진ㅎ마 따잉따띳얏미라고 두 번 게송을 읊었다. 우리말로 음식, 영양소를 적절히 섭취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셋째, 항상 깨어 있는 것

 

아리야가 될 수 있는 세번째 조건은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아라한이 되려면 언제나 사띠가 끊어지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깊은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들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도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깨어 있음에 전념한다.(S35.239)

 

 

사야도는 잠 잘 때 뒤척이면 즉시 사띠하라고 했다. 일어나는 과정에부터 화장실에 가는 과정 등을 모두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양치질 하는 것, 옷 입는 것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잠 잘 때까지 사띠해야 함을 말한다.

 

잠 잘 때도 알아차림 하면서 자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순간 잠들게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담마마마까 법요집에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뒤척이지 말고 송장처럼 가만히 관찰하면서 잠들어라.”라고 했다. 마하가전연존자의 게송에 실려 있는 문구중의 하나이다.

 

경에서 깨어 있음에 전념(jāgariya anuyutto)”하라고 했다. 이 말은 늘 깨어 있음(jāgariya)’을 의미한다. 잠 잘 때를 제외하고 사띠가 끊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늘 깨어 있으면 계행은 저절로 지켜 질 것이다. 따라서 감각의 문도 수호될 것이다. 물론 음식도 적당량을 먹게 된다. 항상 깨어 있다면 퇴전할 수 없다. 그래서 열반을 앞에 두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사야도는 사띠가 끊어지지 않으면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사야도는 미얀마어로 --뭇ㅎ마 쌔이신까- 까웅수아 싯얏미라며 게송을 두 번 읊었다. 우리말로 새벽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싸띠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라는 뜻이다.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용맹정진 법문

 

사야도는 아리야 되는 방법 세 가지를 설명했다. 이 세 가지를 실천하면 누구나 빠르게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용맹정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를 앗빤낫깟(용맹정진)법문이라고 했다.

 

사야도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 가지 원리, 즉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 그리고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에 대하여 완전히 실천한다면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사야도는 여기 있는 수행자들이 장애없이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도록 축원하면서 5일차 새벽법문을 끝냈다.

 

 

 

2019-08-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