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알아차림은 순간포착을 잘 해야,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15

담마다사 이병욱 2019. 8. 9. 16:34

 

알아차림은 순간포착을 잘 해야,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15

 

 

5일차 2019 7 6, 오전과 오후 인터뷰

 

어떻게 해야 사띠가 유지할 수 있을까? 가장 첫번째 조건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선원에서는 묵언한다. 그 다음으로는 인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다. 선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모른척 하고 지나치는 것이다. 그러나 눈인사든 고개인사든 인사를 하면 받아 주어야 한다.

 




2019 7 6일 집중수행 5일차 오전이다. 아침식사후에 명상홀에 앉아 있었으나 졸음이 쏟아져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졸음을 이겨내기 위하여 행선을 했다. 명칭을 붙여 가며 6단계 행선을 했다. 한걸음에 , 올림, 나감, 내림, 닿음, 누름에 집중했다. 특히 내림 할 때 발을 앞으로 쑥 내밀었는데 아래로 내려 뜬 눈에 보일 정도였다. 반복적으로 관찰하니 재미가 붙었다. 마치 로보트가 척척 앞으로 가는 것처럼 직진했다.

 

행선이 끝나고 좌선했다. 이십여분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집중되지 않았다. 그럴 경우 일어서는 것이 낫다. 명상홀 바깥 의자에 잠시 앉아 있었다.

 

어느 수행자가 말을 걸어 왔다. 어제 저녁에 왔다고 한다. 블로그 잘 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글은 날카로운 것 같은데 보기에는 부드러운 것 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어느 수행자도 아는 척 했다. 담마와나 선원에서 보았다고 한다. 대전에서 온 수행자는 인터뷰시간에 안양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아 보았다고 한다.

 

아라한의 인생관

 

오전 인터뷰시간이 되었다. 오전 9시 반부터 한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A수행자가보고 했다. 통증을 관찰했다고 한다. 통증을 관찰 했을 때 통증이 점으로 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수행자는 이게 뭐지?”라며 놀랐다고 한다. 놀란 마음 역시 까만 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의 허무를 느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일어나는 대로 잘 싸띠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무아를 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제 보다는 많이 발전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A수행자는 어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사야도는 눈물에 대하여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 허무의 눈물이 있다고 말했다. 기쁨도 슬픔도 싸띠하면 관리 된다고 했다. 좋고 나쁜 것을 떠나 담담한 마음으로 균형잡힌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하여 무르익었다라고 말했다.

 

마음이 무르익지 않으면 아기와 똑같다고 했다. 마음이 익은 사람은 어른스럽다라고 말했다. 슬플 때는 이런 일도 있구나!’라며 관망하라고 했다. 아라한은 마음이 무르익은 사람으로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평온한 모습이라고 했다. 비난이나 존경심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사야도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라한의 인생관이 떠 올랐다. 마하시사야도는 12연기 법문집에서 하나의 게송을 소개했다. 전재성 선생이 옮긴 것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

 

 

아라한은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 때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죽음이다. 그러나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시설되지 않는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은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아의 성자에게는 죽음이 없다. 그래서 불사가 된다. 불사이기 때문에 불생이 된다.

 

무아의 성자는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삶도 기뻐하지 않고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 것일까?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라고 했다. 항상 싸띠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열반에 드는 그때까지 싸띠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위빠사나 지도를 잘 할 수 있을까?

 

B수행자가 보고 했다. 청소년 명상지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사마타 명상지도를 하고 있는데 위빠사나 수련회에 참가하고 나서 , 이거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B수행자는 학생들이 공부 잘 할 수 있도록 어떻게 명상 지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사야도는 학생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음을 이야기 했다.

 

 

사야도는 처음부터 명상방법을 알려주기 보다는 먼저 5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5계를 지켰을 때 이익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삼보에 대하여 알려 주고 그 다음에 자비관을 알려 주라고 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높여 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부처님도 사용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야사에게 단계적인 가르침을 알려 주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타락-오염과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했다.(Vin.I. 15)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를 차제설법이라고 한다.

 

사야도는 처음부터 명상지도를 하지 말고 보시, 지계, 삼보 공덕 등을 먼저 알려 주라고 했다. 학생 중에서도 집중력이 강한 아이를 수행으로 유도하여 알려 주라고 했다. 실제적으로 미얀마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했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 보다는 절에서 명상하는 아이가 성적이 더 좋다고 했다.

 

사야도는 미얀마 어린이 불교학교 이야기도 해 주었다. 방학때 사원에 불교학교가 열리는데 1주일에서 2주일 기간이라고 했다. 부처님 차제설법처럼 보시, 지계, 삼보공덕, 사마타(자애관), 위빠사나 순으로 조금씩 단계별로 가르친다고 한다. 이런 방식은 한국과는 다른 것이다. 한국에서는 108배를 시킨다든가 근기와 관계 없이 앉아 있게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면 사미로 만든다고 한다. 계를 주고 교육을 시키면 받아 들인다고 한다. 계를 어겼을 때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내몸 간수를 잘 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 사야도는 보시에 대하여 반드시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과자라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보시라고 했다.

 

사야도는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위빠사는 위빠사나 답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위빠사나를 가르치기 전에 보시, 지계, 삼보예찬, 자애관 등 예비수행이 되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여러 가지 수행보고

 

C수행자는 자세 바꾼 이야기를 보고 했다. 좌선 중에 다리에 엄청난 통증이 일어나서 자세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오른쪽 다리라고 했다. 평좌를 하면 99% 오른쪽 다리에서 통증이 발생한다. 그런데 수술한 다리였다는 것이다.

 

사야도는 견디기 어려우면 알아차림 하면서 자세를 바꾸어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하나하나 동작을 관찰하면서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를 바꾸지 않고 끝까지 통증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마치 불구가 될 것처럼 통증이 있지만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D수행자는 통증이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빛을 보았다고 했다. 심장 박동이 작아지면서 몸에 미세한 진동이 왔다고 했다. 일어나는 현상을 시비하지 않고 따라가며 지켜 보았다고 했다. 또 새소리가 소리로 안느껴지고 파장으로만 보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에 사야도는 잘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D수행자는 결가부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했다. 이에 사야도는 결가부좌를 풀으라고 했다. 수행할 때 통증 때문에 불선업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했다. 최대한 편안한 자세에서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억지로 결가부좌한다는 것은 아마도 통증을 만들어 내기 위함의 목적도 있을 것이다. 어느 미얀마 수행자는 평좌에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자 무릎 꿇은 자세로 있다고 한다. 통증을 보기 위해서이다. 인위적으로 통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가부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야도는 너무 아프면 불선업을 일으키지 말고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단체명상팀 완전한 행복

 

점심시간이 되었다. 5일차 음식공양제자는 명상팀 영원한 행복에서 제공했다. 이번 직지사 수련회에 단체로 온 명상팀이다. 대중공양제자는 담마마마까 고려사 사야도, 다생부모님, 스승님, 시방 모든 존재를 위하여 공양했다. 떡볶이와 수박이 곁들인 특별식이었다.

 




명상팀 완전한 행복은 승가에 보시도 했다. 봉투를 모아서 보시를 원하는 다른 수행자들과 함께 보시하는 장면이 보기 좋았다. 보시를 하면 축원을 해준다. 보통 잇당메 뽕냥 아소왜케양 와항 호뚜라거나, “잇당메 다낭 내이바낫따 삣세요 호뚯라고 축원해 준다. 전자는 이 선업 공덕으로 수행의 장애가 소멸하기를!”라는 뜻이고, 후자는 이와 같은 보시공덕으로 열반에 이르기를!’라는 뜻이다.

 




행선을 보고 했는데

 

점심식사를 하고 좌선을 했다. 졸음으로 인하여 십여분만에 일어섰다. 만덕전 명상홀 바깥 의자에 앉아 졸면서 보냈다. 오후 2시가 되었을 때 행선을 했다. 집중이 잘 되어서 한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처음 시작할 때는 명칭을 붙여서 하지만 어느 정도 집중이 되면 명칭을 붙이지 않았다.

 

행선할 때 6단계로 하면 집중이 잘 된다. 그 중에 내림이 있다. 발을 내딛을 때 발이 앞으로 쑥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래로 내려 뜬 눈으로 보인 것이다. 눈으로 보이니 행선하는 맛이 낫다. 발을 디딜 때는 누르게 되는데 차가운 마루바닥의 감촉이 발바닥에 착 달라 붙는 것 같았다.

 

6단계 행선은 누름으로 완성된다. 듦부터 시작하여 올림, 나감, 내림, 닿음, 누름에 이르기 까지 한걸음 과정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하며 앞으로 척척 나아가면 쾌감이 생겨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해냈다.”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맛에 행선을 하는구나!”라고 알게 된다.

 

오후 인터뷰시간에 행선에 대하여 보고 했다. 사야도는 행선에 진전이 있다고 말했다. 사야도는 더 노력하면 로보트가 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구름과 번개이야기

 

인터뷰시간에 사야도는 어느 스님의 보고를 받고 구름과 번개이야기를 했다. 사야도는 정신과 물질에 대하여한순간에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 순간을 포착해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우 에인다까 사야도의 스승인 우 꾼달라 사야도가 지은 책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 나오는 말이다. 책에서는 지금 현재를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방법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현재를 정확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몸을 섬세하고 차분하게 움직여야 한다. 수행을 할 때, 일상생활에서처럼 움직이면 움직임이 너무 빨라 집중이 약해지므로 현재 몸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없게 된다. 현재의 움직임을 알아 차릴 수 없다면 법의 성품도 볼 수 없다.

 

사실상 수행자의 의식의 연속체에 존재하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은 오직 현재에만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데는 알아차림이 조금이라도 늦거나 빠르면 그것은 이미 물질적 현상도 정신적 현상도 아니다. 물질적, 정신적 현상이 아닌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알아차림이 아니며 여기에 집중도 생기지 않는다. 이때 그는 법을 보지 못한 것이다.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두 개의 구름덩어리가 부딪쳐서 번개를 일으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번개는 구름이 부딪치는 순간에 일어났다가 그 순간 바로 사라진다. 구름이 부딪치기 전에 번개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또한 구름이 부딪치고 나서 번개를 찾는 것도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오온 안에 있는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은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는 찾을 수 없다. 그것들은 조건이 부합하여 일어난 뒤에 바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일어나고 난 뒤에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오직 일어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재 바로 그 순간을 알아차려야만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의 성품을 이해할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76-77)

 

 

두 손바닥을 치면 소리가 난다. 부딪치는 순간에만 소리가 난다번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지 않으면 생멸하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법의 성품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는 병자처럼 몸을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절 하는 것 하나만 보아도

 

수행자들이 보고 할 때 먼저 절을 한다. 사야도에게 삼배를 하는 것이다. 테라와다식으로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허리를 숙여 머리가 바닥에 닿게 절을 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오체투지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사야도는 절하는 자세만 보아도 수행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는지 안다는 사실이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 이렇게 쓰여있다.

 

 

스승은 수행자가 절하는 것을 보면 알아차림이 있는지 아닌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스승은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지속적인지 아닌지를 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강한지 아닌지를 안다. 스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알아차리면서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기뻐한다.”(119)

 

 



수행자는 빨리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한다. 수행자는 병자처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강한 주의력을 말한다. 수행자가 스승에게 수행의 결과를 보고할 때 삼배를 하게 되는데 스승은 삼배하는 모습만 보아도 알아차림이 강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알아차리면서 절하는 모습은 아름다울 뿐만 훌륭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2019-08-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