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미움을 보지 말고 은혜를 보아야,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17

담마다사 이병욱 2019. 8. 13. 12:34

 

미움을 보지 말고 은혜를 보아야,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17

 

 

6일차 2019 7 7일 새벽, 우 에인다까 사야도 회향법문

 

여기 둥지가 있다. 새는 알을 낳아 정성껏 품는다.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새끼새는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 어미새는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다 준다. 새끼새는 어미새가 물어다 준 벌레 등 먹이를 먹고 성장을 한다. 하루가 다르게 커지기 때문에 며칠 지나면 몰라볼 정도가 된다. 가히 폭발적 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새끼새는 때가 되면 둥지를 떠나야 한다. 둥지가 비좁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에 더 이상 둥지에 살 수 없다. 새끼새는 날개가 날린 의젓한 모습이 되었다. 더 이상 새끼새가 아니다. 마침내 새는 비상한다. 둥지를 박차고 창공으로 날아 가는 것이다. 수행처에서 수행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19 7 7일 새벽이 되었다. 직지사 템플스테이 56일 마지막 날이다. 마침내 둥지를 떠나는 날이다. 그리고 회향하는 날이기도 하다. 우 에인다까 사야도는 5 6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법문해 주었다. 그리고 오전과 오후에 수행지도 해 주었다. 하루에 네 번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 어쩌면 알을 잘 품은 어미새와도 같다. 그리고 새끼새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다 준 어미새와도 같다. 마침내 떠나는 날 이른 아침 5시에 회향법문을 했다.

 




사야도는 인내와 자애가 있으면 행복을 성취한다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마치는 날 법문이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 가시는 분들을 위하여 당부의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했다. 이제까지 법문이 주로 정진이나 사띠 등과 같은 수행관련 법문이었는데 회향법문은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저희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야도는 먼저 부처님의 최후의 시간에 대한 것을 말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할 때 아난다는 저희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며 슬퍼했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빠알리원문을 낭송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아난다여, 그대들은 이처럼 스승의 가르침은 지나갔다. 우리에게 스승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난다여,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123)

 

 

사야도에 따르면 부처님은 수행에 대해서는 논장에서 다 설해 놓았다고 했다. 계율에 대해서는 율장에서 다 설명했고, 공덕에 대해서는 경장에서 다 설해 놓았다고 했다. 부처님은 율, , 론 삼장에서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5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하나도 숨겨 놓은 것이 없다고 했다. 스승이 마치 무언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꽉 움켜쥔 주먹, 즉 수승의 주먹인 사권(師拳)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율, , 론 삼장에 그 동안 설한 것이 모두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이띠붓따까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의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다르지 않다.”(It.121-122)라고 말씀했다. 부처님은 숨김 없이 다 설했는데 그것이 율, , 론 삼장에 모두 실려 있음을 말한다.

 

사야도에 따르면 율, , 론 삼장에 대하여 부처님이 있는 것과 똑 같은 것이라고 했다. 삼장을 접하면 부처님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말은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S22.87)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법이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바로 법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팔정도에 대한 법문, 오력에 대한 법문, 사띠빳타나 위빠사나 법문 등 6일 동안 들은 법문대로 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5 6일 동안 사야도는 모두 열 가지 법문을 했다. 십일 코스라면 하루에 한 개가 될 것이다. 이번 수련회의 경우 일정이 반으로 단축된 것이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법문했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이와 같은 열 가지 법문은 부처님이 설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가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 만일 상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수행자가 수행을 하여 모두 열반에 들었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더 이상 전승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행승이 열반에 들더라도 상가가 있었기 때문에 법이 전승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사야도는 상가는 부처님 대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열반 했어도 가르침은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수 많은 부처님 제자들이 열반에 들었어도 법이 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은 상가가 있기 때문이다. 상가가 있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서나 어느 나라에서나 가르침이 전승되어 와서 도와 과를 성취한 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사야도는 상가가 있어서 부처님 대신 법을 들려준 것입니다. 법을 듣고 실천수행하면 모두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건성건성 살지 말고 알아차림해야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아난다가 옆에 있었다. 부처님과 아난다는 사촌간으로 나이가 같았다. 그리고 같은 날에 태어났다. 부처님은 80세까지 살았지만 아난다는 120세까지 살았다. 건강하고 오래 산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 취급을 받기도 했다. 마하깟싸빠존자에게 애송이 취급받은 것을 말한다. 이는 존자 깟싸빠여, 내 머리에 흰 머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존자 깟싸빠에게서 애송이라는 말을 듣습니다.”(S16.1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애송이라는 말은 승단에 갓 입단한 새내기 수행승과 같다라는 말이다.

 

아난다는 부처님을 아버지 모시듯이 시봉했다. 그런데 아난다는 시자로 있으면서 부처님 열반에 들 때까지 수다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애착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하자 몹시 슬퍼한 것이다.

 

아난다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다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며 저 멀리 떨어진 문설주를 잡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만 두어라. 슬퍼하지 말라. 비탄해하지 말라. 아난다여, 참으로 내가 미리 모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들과 살아서 헤어지기 마련이고, 죽어서 이별하기 마련이고, 달라져 흩어지기 마련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생겨나고 생성되고 형성되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을 두고 여래의 신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부서지지 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옳지 않다.”(D16.114) 라고 말씀했다. 부처님은 오히려 아난다를 위로 했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아난다여, 여래가열반에 드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너도 기뻐해라.”라는 뜻으로 말했다고 한다.

 

부처님은 임종에 들 때 최후의 말씀을 했다. 사야도에 따르면 누구든지 임종을 맞이하면 짤막하게 말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빠알리 원음을 낭송했다.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handa'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그대들에게 당부한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D16.124)

 





 

부처님은 이 세상 삼라만상은 생멸한다고 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S15.20)라는 게송도 있다. 이 게송은 한역으로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로도 잘 알려져 있다.

 

부처님은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appamādena sampādethā)라고 최후로 말했다. 이 말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방일하지 말라는 것(appamāda)’은 항상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과 같은데 사띠(sati)와 동의어이다. 그래서 압빠마데나 삼빠데타에 대하여 건성건성 살지 말고 알아차려 모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라는 말과 같다고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간절하게

 

사야도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간절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이를 먹을 때 표 안나게 조금씩 늙어 간다고 했다. 그러나 한달, 일년, 십년이 지나면 나이 먹은 표가 난다고 했다. 십년, 이십년, 삼십년이 지나면 늙은 표가 날 것이다.

 

나이가 많아서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줄어 든 것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기대수명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다. 보험회사에서는 기대수명을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때까지 살도록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야도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했는데 이 말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는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Stn.574)라고 부처님은 말했다.

 

현재 나의 삶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날이 언제일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탐, , 치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것들이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It.26)라고 했다. 지금 분노에 가득찬 ㅅ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했다면 그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사야도는 지금까지 들은 법문을 잘 기억해서 정성을 다해 실천하라고 했다. 내가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간절히 수행하면 다음 생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이 생에서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사야도는 집으로 돌아가서도 수행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전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참는 마음과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인내 자애 있으면 행복을 성취한다.’라는 제목으로된 회향법문 주제이기도 한다. 사야도가 말한 인내와 자애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친친샛상 떼-니캉 엇ㅎ만로앗띠.

제수멋낀 삣멋낀 친친싯땃띠.

--묘민 삣멋낀 찟린찬-멧띠.

칸띠멧따 싯뚜ㅎ마 롱수아찬따-

-따로야 미아-뚱아 멧따칸띠싯얏미.”

 

서로서로 참고 배려함이 진짜 필요하다.

고마움, 미움 모두 있을 수 있다.

은혜를 잊지 않고 허물은 보지 않으면 맑고 평화롭다.

참을성과 자애가 있는 이는 언제나 행복하다.

행복을 원하는 이들은 자애와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사야도는 미얀마어로 두 번 읊었다. 수행자들도 두 번 따라 합송했다. 혜송스님은 의미를 더욱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한국어와 함께 두 번 읊었다. 수행자들도 따라서 두 번 합송했다.

 

게송의 키워드는 인내(khanti)’자애(metta)’에 대한 것이다. 사야도는 회향법문에서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는 재가수행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선원에서 계속 산다면 정진과 사띠를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집에 돌아 가면 현실적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문제는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한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 스승과 제자 등 가까운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에 대한 것이다.

 

미움을 보지 말고 은혜를 보아야

 

가까이 지내는 사이에는 은혜도 있고 미움도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미움을 보지 말고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허물을 보지 말고 고마운 쪽으로 마음을 돌리라는 말이다. 서운한 쪽을 보기 보다는 도움을 받았던 것을 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 올랐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A10.75)

 

 

부처님은 평가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 남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뒷담화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우리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말이 있다. 비밀은 지켜지지 않음을 말한다. 누군가에 대하여 험담을 했을 때 그 사람에 귀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럴 경우 속된 말로 다칠 수 있다. 그래서 경에서도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A10.75)라고 한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말하려거든 칭찬하는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언젠가 그 사람 귀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험담보다는 칭찬의 말을, 허물 보다는 장점을 말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사람의 장점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자신에게 장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A4.73) 라고 말씀했다. 장점은 적극적으로 알려 주어야 함을 말한다. 반대로 그 사람 단점에 대해서는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자신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A4.73) 라고 말씀 했다. 단점이나 허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잘 살아 주어서 감사하다

 

사야도의 회향법문이 끝났다. 사야도는 6일 동안 법문한 것을 잘 실천수행하여 장애없이 도와 과를 성취하기를 바라면서 축원해 주었다. 또 사야도는 이런 수련회가 있으면 주변에 권유하여 함께 공덕 지을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하자고 말했다.

 




혜송스님의 당부가 있었다. 혜송스님은 직지사주지스님의 말을 빌어서 수행자들이 며칠 동안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바뀌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다음 수련회 할 때까지 지금 보다 더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에 가서도 사띠를 놓치지 말라고 했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실천해야 함을 말한다.

 

혜송스님은 가족제도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나홀로 수행만 할 것이 아니라 배우자, 자녀에게도 권해서 가족이 함께 수행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서 저변확대 할 수 있는 포교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 살아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2019-08-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