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분노의 독화살을 맞았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9. 8. 30. 12:20

 

분노의 독화살을 맞았을 때

 

 

그 동안 풀리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화에 대한 것이다.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화를 푸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화가 났을 때 알아차림 하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알아차림 하는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었다.

 

분노도 사띠(sati)의 대상일까?

 

글을 하나 썼다. 직지사 집중수행에서 인터뷰한 것에 대해 쓴 것이다. 어느 질문자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사야도에게 물어 보았다. 이에 사야도는 지나간 생각 확 무시하고 몸으로 가라.”라고 말했다. 이 말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이 개인 카톡을 보내왔다.

 

이전에 그 사람과 통화한 적이 있다. 그 사람에 따르면 화가 났으면 화를 사띠해야 하는데 사띠하지 않고 주관찰대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것은 위빠사나가 아니라 사마타 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장 강한 대상이 나타나면 그곳에 마음을 두고 집중관찰해야 함에도 주관찰대상인 호흡과 관련된 복부의 움직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사마타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그 사람과 통화하고 난 다음 올린 글을 수정했다. 화도 관찰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화 그 자체를 관찰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썼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A5.161)을 들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A5.161)라고 되어 있다.

 

경전 어디에도 화를 사띠하라는 말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취지로 수정했더니 이번에는 다른거 다 놔두고 까야(왜다나, 찟따, 담마)누빠싸나 사띠빠타나라는 말만 상기하셔도 분노를 사띠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은 그릇된 견해라고 봅니다.”라고 문자를 남겼다.

 

그 사람에 따르면 화도 사띠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몸관찰 하면 복부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면밀히 관찰하라고 했다. 이를 까야누빠사나 사띠빳타나라고 한다. 느낌관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 이를 한 개도 놓치지 않고 사라질 때까지 관찰하라고 했다. 이를 웨다나누빠사나 사띠빳타나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화가 일어났을 때 화를 놓치지 않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찟따누빠사나 사띠빳타나라 할 것이다. 그 사람은 마음관찰도 몸관찰과 느낌관찰에서 하는 것처럼 일어난 현상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다. 수십년 수행했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한 것이라고 본다.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한다. 몰랐던 것을 알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글의 완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무엇 보다 구업을 짓지 않아서 좋다. 가르침을 왜곡되게 하거나 잘못 전달했을 때 그 과보는 엄청나게 클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충고를 받아 들여 두 번째 수정에 들어 갔다.

 

두 번째 수정한 것은 성품에 대한 것이다. 좌선할 때나 일상에 분노가 일어 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블로그에 분노가 일어 났을 때 마음이 대상으로 향한다. 그때 싫어하고 불쾌하고 불편하고 폭발하는 분노의 고유성품을 본다. 분노에 끄달리면 망상이 된다. 한번도 아니고 연이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본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제멋대로 일어났다가 사라짐을 본다. 통증을 끝까지 관찰하여 성품을 보듯이, 마찬가지로 분노도 끝까지 성품을 관찰하여 성품을 본다. 사야도는 이런식으로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썼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 글에 대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안타깝다는 말밖에 드릴게 없네요. 죄송합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그 사람의 글을 접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시당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속된 말로 개무시당한 것 같았다. 그럴 때도 분노가 사띠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아니 분노하는 마음이 대상이 될 것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누르면서 저의 한계이며 업일 것입니다.”라고 답글을 달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바르게 이해하실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써 놓았다.

 

아눌라스님의 유튜브 법문을 듣고

 

그사람과 카톡메세지를 주고 받은지 한달이 약간 넘게 흘렀다. 분노를 어떻게 사띠할 것인지에 대하여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었다. 일종의 화두처럼 분노도 사띠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하여 생각한 것이다. 수행자단체카톡방에도 띄어 보았으나 만족스런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머리 속에는 항상 분노, 탐욕 등 마음관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 남아 있었다.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아눌라스님법문을 유튜브에서 듣게 되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내용이었다. 그 동안 고민하던 것이 한순간에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탐심이 있는 마음은 탐심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 거기까지이에요. 그것을 없애라, 그것을 참회해라, 그것을 죄스럽게 생각해라 라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탐심이 있는 마음은 탐심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거기까지에요. 그리고 탐심이 없는 마음은 탐심이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 이렇게 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알아차려라까지만 하고 그 다음 해결책이 없느냐, 왜 그럴까요?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이에요.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고. 그럼, 탐하는 마음이 있죠? 탐하는 것이 하나의 마음 상태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관찰하라고 했을 때 , 탐하는 마음이 있구나!’라고 또 다른 정신작용이 일어나 보고 있죠. 이걸 사띠라고 하지요. 관찰하는 마음, 사띠라고 합니다.

 

그런 탐하는 마음은 말하자면 제일 낮은 마음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문득 , 탐하는 있구나!’라며 지켜 보고 있죠. 그럼 이건 이미 탐하는 마음이 아니죠. 그렇죠? 그럼으로써 즉시 낮은 상태에서 중성적인 어떤 지켜 보는 높은 상태의 마음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 새로운 마음이 나타나자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이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폭 사라져 버리는 거에요, 연기처럼. 그래서 이거하고 싸우지 말고 단순히 지켜 보라고 그런 거에요.

 

, 지금 탐심이 일어났구나!’라고 지켜 보는 순간 그 탐심의 상태에서 그 즉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탐심이 있는 마음은 탐심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고 그런 거에요.

 

그러자 탐심이 사라졌죠? 그럼 , 내마음이다!’ 그렇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탐심이 없는 마음은 또 탐심이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 내마음이 아니라 단지 그런 마음일 뿐이에요. 이렇게 수행하면 그 대상하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벗어나고 하면 항상 사띠의 마음만 이어지겠죠? 이 마음은 아주 중성적인 마음이에요. 중도적인, 어떤 대상에도 취하지 않는 자꾸 되비쳐 보는 마음이니까 취하지 않는 마음이지요. 그럼으로써 탐심은 사라집니다. 그럼 취()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아눌라스님, 09. 취를 놓는 수행과 수행의 대상을 설명하는 념처경 중 (신,수,심념처))

 




 

참으로 명쾌한 가르침이다. 그 동안 품었던 의문이 해소되는 듯 하다. 마음관찰(心念處)에서 탐욕에 대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탐욕 대신 분노를 대입해도 똑 같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분노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마음을 지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한순간에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으므로 뒤의 마음이 앞의 마음에 대하여 분노의 마음이라고 아는 순간 분노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분노하는 마음을 분노하는 마음으로 아는 마음을 또 알아차리는 것이다.

 

만일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그친다면 그 알아차린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그런 마음 마저 놓아 버려야 한다. 그래서 탐심이 없는 마음은 또 탐심이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 차렸을 때 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마음의 평정을 찾을 것이다.

 

노팅(noting)한 것을 왓칭(watching)하라!

 

수행처에서 듣는 말 중에 노팅(noting)한 것을 왓칭(watching)하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다름 아닌 알아차린 마음을 또 알아차려라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경전에 나와 있는 말이다. 대념처경에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있다.

 

 

sadosa vā citta sadosa cittanti pajānāti, vītadosa vā citta vītadosa cittanti pajānāti,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

 

 

마음관찰 (cittānupassanā: 心念處)에 대한 것이다. 대념처경에는 16가지 마음 관찰에 대하여 소개 되어 있다. 나열해 보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위축된 마음, 계발된 마음, 탁월한 마음, 집중된 마음, 해탈된 마음 이렇게 8가지 마음이 소개 되어 있다. 그런데 8가지 마음은 ()’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서로 반대가 되는 쌍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16가지 마음이 된다. 다만 위축된 마음과 산만한 마음, 탁월한 마음과 저열한 마음은 단어가 다르기는 하지만 반대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심념처를 마음 보는 수행이라고도 한다. 그래서일까 대념처경에서도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는 것(citte cittānupassī)”이라고 했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노팅(noting)한 것을 왓칭(watching)한다.’가 될 것이다.

 

분노를 예로 든다면, 노팅(noting)한다는 것은 분노가 있는 마음은 분노가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가 될 것이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 나에게 분노가 있구나!’라고 아는 마음이다. 이는 경에서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sadosa vā citta sadosa cittanti pajānāti)”가 된다. 이렇게 알게 되면 분노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더 이상 분노의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알아차린 그 마음도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이를 왓칭(watching)’이라고 한다. 이 말은 분노가 없는 마음은 분노가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경에서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vītadosa vā citta vītadosa cittanti pajānāti)”라고 되어 있다.

 

대념처경 심념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은 두 번 알아차리라고 했다. 이것은 노팅(noting)한 것을 왓칭(watching)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 두 번 알아차리라고 했을까? 아눌라 스님에 따르면 분노를 알아차렸을 때 그 상태의 마음에 대하여 , 내마음이다!’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분노의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닌 것을 아는 마음 역시 알아차림의 대상이다.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어떤 대상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노팅한 것을 왓칭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도 취하지 않으려고 자꾸 되비쳐 보는 것이다.

 

분노의 독화살을 맞았을 때

 

수행처에서 늘 듣는 말이 있다.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이 일어난 줄 알고 즉시 주관찰대상으로 복귀하라고 한다. 그럼에도 망상에 대하여 사띠하라고 하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치 화가 났는데 화에 대하여 사띠하라는 것과 같다.

 

화를 사띠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더욱 더 화가 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A5.161)라고 했다. 한마디로 화에 대하여 사띠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불선업의 원인이 되는 불선법에 주의기울이지 말라는 것과 같다.

 

화가 났을 때 화를 내면 더욱더 화가 난다. 어떤 이는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한다. 화를 냄으로써 스트레스를 풀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화는 가학성(加虐性)’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S1.71)라는 게송이 잘 말해준다.

 

화를 내면 화가 화를 부른다. 누군가 사람을 잘못 했다고 야단치고 있다. 그런데 잘못하면 가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화를 내면서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마치 욕먹은 자를 욕하는 것과 같고,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는 것과 같다. 마치 사디스트(Sadist)와 같다. 가학함으로 인하여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라고 했는데, 이는 분노에 대하여 꿀과 같은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노는 결국 자기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뿌리에 독이 있다.’라고 한다.

 

화는 독과 같은 것이다. 화를 낸다는 것은 독화살을 맞은 것과 같다. 독화살을 맞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독화살을 맞은 이유를 알려고 하다가는 미쳐 알기도 전에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다. 지금 화가 났다면 독화살을 맞은 것이다.

 

독화살은 즉시 뽑아 버려야 한다. 그것이 사띠하는 것이다. 사띠는 선법(善法)이다. 불선법은 사띠하는 것이 아니다.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과 같은 불선법은 사띠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팔정도에서는 삼마사띠(sammasati)라고 하는데 이는 올바른 사띠(正念)’를 말한다. 이렇게 마음관찰로 탐욕의 독화살, 분노의 독화살, 어리석음의 독화살을 뽑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야도가 하고자 했던 말이고, 수행을 오래 했던 분이 알려주고자 했던 말일 것이다.

 

세상은 넓고 스승은 많다

 

하나의 의문을 가지고 마치 화두 든 것처럼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한사람에게만 의지해서는 안된다. 또한 한수행처에서만 있어서도 안된다. 한스승이나 한수행처에만 있다 보면 매몰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화엄경 입법계품을 보면 선재동자가 스승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은 53명이다. 세상의 다양한 스승이라고 볼 수 있다. 선지식중에는 외도나 창녀도 있다. 어느 누구 하나 스승이 아닌 사람이 없다. 반면교사라 하여 저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라며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순례를 떠났던 선재동자는 본래 스승에게로 되돌아 온다. 순례해 보니 본래 스승만한 스승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이 있다. 구도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서 배운다. 도움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구도의 길로 가는 사람에게는 배움의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넓고 스승은 많다.

 

 

2019-08-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