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일석오조(一石五鳥)의 테라와다 오체투지 수행공덕 다섯 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9. 9. 1. 13:42

 

일석오조(一石五鳥)의 테라와다 오체투지 수행공덕 다섯 가지

 

 

불자들은 절에 가면 절을 한다. 절에 가면 대웅전과 같은 대법당뿐만아니라 이 법당 저 법당 다니면서 참배한다. 한국의 절에는 산신각 또는 삼성각 등으로 불리우는 한국고유의 신앙이 있는 전각도 있기 때문에 신심 있는 불자들은 빠뜨리지 않는다. 지극한 신심으로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면 아름답다.

 

한국방식 오체투지

 

어떤 이들은 건강삼아 절을 하기도 한다. 매일 108배를 하면 불심도 증장시킬 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도 챙길 수 있어서 일석이조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어떤 스님은 절을 잘 하는 방법에 대한 책을 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절하는 방법을 지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자들에게 절하기는 단순히 예경의 차원을 뛰어 넘는다.

 

한국불교에서 절하기에 대하여 오체투지라고 한다. 양무릎과 양팔꿈치, 그리고 이마가 바닥에 닿는 방식을 말한다. 오체투지는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자세이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예경할 때 이와 같은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체투지는 스님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스님을 뵈올 때 오체투지 하여 지극히 예를 표하는 것이다. 어느 스님은 자신을 만나려거든 삼천배를 하고 오라는 말도 했다.

 

한국형 오체투지는 큰 동작을 필요로 한다. 먼저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서 합장한 다음 그대로 내려 앉는다.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두 발바닥은 서로 교차한다. 그리고 앞으로 숙여 이마가 바닥에 닿게 하는데 그때 두 손바닥을 뒤집어 하늘을 향하게 한다. 이것이 한국불자들이 절하는 방식이다. 이런 동작을 108번도 하고, 때에 따라 천번, 이천번, 삼천번도 한다.

 

절은 공손하게 하는 것이다. 공손하게 세 번 하는 것이 보통이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하여 예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아홉번 하기도 한다. 이는 띠사라나(三歸依)가 세 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구배 이상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마치 운동하듯이 108도 하고 그 이상도 한다. 그래서일까 생전의 법정스님은 굴신운동(屈伸運動)’이라고 말한 바 있다.

 

티벳방식 전체투지(全體投地)

 

한국에 오체투지가 있다면 티벳에는 전체투지(全體投地)가 있다. 오체투지가 정지된 자세에서 사뿐하게 절하는 방식이라면 전체투지는 매우 역동적이다. 두 손을 모은 다음 머리 위로 치켜 올린다. 그때 합장한 두 손을 붙이면 안된다. 두 손바닥사이에 공간이 있어서 연꽃모양이 된다. 이어서 이마와 코와 가슴을 삼단 터치한다. 신구의의 삼업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삼단터치가 끝나면 온몸을 바닥에 던진다. 입고 있는 옷이나 몸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나무토막이 쓰러지듯이 바닥에 쓰러진다. 사지를 쭉 펴고 최대한 몸을 바닥에 밀착한다. 그렇다고 그 상태로 오래 있지 않는다. 곧바로 일어나야 한다. 전체투지한 상태로 오래 있으면 뱀으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티벳의 전체투지는 수메다존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다. 디빵까라부처님(燃燈佛)이 지나갈 때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몸을 아끼지 않고 물웅덩이에 몸을 던져 부처님이 등을 밟고 지나가게 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든지 절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절을 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두 발에 예경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자세는 일단 무릎을 꿇어야 한다.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도 부족하여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이런 장면이 초기경전에서 보인다.

 

숫따니빠따에 따르면 외도 유행자 싸비야는 부처님에게 설법을 듣고 인생에 대한해법을 얻었다. 싸비야가 부처님으로부터 원하는 답을 들었을 때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stn.539)”라고 말했다. 인생의 갈림길에 있는 수행자에게 희망이 생긴 것이다. 이에 싸비야는 부처님에게 귀의했다.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마치 아름다운 흰 연꽃이 물에 오염되지 않듯이, 당신은 공덕과 죄악, 둘 다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영웅이시여, 두발을 뻗으십시요. 싸비야는 스승께 예배드립니다. (stn5.47)라고 말했다.

 

외도 유행자 싸비야는 두 발에 예경했다.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여 스승의 발아래 엎드려 절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도 오체투지라고 볼 수 있다.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은

 

테라와다불교에도 오체투지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오체투지와 티벳의 전체투지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가장 큰 차이라면 앉아서 오체투지한다는 것이다. 또 손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두 손을 모아 가슴으로 가져 간다. 티벳에서는 정수리 위로 놓는다. 그러나 테라와다에서는 이마에 댄다.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청정도론에서 승수념에 대한 설명을 보면 모든 세상 사람이 양 손을 머리에 얹고 합장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예경받을 만하고라고 한 것이다. (Ubho hatthe sirasmi patiṭṭhapetvā sabbalokena kayiramāna añjalikamma arahatīti)”(Vism.7.97)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거룩한 성자에게 예경하는 방식이 설명되어 있다. 두 손을 합장한 다음 머리에 얹는 것(sirasmi patiṭṭhapetvā)’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빠알리어 시라(sira)는 머리(the head)를 말한다. 시라와 관련하여 냐나몰리는 “in placing both hands [palms together] above the head,”라고 번역했다. 두 손을 머리에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양손을 머리에 얹어라고 번역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양 손을 머리에 얹고라고 번역했다. 공통적으로 시라에 대하여 머리로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어 시라(sira)는 머리를 뜻한다. 그렇다면 어디부터 머리일까? 보통 머리라고 말하면 머리털이 나는 곳을 말하기 쉽다. 그러나 앞이마도 머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앞이마를 뜻하는 영어 ‘forehead’로도 알 수 있다. 머리라고 하면 정수리(crownhead)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수리를 포함하여 머리털 난 부분 전체를 머리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청정도론에서 언급된 시라라는 말은 정수리라기 보다는 이마(forehead)에 가깝다.

 

합장한 두 손을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한국방식, 티벳방식, 테라와다 방식으로 갈린다. 테라와다 방식에서는 합장한 두 손을 머리에 둔다고 했다. 그러나 티벳과 같은 정수리는 아니다. 앞이마로 보아야 한다. 이는 근거가 있다.

 

두 손의 위치에 대하여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는 “one's hand in añjali [palms together, fingers flat out and pointed upward] are raised to the forehead “(Prostration, 영문판 위키) 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빠알리어 ‘añjali’에 대하여 합장한 두 손을 위로 올리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이마까지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빠알리어 시라가 정수리를 뜻한다기 보다는 앞이마(forehead)로 보는 이유이다.

 

오체투지하는 네 가지 목적

 

불교에서 절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존경의 의미로 절하는 것이다. 인사라는 것은 본래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다. 만약 존경하지 않는다면 절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존경도 존경 나름이다. 존경의 강도가 셀수록 고개가 더 숙여 질 것이다. 매우 존경한다면 무릎을 끓어 절할 것이다. 지극히 존경한다면 상대방의 두 발에 예를 표할 것이다. 그것은 오체투지로 나타난다.

 

불교에서 오체투지 하는 것에는 네 가지 목적이 있다.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첫 번째는 상대방에게 보시하고 존경하는 의미로 절하는 것이고 (an experience of giving or veneration), 두 번째는 오염된 의식을 정화하기 위하여 절하는 것이고(an act to purify defilements, especially conceit), 세 번째는 명상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절하는 것이고(a preparatory act for meditation), 네 번째는 공덕을 쌓기 위하여 절하는 것(an act that accumulates merit)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네 절하기 네 가지 이익이라고 한다.

 

네 가지 오체투지 이익을 보면 어느 절하는 방식에도 적용이 된다. 한국방식 오체투지, 티벳방식 전체투지, 테라와다방식 오체투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체투지 네 가지 이익을 보면 그 어디에도 운동하기 위하여 절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운동하기 위하여 절한다면 굴신운동에 해당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수련기관이 있다. 십여년전 불교를 본격적으로 알기 전에 어느 기수련 단체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108배를 했었는데 운동개념으로 했다. 두 팔을 크게 좌우로 벌린 다음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합장자세로 절했는데 오체투지방식이었다. 한국불교의 오체투지와 차이 나는 것은 과도한 팔동작에 있었다. 마치 무속인이 절하는 것과 같은 방식을 말한다.

 

테라와다식 절수행의 다섯 가지 이익

 

오체투지 네 가지 이익 중에 세 번째가 명상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절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절을 수행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절하는 것도 일종의 수행으로 보기 때문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좌선이나 행선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삼배를 하고, 또 좌선이나 행선이 끝나면 반드시 삼배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오체투지하는 것에 대하여 다목적으로 활용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수행일 것이다. 절하는 것도 수행이라 보아 절수행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108배를 하고, 더 나아가 천배, 이천배, 삼천배를 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절하는 것은 사마타이기 쉽다. 절하는 것 그것 자체에 집중하면 사마타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도 오체투지는 수행의 방편으로도 활용된다. 이른바 테라와다식 절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테라와다식 절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우 꾼달라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이익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선업 :

공경을 표하기 위해 절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심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다.

 

두 번째 선업:

공경을 표하기 위해 몸을 굽힘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신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다.

 

세 번째 선업:

평화로움 또는 편안함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수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다. 절을 하면서 가슴이나 등이 아파서 통증, 통증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으로 수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다.

 

네 번째 선업:

부처님께 절하면서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 들음, 들음이라고 알아차리면 법념처 수행의 공덕을 쌓는다.

 

다섯 번째 선업:

 마음을 부처님께 향하고 경의를 표했기 때문에 부처님을 공경한 공덕을 쌓는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128)

 

 

절수행하면 위빠사나와 사마타 수행 모두 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매우 빠른 속도로 한다면 굴신운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동작 한동작 알아차림을 유지했을 때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하여 불수념(佛隨念)이 있다. 부처님의 아홉 가지 공덕을 생각하면서 절 한다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는 사마타 수행이 된다.

 

어떻게 해야 절을 잘 할 수 있을까?

 

테라와다식으로 오체투지 하면 다섯 가지 선업공덕을 쌓을 수 있다. 여기에 운동개념은 들어가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천천히 하기 때문이다. 운동은 빠른 속도가 특징이다. 최대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테라와다 절수행에서 굴신운동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을 잘 할 수 있을까?

 

정평불에서 지난 8 17일과 18일 양일간 수련회를 다녀왔다. 장소는 경남 함양 안의면에 있는 고반재이다.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있는 곳으로 종림스님이 살고 있는 수행처이다. 이틀째 되는 날 아침에 수행법문이 있었다.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수행한 바 있는 김진태 선생이 법문을 하고 수행지도 했다. 그 중에 인상적인 것은 절수행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불자들은 한국방식 오체투지에 익숙하다. 그러나 티벳의 전체투지방식이나 테라와다식 오체투지 방식은 생소하다. 김진태 선생은 테라와다식 오체투지에 대하여 시범을 보이며 설명했다.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앉아 있어야 한다. 서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체투지 하는 방식을 말한다. 앉을 때는 최대한 낮에 앉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두 발바닥을 바닥에 가까이 해야 한다. 한국방식처럼 교차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합장한 두 손을 이마로 올린다. 합장한 두 손을 이마로 올렸을 때 두 엄지손가락이 이마에 닿는다. 올릴 때는 천천히 올리라고 했다. 왜 그럴까? 수행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올림으로 인하여 법을 보는 것이다. 올릴 때 의도를 알아차린다. 올리려는 의도를 분명히 알아차림 함으로써 마음관찰(心念處)을 하는 것이다. 두 손을 천천히 이마로 올릴 때 가벼운 법의 성품을 본다. 두 손을 내릴 때는 무거운 법의 성품을 본다. 이런 법의 성품은 중력의 법칙과는 무관한 것이다.

 




합장한 두 손을 올릴 때는 가벼운 성품이다. 가볍기 때문에 풍대와 화대가 두드러진다. 올릴 때 두 손을 모양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모양을 본다면 관념으로 보는 것이다. 올릴 때 가벼움을 느낀다면 풍대와 화대를 보는 것이다. 반대로 두 손을 내릴 때는 무거운 성품이다. 무겁기 때문에 지대와 수대가 두드러진다. 두 손을 올리고 내림에 따라 사대라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몸관찰(身念處)하는 것이다.

 

절수행 할 때는 최대한 천천히 해야 한다. 천천히 해야 알아차림하기 쉽기 때문이다. 합장한 두 손을 이마에 터치한 다음 오체투지하기 위해서는 몸이 그대로 아래로 내려 가야 한다. 이때 이마에 터치한 두 손은 이마에서 약 한뼘정도 떼야 한다. 그 상태에서 그대로 숙이는 것이다. 허리를 숙여 머리가 바닥에 닿으면 두 손은 떼어서 바닥에 놓는다. 그렇다고 한국방식처럼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지 않는다.

 




허리가 굽혀질 때도 성품을 볼 수 있다. 내려 가는 것이기 때문에 지대와 수대라는 무거운 성품을 볼 수 있다. 반대로 허리를 들 때는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풍대와 화대라는 두드러진 성품을 볼 수 있다. 절 하나 하는 것으로 지, , , 풍이라는 사대를 볼 수 있다. 이는 몸관찰에 해당되는 것으로 위빠사나 수행이다.

 

 



수행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실재하는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절하는 것으로도 실재하는 성품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생멸하는 것이다. 움직임을 관찰했을 때 움직임과 관찰하는 마음만 있게 된다. 움직임은 몸에 대한 것이고, 관찰하는 것은 마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명색과정만 있을 뿐이다. 또한 움직임은 원인이고, 관찰하는 것은 결과이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절하면서 합장한 두 손을 들거나 내릴 때, 허리를 굽히거나 펼 때 역시 움직임과 관찰하는 마음만 있게 된다. 오온이 오로지 정신-물질적 과정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될 때 나, , 사람, 중생이라는 관념은 자리 붙이지 못한다. 오로지 일어남과 사라짐만 있을 뿐이다. 궁극적 실재를 본다는 것은 결국 생멸을 본다는 말과 같다.

 

스승은 절하는 모습만 보아도 안다

 

미얀마 수행처에 가면 절을 여러 번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좌선이나 행선에 들어가기 전에 상당한 시간 절을 한다. 매우 천천히 한다. 한동작 한동작 알아차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 최대 구배 할 것이다.

 

한국 오체투지도 천천히 하면 동작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위빠사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빠른 속도로 오체투지한다면 절하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사마타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굴신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인터뷰시간이 있다. 스승에게 보고할 때는 삼배를 한다. 무릎 꿇고 앉은 자세에서 몸을 구부리고 공손하게 삼배를 한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승가에 대하여 절하는 것이다. 동시에 부처님을 대신하여 지도하는 스승에게 삼배하는 것도 된다. 그런데 스승은 제자가 삼배하는 것만 보고서도 수행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는지 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 꾼달라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수행자가 공경을 표하는 것을 잘 알아차리면서 약간 굽히고 다시 약간 굽히는 동작이 계속되는 것을 알았다면,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알아차림이 약한 수행자는 재빨리 절을 할 것이다. 스승은 빨리 절하는 것을 좋아할 것인가, 천천히 절하는 것을 좋아할 것인가? 스승은 천천히 절하면서 많이 알아차리는 것을 좋아한다.

 

스승은 수행자가 절하는 것을 보면 알아차림이 있는지 아닌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스승은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지속적인지 아닌지를 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강한지 아닌지를 안다. 스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알아차리면서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기뻐한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119)

 

 

스승은 수행자가 천천히 알아차리면서 절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스승은 절하는 동작만 보아도 알아차림이 강한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승이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절하는 모습만 보고서도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석오조(一石五鳥)

 

절수행하면 여러가지 이점이 있다. 실재하는 성품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절수행하는 것 자체가 위빠사나와 사마타라는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를 관찰하면 신념처가 되고, 편안한 느낌을 관찰하면 수념처가 되고, 굽히려는 의도를 관찰하면 심념처가 되고, 주변의 소리를 듣고 들림이라고 관찰하면 법념처가 된다. 여기에다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께 예경하면 불수념이 되어 사마타수행이 된다. 절수행함으로 인하여 다섯 가지 이익을 얻을 수 있어서 일석오조(一石五鳥)라고 볼 수 있다.

 

 

2019-09-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