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명상이 일상이 되도록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 28. 21:31

 

명상이 일상이 되도록

 

 

처음으로 앉아 보았다. 사무실에 명상홀을 만들어 놓고 처음 앉아 본 것이다. 작년 7월 직지사 위빠사나 템플스테이 집중수행이후 제대로 앉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고 있는 일도 있고 사정도 있어서 집중수행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집에서 할 수도 있으나 집중이 되지 않는다. 방법은 사무실밖에 없다. 마침 사무실 공유하는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는 바람에 사무실 활용차원에서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처음으로 앉아 보았는데

 

일단 앉고 보아야 했다. 매일 삼십분 또는 한시간 앉아 있기로 스스로 약속했으니 지켜야 한다. 오늘이 그날이다. 만반의 준비는 갖추어져 있다. 앉을 수 있는 공간은 마련되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

 

방석은 작년 11월 불교박람회 때 사 온 것으로 준비했다. 본래 자동차용 방석이다. 통풍이 잘 되는 망사형 방석이다. 절에서 보는 두껍고 푹신한 것이 아니다. 두께가 10여밀리 밖에 안되는 얇은 것이다. 앉으면 거의 땅바닥에 닿는 듯한 느낌이다. 미얀마에서 본 방석 같은 두께이다.

 




미얀마선원에서는 방석 두께가 매우 얇아서 오래 앉아 있다보면 엉덩이가 배기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불자들은 두 개 또는 세 개를 포개서 앉는다. 그러나 미얀마사람들이 그렇게 앉는 것을 보지 못했다.

 

방석 두께가 얇으면 통증을 느끼기 쉽다. 평좌했을 때 두 발의 허벅지를 바닥에 바싹 붙이는데 방석 두께가 얇으면 통증이 일어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 통증은 귀한 손님이라고 했다. 손님이 오면 맞이해야 하듯이, 통증이 오면 손님으로 간주하고 맞이해야 한다. 이번 좌선에서도 통증이 찾아왔다. 앉은지 삼십분가량 되었을 때 찾아온 것이다.

 

스톱워치를 사용하여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하시계통 위빠사나 선원에서는 한시간 좌선에 한시간 행선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선원에서는 짝수시간에 좌선을 하고 홀수 시간에 행선을 한다. 그래서 한시간 앉아 있기로 한 것이다.

 

한시간 앉아 있기 위해서는 스톱워치를 사용해야 한다. 스마트폰 알람앱에 스톱워치 기능이 있다. 한시간으로 맞추어 놓고 스타트 버튼을 누르니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배운대로 배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짐에 대한 것이다. 호흡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럴경우 내버려 둔다. 그러다 보면 작은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일단 감지되면 놓치지 않고 따라 가야 한다. 이후로는 부품과 꺼짐을 계속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생각이 치고 들어 오면 생각이 꼬리를 물어 집을 짓는다. 즉시 알아차리고 주관찰대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잡념과의 전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망상이 일어났을 때 망상임을 알아 차리는 것도 수행이다. 그런데 망상은 일어 날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초보수행자에게 망상은 불쑥불쑥 찾아오는 친구와도 같은 것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 오로지 의식의 문 하나만 열어 놓고 다른 다섯 가지 감각의 문은 모두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뽀띨라 장로 이야기가 떠올랐다.

 

장로 뽀틸라와 관련된 이야기

 

법구경 282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장로 뽀틸라와 관련된 이야기(Pothilattheravatthu)’ (DhpA.III.417-421)가 있다. 장로 뽀틸라는 삼장법사였다. 교학과 교리에 관한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프로페셔널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로에게서 배웠다. 그에 비례하여 장로의 아상도 높아만 갔다. 어느 날 부처님은 이 수행승은 스스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내가 그를 일깨우리라.”라고 생각했다.

 

장로는 삼장법사 타이틀을 가졌지만 수다원단계도 이르지 못했다. 교학만 했을 뿐이지 수행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장로에게 뚯차 뽀틸라라고 불렀다. 여기서 뚯차(tuccha)라는 말은 텅 비었음(empty: 空虛的)’이라는 뜻이다. 삼장을 섭렵하여 삼장법사가 되었는데 텅 빈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뽀틸라장로는 삼장에는 통달했지만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텅빈 사람 취급받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뚯차 뽀틸라여, 오라. 뚯차 뽀틸라여, 인사하라. 뚯차 뽀틸라여, 가라.”라고 말했다. 뽀틸라는 이 말에 자극받았다. 부처님께서 반복해서 뚯차라고 부른 것은 틀림없이 선정 등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120요자나나 떨어진 곳에 서른 명의 수행승들이 사는 곳을 찾아 갔다. 먼 곳으로 찾아가서 선정수행을 하고자 한 것이다.

 

장로는 먼저 그 모임의 대장로에게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고서는 존자여, 나의 의지처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장로는 벗이여, 그대는 법사가 아니오. 우리는 당신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리 말합니까?”라며 거절했다. 서른 명의 모임은 모두 아라한이었다. 대장로는 뽀틸라가 배움이 많아 아상이 높은 것을 알고 있었다. 먼저 아상을 꺽어 주어야 했다. 그래서 보다 젊은 장로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도 또한 똑 같은 소리를 하며 더 젊은 장로에게 보냈다. 최종적으로 일곱 살 먹은 사미 앞에 보내졌다.

 

칠세 아라한에게

 

일곱 살 먹은 사미는 아라한이었다. 칠세아라한인 것이다. 어떻게 칠세아라한이 가능한 것일까? 테라가타를 보면 칠세아라한에 대한 게송이 있다. 밧다장로의 게송이 그것이다. 이는 “생후 겨우 칠 년 만에 구족계를 나는 받았고,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여법한 훌륭한 가르침이여!(Thag.479)라는 게송으로 확인된다.

 

칠세아라한이 된 것은 전생에서부터 수행했기 때문이다. 전생의 수행공덕으로 말을 할 줄 알고 말의 의미를 알고 세상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는 칠세가 되자 아라한이 된 것이다. 깨달음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다.

 

칠세 아라한과 관련하여 법구경 260번 게송에서도 인연담이 있다. 어느날 부처님께서 “한 장로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대들은 보지 못했다고?” 라고 재차 물었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한 사미를 보았습니다.” 라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는 사미가 아니라 장로이다.”라 하였다. 수행승들은 믿기지 않는 듯 “세존이시여, 지나치게 작았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이가 들었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고 장로의 자리에 앉았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는다. 진리를 꿰뚫고 많은 사람에 대하여 불살생을 확립하면, 그를 장로라 한다.(DhpA.III.387-388)라고 했다.

 

깨닫는데 있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병아리가 부화할 때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손위인 것처럼, 먼저 아라한이 된 칠세의 사미가 깨달음에 있어서는 손위가 된다.

 

삼장법사 뽀틸라 장로는 칠세아라한에게 보내 졌다. 장로는 자신의 교만을 꺽고자 사미에게 합장하며 참사람이여, 나의 의지처가 되어 주십시오.”라며 간청했다. 이에 사미가 난감해하자 재차 삼차 간청했다. 사미는 하는 수없이 존자여, 만약에 훈계하는 것을 참아 낸다면, 그대의 의지처가 되어 주겠소.”라고 말했다. 장로는 감사한 마음으로 참사람이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불속에 뛰어들라면 뛰어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삼장법사 뽀틸라 장로는 칠세아라한인 사미에게 배유고자 했다. 사미는 먼저 호수를 가리키며 존자여, 옷을 입은 채로 저 호수에 뛰어드십시오.”라고 말했다. 사미는 그의 두겹으로 된 아래-윗옷을 입고 있는 것을 알고서도 훈계를 참아내는가를 조사하기 위해 말한 것이다.

 

장로는 사미의 말대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옷이 젖으려 할 때 나오라고 말했다. 장로의 진정성을 본 사미는 장로에게 하나의 가르침을 알려 주었다. 사미는 존자여, 개미굴에 여섯 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굴로 도마뱀이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잡으려면 다른 구멍을 막고 여섯 번째 구멍은 놔두고 그 구멍으로 잡아야 합니다.”(DhpA.III.417-421)라고 말했다. 이런 말은 수행과 관련된 말이다. 교학적으로 안다고 해도 실천수행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미는 이와 같이 그대도 여섯 감관의 문 가운데 남은 다섯 감관의 문을 닫고 정신의 문에 집중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사미는 장로에게 감각기관을 단속해야 함을 강조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서 정신의 문 하나만 열어 놓고 나머지 눈, , 코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모두 닫아 놓아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하려면 조용한 곳에 앉아 있어야 한다. 마음의 문은 닫을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의 문 하나만 열어 놓은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에 대한 가르침이다. 먼저 앉아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지혜가 생겨난다. 교리나 교학으로 아는 지식과 다른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는 지혜를 말한다.

 

부처님은 이런 장면을 멀리서 천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서는 명상에서 광대한 지혜가 생기고 명상하지 않으면 광대한 지혜가 부서진다. 성장과 퇴락의 두 가지 길을 알아서 광대한 지혜가 성장하도록 거기에 자신을 확립하라.”(Dhp.282)라고 게송으로 말했다.

 

통증과 씨름하며

 

명상을 하면 지혜가 생겨난다. 이는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그런 지혜는 위빠사나의 지혜를 말한다. 칠청정에 따른 위빠사나16단계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좌선을 하는 것은 지혜를 생겨 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앉아 있다 보면 통증이라는 손님이 찾아오는데 물리치지 말고 맞아 주면 된다. 통증은 원하지 않았는데 찾아와서 떠난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그래서 가능하면 자세를 바꾸지 말고 통증을 관찰하라고 했다. 통증이 쑤시는지 쓰리는지 찌르는지 제3자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라는 것이다.

 

통증이 심하면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평좌했을 때 거의 대부분 오른쪽 다리가 저리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해 간다. 이때 이러다가 혹시 불구가 되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참고 견디며 관찰하다 보면 슬며시 사라진다. 통증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다.

 

조용한 곳에서 눈을 감고

 

무엇이든지 처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처음 앉아 보았으니 이제 매일 앉게 될 것이다. 나른한 오후에 앉을 예정이다.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면 일손도 잡히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무기력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든가 졸기도 한다. 유튜브를 보면 마음이 산란해진다. 또 활력을 주기 위하여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걷기도 한다. 그러나 방석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눈을 감기 때문일 것이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 중에 오로지 정신의 문 하나만 열어 놓고 나머지를 모두 닫아 놓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법구경인연담에서도 칠세아라한은 뽀틸라장로에게 가장 먼저 감각기관을 단속하라고 했다. 이는 이유가 있다. 니까야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은 바로 현세에서 즐겁고 기쁘게 지낸다. 모든 번뇌의 소멸에 근본이 되는 것도 그것에서 시작한다. 세 가지 원리란 무엇인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S35.239)라는 정형구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근본 원리 세 가지는 여섯 감각기관 단속, 음식절제, 그리고 늘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수행을 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감각기관을 단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어야 한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이 나무 밑이다. 이것들이 텅 빈 집이다.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S43.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무실 바닥은 텅 빈 집과 같고 오두막과 같은 곳이고 나무밑이나 같은 곳이다.

 

명상이 일상이 되도록

 

사무실에 중앙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으면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다. 선원 명상홀에 앉아 있는 것과 다름없다. 도심의 개인사무실에서 명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다. 햇수로 13년째 머물고 있지만 이렇게 앉아서 한시간 이상 있기는 처음이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 중에 오로지 정신의 문 하나만 열어 놓고 나머지를 모두 닫아 놓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나 정신의 문으로 들어오는 생각은 막을 수가 없다. 생각이 망상이 되면 즉시 알아차려서 복부로 돌아와야 한다. 호흡과 관련된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에 집중하다 보면 호흡이 전면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를 경전에서는 빠리무캉(parimukha)’이라고 한다.

 

빠리무캉은 얼굴 주변에또는 전면(前面)라는 뜻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parimukha sati upaṭṭhapetvā)(D22)가 된다. 복부와 관련된 호흡이기 때문에 얼굴을 포함하여 몸 앞에서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느끼게 된다. 전면에 사띠가 확립되는 것이다. 망상이 일어나면 재빨리 빠리무캉사띠가 되어야 한다. 망상임을 알아차리고 전면에 사띠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유지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다리가 저림에 따른 통증이 일어나도 남의 다리 보는 것처럼 관찰할 수 있다.

 

일단 앉아야 한다. 앉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하루에 한번은 앉아야 하고, 한번 앉으면 한시간은 앉아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자세를 바꾸지 말고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현상에 대한 생멸을 관찰할 수 있다. 매일 밥먹듯이, 매일 앉아 있는 것이다. 명상이 일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은 그 첫날이다. 나는 매일매일 쉬지 않고 할 수 있을까?

 

 

2020-01-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