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앉는 즐거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4. 10:19

 

앉는 즐거움

 

 

즐거움이 하나 생겼다. 앉는 즐거움이다.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하나 만들었다. 만든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명상공간을 만든지 처음으로 사무실에서 좌선시간을 가졌다. 전에 집중수행기간 중에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해 보고자 했다.

 

이제까지 간헐적으로 앉아 있어 보았으나 일상에서 앉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집에서 앉아 보고자 했으나 집은 일종의 편히 쉬는 공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잘 되지 않는다. 또 집에는 식구가 있어서 앉기가 곤란하다. 방이 여러 개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집에서는 명상을 하기가 힘들다. 다만 가벼운 경행하는 정도에 그쳤다.

 

인프라를 갖추어 놓으니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든 것에 대하여 어느 분이 자랑할 정도로 인프라를 갖추어 놓았다고 글을 남겼다. 이 말에 크게 고무되었다. 더구나 자랑할 정도라 하니 자랑할 정도가 되는 것도 같았다.

 

사무실은 일하는 공간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 명상하는 공간으로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사무실을 공유하는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는 바람에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다가 불현듯 명상공간을 꾸며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즉시 실천에 옮겼다.

 

사무실 중앙공간을 명상공간으로 만들었다. 가로와 세로가 3미터 이내로 약 2.8평의 공간이 생겼다. 명상공간을 방처럼 꾸며 놓았다.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카페트를 가져와서 깔았다. 방석도 두 개 가져다 놓았다. 운치 있게 보이기 위하여 화분도 옮겨 놓았다.

 




명상공간에 들어 갈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해 놓았다. 사방에 칸막이가 되어 있어서 앉아 있으면 조용한 암자와 다를 바 없다. 더구나 누가 찾아올 사람도 없어서 방해받지 않는다. 앉아 있다 보니 좌선이 저절로 잘 될 것 같았다.

 

일주일전 처음으로 앉아 본 이래 매일 앉아 있다. 가면 갈수록 앉는 빈도가 높아져서 요즘은 틈만 나면 앉는다. 그렇다고 한시간 앉아 있기 힘들다. 고작 이삼십분에 지나지 않지만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눈을 감으면 형상이 차단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명상공간을 만든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호흡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그동안 집중수행 두 번을 가졌다. 선원에서 하루종일 명상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로지 명상만 하는 것은 아니다. 법문을 곁들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명상만 한다면 발전이 없을 것이다. 법문을 듣고 수행지도를 받아야 진척이 있다.

 

위빠사나 선원에서는 좌선과 행선, 법문과 수행지도를 겸하고 있다. 홀로 앉아 있으면 좌선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도를 받을 수 없다. 전에 들은 법문과 지도받은 것을 되살려야 한다. 홀로 명상을 하지만 때가 되면 집중수행에 참가하여 지도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홀로 앉아 있다 보니 물어볼 사람이 없다. 특히 호흡과 관련된 것이다.

 

좌선을 할 때 호흡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라고 했다. 배의 부풂과 꺼짐을 주의 깊게 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의 모양은 보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아야 할까이에 대하여 담마마마까 법요집에서는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 ‘일어남과 사라짐의 진행과정을 관찰할 때, 배의 겉모양은 완전히 무시해야 합니다. 숨을 들이 쉴 때 배속의 공기가 움직이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때 움직임이 뚜렷하면 뚜렷함을 싸띠해야 하고, 아주 강하면 강함을 싸띠해야 하고, 약하면 약함을 싸띠 해야 합니다. 불분명하면 불분명함을 싸띠 해야 하고, 길면 긴 것을 싸띠해야 합니다. 그리고 짧으면 짦음을 싸띠해야 하고, 거칠면 거친 움직임을 싸띠해야 합니다. 이때 배의 모습은 겉모양(paññatti)일 뿐입니다. 위빠사는 겉모양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실제성품(paramattha)을 관찰하는 것입니다.”(담마마마까 법요집, 앉아서 하는 수행)

 

 

법요집에서는 크게 두 가지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하나는 겉모양이라 하여 빤냐띠(paññatti)를 말하고, 또 하나는 실제성품이라 하여 빠라맛타(paramattha)를 말한다. 위빠사나를 하는 목적은 겉모양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실제성품을 보자는 것이다.

 

복부를 관찰할 때 겉모양을 보지 말자고 했다. 배속에서 움직이는 느낌이 있는데 바로 그 느낌을 관찰하자는 것이다. 그 느낌이 바로 성품이라고 했다.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한다는 것은 실제하는 성품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사대관찰을 의미한다.

 

왜 복부를 관찰하는가

 

마하시전통에서 복부를 관찰하는 것을 주관찰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는 코의 호흡을 관찰대상으로 하는 전통과는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한 인연담이 있다.

 

마하시사야도가 28세때 제따완사야도의 지도하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재가신도가 단기출가하여 함께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다가 복부의 불러옴과 꺼짐에 주목했다. 그는 복부의 움직임은 풍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복부관찰을 주관찰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복부관찰로 수행에 큰 진전을 이루었고 또한 지혜도 얻었다. 이러한 성과를 다른 수행자에게도 권하여 똑 같은 효과를 보았다. 이런 사실을 스승인 제따완사야도에게 보고 했는데, 사야도는 이를 승인해 주었다. 보고를 받은 제따완사야도는 대념처경에 근거해서 볼 때, 복부의 움짐임을 관찰하는 것은 사대관찰과 일치하다고 본 것이다.

 

사대는 지대, 수대, 화대, 풍대를 말한다. 지대는 딱딱함과 부드러움, 수대는 유동성과 응집성, 화대는 따뜻함과 차가움, 풍대는 움직임과 진동이라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사대의 고유한 특징에 대하여 실제성품이라고 하고 빠알리어로는 빠라맛타라고 한다. 또 다른 말로 궁극적 실재라고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실제하는 성품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반면 대상에 집중하면 사마타가 된다. 이른바 아나빠나사띠라 하여 호흡수행이 있는데 단지 마음을 코의 호흡의 들어오고 나가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사마타수행이 된다는 것이다.

 

아나빠나사띠가 위빠사나 수행이 되려면 성품을 관찰해야 한다. 코의 호흡을 관찰하되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공기가 콧구멍에 닿음을 관찰한다면 위빠사나 수행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닿는다는 말은 사대관찰과 관련이 있다.

 

호흡수행할 때 단지 들숨과 날숨에만 포커스를 맞춘다면 이는 들어옴과 나감만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개념이 된다. 이렇게 호흡이 들어오고 나감에만 포커스를 맞추다 보면 다리가 저려도 무시할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다리가 저리면 저리는 느낌을 관찰하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통증을 관찰하는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다 다리가 저리면 통증관찰로 옮겨 가야한다. 평소에는 복부가 주관찰대상이지만 복부의 움직임보다 더 강한 대상이 나타났을 때 주관찰대상을 바꾸어야 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오로지 한대상에 몰입한다면 사마타라는 것이다.

 

사마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위빠사는 실제하는 성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사마타의 길을 갈 것인지 위빠사나의 길을 갈 것인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 실제하는 성품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개념을 대상으로 하여 개념에 몰입하면 사마타이고, 실제하는 성품을 대상으로 하여 실제하는 성품을 관찰하면 위빠사나가 된다. 몰입과 관찰의 차이점이다.

 

차라리 눈을 감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마음이 편한 것은 오감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각을 차단한 것이 큰 이유이다. 눈을 뜨고 있으면 보지 않을 수 없다. 보기 싫은 것도 보아야 한다. 눈을 뜨고 있으면 늘 두리번거리면서 눈으로 즐길거리를 찾는다.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인터넷을 보게 되는데 요즘은 유튜브를 즐겨본다. 자동으로 제공되는 영상물을 따라가다 보면 엉뚱한 길로 빠지기도 한다. 눈을 뜨고 있으면 늘 눈으로 즐길거리를 찾아 다니기 때문에 번뇌가 야기된다.

 

눈으로 즐길 때 즐거움도 있지만 잠시뿐이다.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또다른 볼거리를 찾아 나선다. 단지 스치고 지나치는 것들일 뿐이기 때문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 한번 인식한 것은 지울 수 없다. 한번 저장된 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보는 것을 즐김으로 인하여 번뇌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더 낫다.

 

산중에서 무슨 재미로

 

앉아 있으면 그저 마음이 편한하다. 그래서 요즘은 수시로 앉아 있는다. 이삼십정도 짧게 짧게 앉아 있는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심산유곡의 암자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심산유곡에서 홀로 사는지 모른다.

 

깊은 산중에 사는 사람이 있다. 매일매일 즐길거리가 가득한 도시와 비교하여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산중에서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자연인이 살아 가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출가한 수행자는 무슨 낙으로 살아갈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난다여, 이와 같이 ‘뭇삶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윔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S36.19)라고 말했다.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산중에서도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그것은 명상이다. 명상을 하면 세속에서의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선정삼매의 들면 세속에서의 그 어떤 즐거움 보다도 더 강렬하다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산속에서 홀로 살아도 심심하지 않은 이유가 될 것이다.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해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고 앉아 있은지 일주일 되었다. 틈만 나면 자주 앉아 있는다. 이전에는 시간이 나면 유튜브만 보았으나 이제 생활패턴이 바뀌었다.

 

조금이라도 시간만 나면 평좌하고 앉아 있는다. 그렇다고 깊은 선정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눈만 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눈만 감아도 번뇌가 엄청나게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눈과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칠팔십프로에 달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절대적이다. 눈만 감아도 마음이 편한 이유이다.

 

일단 앉는 데는 성공했다.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확보되면 많은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

 

사무실을 마련하고 나서 글쓰기가 본격화되었다. 자신만의 공간이 확보되자 남은 시간에 글을 쓴 것이다. 글쓰기가 집에서나 회사에서도 가능하지만 습관화 하기는 힘든 것 같다. 전세계적으로 여성작가가 적은 이유도 자신만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사무실을 마련한 것은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글쓰기도 단계가 있다

 

사무실을 마련한지 13년 되었다. 임대료와 관리비 그리고 인터넷 비용으로 하루 2만원꼴로 지출된다. 그래서 사무실을 풀가동해야 한다. 밤낮없이 주말없이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사무실을 제2의 집처럼 활용한다.

 

사무실은 아지트와도 같다. 오로지 자신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잘 꾸며 놓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식물키우기로 나타났다. 지금도 사무실에는 입주할 당시에 화원에서 사온 행운목이 있는데 천정을 쳤다. 그리고 갖가지 열대식물로 채워 놓았다. 앉아 있으면 화원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남방선원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무실을 마련하고 나서 글쓰기가 본격화되었다. 일의 특성상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기 때문에 그 많은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 쓰다보니 수천개가 되었다. 글쓰기가 일상이 되고 생활화된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 하다보니 글을 쓰면 쓸수록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필력(筆力)이라 할 것이다.

 

글쓰기도 단계가 있는 것 같다. 처음 글쓰기 하고 이삼년 지났을 때 한단계 도약된 것을 스스로 느꼈다. 지난 14년동안 글쓰는 과정에서 몇번 단계를 감지했다. 최근에도 한단계를 스스로 느꼈다. 모든 일이 다 그럴 것이다.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도가 틀 것이다. 생활의 달인 프로를 보면 알 수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의 근육이 생기도록

 

수행을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습관들이기 나름이다. 먼저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일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마음의 근육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재미를 느껴야 한다.

 

앉아 있는 것이 괴롭다면 수행에 진척이 없을 것이다. 수행은 집중수행이나 할 때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연속성이 없다. 그래서 매일매일 아침에 삼십분이라도 앉아 있어 보라고 한다.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환경이다. 수행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어 놓았다면 자주 앉아 있을 수 있다.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까지 사무실은 일하는 공간이자 글 쓰는 공간이었다. 이제는 하나 더 하여 수행공간이 되었다. 글쓰기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듯이, 앉아 있는 것도 습관 들여야 한다. 자주 앉아 있다 보면 앉는 것이 생활이 되고 일상이 될 것이다. 이렇게 습관이 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그저 눈 감고 있는 것이 좋아서 앉아 앉아 있다. 그러나 자주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의 근육이 생겨서 이론적으로 접했던 것들을 체험할 지 모른다.

 

 

2020-02-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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