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힘이 있으면 도과(道果)를 성취할 수 있다,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13

담마다사 이병욱 2019. 8. 4. 11:22

 

힘이 있으면 도과(道果)를 성취할 수 있다,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13

 

 

4일차 2019 7 5일 저녁, 우 에인다까 사야도 저녁법문

 

부처님 목소리를 사자후(獅子吼)라고 한다. 백수의 왕 사자가 포효하면 대부분 짐승들은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설법하면 두려움과 감동과 전율에 빠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최상에 지혜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진리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우 에인다까 사야도의 법문을 들으면 사자후를 듣는 것 같다.

 

시작하기 전에 자애관을

 

직지사 위빠사나집중 4일차 저녁법문시간이다. 수행자들은 너른 만덕전 명상홀에 앉아서 사야도를 기다렸다. 정확하게 저녁 7시가 되자 사야도가 입장했다. 자리에 앉자 마자 곧바로 법문의식이 시작되었다. 스승을 모시는 오까-땃 오까-땃 오까-으로 예경을 하자 사야도는 축원 해 주었다.

 




4일차 저녁법문 주제는 힘에 대한 것이다. 사야도는 힘이 있으면 도과를 성취할 수 있다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힘은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를 오력(五力)이라고 한다. 앙굿따라니까야 힘에 대한 경을 근거로 법문하는 것이라고 했다. 찾아 보니 힘에 대한 상세의 경’(A5.14)이다.

 

법문에 앞서 먼저 자애관을 했다. 사야도는 미얀마어로 -송 미아-수아 딷뜨와- 차안다 꼬쌔잇 미에바세라며  두번 낭송했다. 수행자들도 함께 따라 합송했다. 혜송스님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두번 낭송하자 수행자들도 두 번 합송했다. 게송 내용은 시방의 모든 존재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행복하기를!”라는 내용이다. 이어서 우밧얀베이 끼인씬 웨이 녜인에-짯바세라며 합송했는데 이 말은 모든 천재지변, 위험, 해악, 장애가 사라져서 안전하고 평화롭기를!”라며 바라는 것이다.

 




사야도는 무엇이든지 힘이 있으면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공부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다는 것이다. 몸이 좋지 않아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힘이 있어야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말할까?

 

업과 업의 과보도 신심에 해당된다

 

도과를 성취할 수 있는 첫번째의 힘은 신심이다. 신심의 힘이 충분해야 도와과를 성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심은 불, , 승 삼보에 대한 신심과 업과 업의 과보를 믿는 신심을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 힘에 대한 상세의 경’(A5.14)에서는 신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믿음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수행자가 믿음이 있어,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라고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믿음의 힘이라고 한다.”(A5.14)

 

 

경에서는 오로지 부처님 한분에 대한 믿음만 실려 있다. 그러나 사야도는 부처님뿐만 아니라 가르침과 승가를 포함하여 삼보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다가 업과 업의 과보 두 가지를 추가하여 다섯 가지 믿음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왜 업과 업보가 신심에 들어가 있을까?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가르침을 설했다. 이런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만 설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머리털로 만든 옷의 경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그것을 부정한다. (A3.135)라고 되어 있다.

 

과거칠불을 포함하여 과거에 출현하였던 무수한 부처님도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설하였다. 이런 이유로 사야도는 불법승 삼보에다 업과 업의 과보를 넣어서 다섯 가지 신심을 말했을 것이다.

 

삼보에 대한 믿음은 불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업과 업보를 믿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야도는 인과로서 설명한다. 묘목을 심을 때 떫은 맛이 나는 과일묘목을 심으면 떫은 맛의 과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업을 하면 선과보를 받고, 불선업을 하면 불선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야도는 업과 업의 과보는 불법승 삼보와 함께 신심의 조건입니다.”라고 말했다.

 

행위에 대한 결과를 알면 절대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심의 힘이 완벽해야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야도는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게송을 읊었다. 미얀마어로 용찌딷따 싯뚜ㅎ마 흐만수아 땃야-얏나잉띠라고 읊자 수행자들은 따라서 합송했다. 이 말은 믿는 신심 있는 이가 분명히 법을 성취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도와 과를 원한다면 죽는 것을 겁내지 말라

 

도과를 성취할 수 있는 두번째의 힘은 정진력이다. 사야도는 정진력이 충분해야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정진력일까? 좌선이나 행선 했을 때 사띠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정진력이라고 했다. 일상에서도 사띠가 끊어지면 안된다고 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외 시간은 사띠가 끊이지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진에 대한 정형구는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정진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갖추어 확고하고 용맹스럽게 추진하여 착하고 것들에 멍에를 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정진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정진의 힘이라고 한다.”(A5.14)

 

 

오력에서는 정진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불선법을 버리고 선법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용맹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멍에를 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의 어깨에 거는 농기구를 말한다.

 

사야도는 정진에 대하여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나가버린 불선법을 생각하지 않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을 한 개도 일어나지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을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미 일어난 선법이 더욱 커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팔정도에서 말하는 사정근에 대한 설명이다.

 

사야도는 정진에 대하여 어떤 것이든지 무서워하지 않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부처님의 정진에 대한 것이다. 뼈와 가죽만 남은 용맹정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처럼 정진하면 여러분은 모두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야도는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게송을 읊었다. 미얀마로 엇예빠-따 이칸다 짠까-쭈인바세로 시작되는 다섯 가지 게송이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몸이 말라서 가죽만 남을지라도,

이몸이 말라서 힘줄만 남을지라도,

이몸이 말라서 뼈만 남을지라도,

피와 살이 모두 마를려면 말라라.

길 끝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수행하리라.

 

 

이 게송은 부처님의 마음자세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도와 과를 원한다면 죽는 것을 겁내지 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모든 순간 사띠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사띠가 유지되게 하는 것이 정진의 힘이라고 했다.

 

사야도가 미얀마어로 용찌딷따 싯뚜ㅎ마 흐만수아 땃야-얏나잉띠라고 읊자 수행자들은 따라서 합송했다. 이 말은 믿는 신심 있는 이가 분명히 법을 성취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한 개도 놓치지 않고 그 순간 알아차림해야

 

도과를 성취할 수 있는 세번째의 힘은 사띠이다. 사띠가 현재 순간에 정확하게 꼽히지 않으면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띠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고 한다.”(A5.14)

 

 

경에 따르면 사띠에 대하여 기억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을 때는 가르침에 대한 기억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수행적 측면에서는 항상 사띠삼빠잔냐(satisampajañña)라고 하여 사띠(正念)와 삼빠자나(正知)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야도는 사띠에 대하여 신, , , 법 네 가지로 설명했다. 몸관찰에 대해서는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라고 했다. 또한 멈추고 앉고 눕고 옷 입는 등 모든 동작에 대하여 한 개도 놓치지 않고 그 순간 알아차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몸 움직임에 대하여 그 순간 몸관찰 하면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느낌관찰에 대해서는 좌선 중에 쑤시고 시리고 결리는 등 온갖 통증을 한 개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라고 했다. 그래서 통증에 대한 느낌을 관찰하면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음관찰에 대해서는 시기, 질투, 교만 등 온갖 생각이 일어날 때 객관적으로 관찰하라고 했다. 일어나는 즉시 사띠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관찰하면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법관찰에 대해서는 생멸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했을때 번뇌가 일어날 수 있다. 번뇌가 일어나기 전에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법들의 성품을 관찰 했을 때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사야도는 현재 이 순간에 신, , , 법 네 가지 중에 한가지를 보라고 했다. 사띠가 붙어서 사띠가 완전해야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사띠에 대하여 미얀마어로 띳띳꼬ㅎ마 싯뚜하- 흐만수아 땃야-얏나잉띠라며 두번 읊었다. 이에 수행자들도 따라서 합송했다. 이 말은 자신의 몸에 싸띠 있는 이는 반드시 법을 성취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집중력이 있을 때 사띠가 훌륭하게 유지된다

 

도과를 성취할 수 있는 네번째의 힘은 집중력이다. 사야도는 사띠만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아주 높은 수준의 집중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중력이 있을 때 사띠가 훌륭하게 유지될 수 있음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집중력에 대한 설명은 네 가지 선정 정형구로 설명되어 있다.

 

사야도는 집중력이 좋으면 세간의 지혜에서 가장 높다는 상카루뻭카냐냐 (Sakhārupekkhāñāa)’ 단계까지 이를 수 있다고 했다.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로 위빠사나 11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이 단계는 네 번째 선정에 있어서 평정단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도와 과를 이루기 전 단계를 말한다.

 

사야도는 도사마디와 과사마디가 될 때까지 집중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미얀마어로 땃마-딧꼬ㅎ마 싯뚜하- 흐만수아 땃야-얏나잉띠라며 두번 읊었다. 이에 수행자들도 따라서 합송했다. 이 말은 자신의 몸에 집중력 있는 이는 반드시 법을 성취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생멸의 지혜를 알아야

 

마지막으로 도과를 성취할 수 있는 다섯번째의 힘은 지혜이다. 그런데 지혜는 집중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생멸을 아는 지혜이다. 생멸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지혜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지혜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탁월한 꿰뚫음으로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발생과 소멸에 관한 지혜를 갖춘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지혜의 힘이라고 한다.”(A5.14)

 

 

경에서는 지혜에 대하여 사성제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고성제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문구를 보면 괴로움에 대하여 발생과 소멸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이라고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지혜는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 지혜가 생겨난다. 가장 먼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나고, 그 다음에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겨난다. 전자를 위빠사나 제1단계 지혜라고 하고, 후자에 대하여 위빠사나 제2단계 지혜라고 한다.

 

생멸을 관찰하다 보면 무상, , 무아라는 삼법인에 대한 지혜가 생겨난다. 그래서 모든 생멸을 눈으로 보듯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세간의 지혜 중에 최상이라는 위빠사나 11단계 현상의 평정에 대한 지혜에 이르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빠르게 진행된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화살 보다 빠르게 수다원 도와 과에 진입할 수 있다고 했다.

 

사야도는 지혜의 힘에 대한 게송을 읊었다. 미얀마어로 엇띳삔냐 싯뚜하- 흐만수아 땃야-얏나잉띠라며 두번 읊었다. 이에 수행자들도 따라서 합송했다. 이 말은 아는 지혜 있는 이는 반드시 법을 성취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시소타기로 비유할 수 있는 신심과 지혜, 그리고 노력과 집중

 

사야도는 힘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두 가지에 대한 것이다. 신심과 지혜에 대한 균형, 그리고 노력과 집중에 대한 균형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이 맞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시소를 연상하면 된다. 한편이 올라가면 다른 한편은 내려 가는 것을 말한다.

 

신심이 지나치게 강화되면 지혜가 약해진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신사마나의 예를 들었다. 신사마나는 찐짜마나비까(ciñcamāavikā)’를 말한다. 거짓임신으로 부처님을 모함하여 부처님 교단을 파괴하고자 한 어리석은 여인을 말한다. 찐짜마나비까와 관련된 이야기는 법구경 176번 게송 인연담에 실려 있다. 찐짜마나비까는 스승이 시킨대로 했다. 스승에 대한 신심은 강했기 때문이다. 스승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결국 지옥에 떨어졌다. 신심은 강하지만 지혜가 없는 대표적 케이스에 해당된다.

 

지혜가 매우 강하고 신심이 약한 케이스가 있다. 부처님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산자야 벨라뿟따가 이에 해당된다. 산자야는 이법이 틀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주장하는 법이 열반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부처님에게 가지 않은 것이다. 산자야는 제자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에 우빠띳사와 꼴리따는 스승을 떠나기로 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스승 밑에서는 열반을 성취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빠띳사와 꼴리따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이전 이름이다.

 

부부가 잘못 만나면 한평생 망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승을 잘못 만나면 한생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망칠 수 있다. 지혜만 있을 뿐 신심이 없는 스승을 만났을 때 악업을 지어도 큰악업을 지을 수 있다. 산자야 벨라뿟따는 교활한 지혜를 가졌을 뿐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없어서 자신도 망치고 따르는 사람들도 망쳤다.

 

노력과 집중도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시소타기가 될 수 있다. 노력이 지나치면 집중이 약해지고, 집중이 지나치면 노력이 약해진다. 이런 예를 아난존자와 목갈라나를 들어 설명했다.

 

아난존자는 결집을 앞두고 정진했다. 그러나 밤새 정진했지만 아라한 도와 과에 이를 수 없었다. 아난존자는 이생에서 안되겠다라며 이제 쉬어야 겠다라며 자리에 눕는 순간 아라한 도와 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과도한 노력을 놓아 버렸을 때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사띠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사띠마저 놓아 버렸다면 아라한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목갈라나 존자는 집중력은 강했으나 노력은 약했다. 그런데 목갈라나 존자는 고요를 즐겼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시간 졸은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정진력이 강화 되었을 때 일주일만에 도와 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네 바퀴 자동차와 운전자 비유로 설명된 오력

 

사야도는 오력이 고르게 강화 되어야 도와 과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은 사띠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띠에 대하여 운전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사야도는 오력에서 신심과 지혜, 노력과 집중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에 대하여 자동차 바퀴로 비유했다. 자동차는 네 바퀴로 굴러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동차만 있다고 해서 굴러 가지 않는다. 운전자가 있어야 한다. 사띠를 운전자로 비유한 것이다.

 

자동차는 운전자의 운전능력에 따라 잘 굴러간다. 만약 운전자가 술에 취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운전자가 졸음운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신심이 좋아도,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집중을 잘 해도 사띠가 약하면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없다. 그런데 사띠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사띠는 강화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다. 사띠는 많아서 넘쳐 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왜 사야도의 목소리에 매료되는가

 

사야도의 오력법문이 끝났다. 언제 들어도 목소리가 우렁차다. 그리고 목소리에 힘이 있다. 이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확신에 찬 자신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박력있는 사야도의 음성을 들으면 사자후를 듣는 것 같다. 사자후는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이다.

 

누구든지 진실이나 진리를 말하면 당당하게 힘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목소리에 대하여 여덟 가지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 브라흐마유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목소리에 대하여 존자 고따마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여덟 가지 요소를 갖춥니다.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M91)라고 설명되어 있다.

 

법문듣기 좋은 목소리가 있다. 시인 수행승으로 알려져 있는 방기사존자는 사리뿟따의 목소리에 대하여 구관조와 같다고 찬탄했다. 사리뿟따의 목소리가 감미로움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매혹적이고 듣기에 즐거운 미묘한 목소리”(S8.6)라고 찬탄했다. 그런데 부처님의 목소리는 무려 여덟 가지나 된다. 그 중에서도 심오하고 낭랑하다는 말이 있다.

 

심오하고 낭랑한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주석에서는 ‘심오하고’는 단전으로부터 깊이 일으킨다는 뜻으로 혀-이빨-입술-윗턱을 단지 움직이여서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감미롭지도 않고 멀리서 들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공명하고는’은 큰 비구름의 북소리처럼 크게 울린다는 뜻이다.” (Smv.640)라고 설명해 놓았다.

 

사야도 목소리는 힘이 있고 낭랑하다. 여기서 낭랑하다는 공명하다라는 말과 같다. 큰 비구름의 북소리처럼 크게 울린다는 뜻이다. 큰북소리와 같은 사야도의 공명하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충만되는 것 같다. 마치 한국에서 염불 잘 하는 스님이 낭랑한 목소리로 염불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야도의 목소리에 매료 되는 것 같다.

 

 

2019-08-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