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이기는지 국민이 이기는지, 9.28서초동촛불
그 동안 사람들은 참아왔다. 사람들은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잘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권력기관은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폭주했다. 여기에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언론까지 따라 붙었다. 마치 조폭처럼 권력을 남용하고, 마치 하이에나처럼 물어 뜯는 언론에 정의로운 사람들이 대폭발했다. 2019년 9월 28일 토요일 서초역사거리에 백만명이 모였다.
테헤란로에서
교대역에 도착했을 때는 7시 반 가량 되었다. 삼성역 부근에 있는 결혼식장에서 왔었기 때문이다. 정평불 이복우선생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정평불회원들은 결혼식에 참석하고 식사를 마치자 마자 지하철 2호선을 이용하여 서초동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초역은 너무 혼잡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한정거장 이전인 교대에서 내려 진입하기로 했다.
교대역 10번 출구를 나왔다. 테헤란로에는 차가 다니지 않았다. 저 멀리 서초역에서부터 교대역까지 테헤란 왕복 10차선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치 한국경제의 중심지 테헤란로가 해방구가 된 듯 했다.
대부분 삼사십대로 젊은 사람들이다.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어린이들도 있었다.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로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듯 했다. 정평불 식구들도 대로에서 포즈를 잡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백만명이 모였다는데
촛불집회는 6시부터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실시간으로 전하는 에스엔에스(SNS) 소식에 따르면 급속하게 불어 나는 것이었다. 오후 4시 대에 15만명이라고 했다. 글자를 의심했다. 6시가 되자 50만명 이야기가 나오고 7시가 되자 80만명 이야기가 나왔다. 7시 반 현장에 도착 했을 때도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백만이 넘었다고 했다.
무대가 있는 검찰청 앞으로는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교대역과 서초역 중간에 있는 테헤란로 한켠에 자리잡았다. 저 멀리 서초역 언덕받이가 보였다. 촛불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서초역 사거리를 중심으로 사방에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초역 사거리 동쪽에 해당되는 곳에도 사람들이 가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강남역에 까지 이른 듯 보였다.
이번 촛불은 여러모로 3년전 광화문 촛불과 달랐다. 전광판도 보이지 않고 노점상도 보이지 않았다. 노래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불어날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질서를 유지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어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아마도 3년전 광화문촛불의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쓰레기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촛불과 피켓을 든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구호만 있을 뿐이다.
“조국수호” 와 “검찰개혁”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매우 진지하다. 그리고 비장한 모습이다. 그 동안 참고 참다가 나온 듯 하다. 그래서일까 “정치검찰 물러나라”라며 격한 목소리를 낸다. 어느 여인이 든 노랑피켓을 보았다. 피켓에는 “이제는 울지말자. 이번엔 지켜내자. 우리의 사명이다.”라고 적혀 있다.
무엇이 이렇게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을까? 왜 백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을까? 그것은 현장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여러가지 구호가 있지만 크게 두 개의 구호로 압축된다. 그것은 “조국수호” 와 “검찰개혁” 이다.
대폭발한 이유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 동안 가슴앓이 했었다. 이구동성으로 두 달동안 불편하고 불쾌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임명직의 폭주에 대한 것이다. 선출직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임명직이 선출직을 능멸한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의 일처럼 생각한 것이다. 국민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무엇이든지 처음은 미미하다. 서초동 촛불도 그랬다. 그러나 지난주 토요일 3만명이 모였을 때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더구나 11시간 압수수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당한 것처럼 느낀 것이다. 그래서 에스엔에스에스는 “내가 조국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9월 28일 폭발했다. 그것도 대폭발이다. 100만명이라고하고 150만명이라고도 하고 200백만명이라고도 한다.
백만단위가 넘어서면 숫자는 의미가 없다.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편에서 외치는 구호가 초라할 정도이다. 공권력은 한켠에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어리석은 국민들이 아니다. 국민들은 현명했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정의로웠다.
항상 국민이 옳았다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이다. 옳고 바른 것이 정의라고 했다.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표출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정의는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정의롭지 않은 것에 분노하는 것이다. 정의는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느꼈을 때 정의로운 자가 된다.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최근 케이블채널에서 ‘택시운전사’를 보았다.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영화에서는 공수부대원에게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여 주었다. 그때 당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이다. 또 하나 영화를 보았다. 두 달 전에 보았던 다큐영화 ‘김군’이다. 살아 남은 자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옆에서 사람이 죽어 갈 때 자연스럽게 시민군이 되었다고 한다. 정의는 이런 것이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여법하지 못한 삶과
여법한 죽음이 있다.
여법한 죽음이,
여법하지 못한 삶보다 낫다.” (Thag.670)
여법(如法)하지 못하다는 것은 ‘법답지 못하다’라거나 ‘정의롭지 못하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이 게송은 “불의에 살 것인가, 정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라고 바꿀 수 있다. 정의파는 무릎 꿇고 사는 것 보다 서서죽기 원하기 때문이다.
항상 국민이 옳았다. 어느 누구도 국민을 이기지 못했다. 국민은 어리석은 같지만 매우 현명하다. 권력을 남용했을 때 국민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더구나 임명직이 선출직을 겁박하듯이 했을 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선출직이 당하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을 때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정의일 것이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시대의 흐름이 있다. 거대한 강물 같은 것이다. 강물과 같은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시대의 흐름에 저항한다면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가고 말 것이다. 1860년대 일본 도쿠가와막부 말기에 신센구미(新選組)가 그랬다.
한때 일본 대하드라마에 심취하던 시기가 있었다. 2010년을 전후한 4-5년 동안을 말한다. 그때 당시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 료마전, 천지인 등을 보았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알고자 본 것이다. 특히 일본 근대화 시기를 다룬 막말유신초의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다. 그것은 일본의 근대화와 관련된 것이다. 그때 당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고 한국은 근대화에 실패했다. 일본이 어떻게 해서 근대화에 성공했는지 궁금해서 본 목적도 있다.
일본 근대화시기를 다룬 대하드라마에서 빠짐 없이 나오는 것이 신센구미이다. 신센구미는 쓰러져 가는 막부를 지탱하기 위하여 고용한 낭사(浪士)집단을 말한다. 도쿠가와막부 측에서 마치 이리떼와 같은 떠돌이 무사들을 고용하여 수도 쿄오토의 치안을 맡긴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는 신센구미는 규율이 엄격했다. 스스로 정한 무사도를 어기면 할복하게 만들었다. 드라마에서는 할복하는 장면도 다수 보여준다. 그래서 신센구미 국장을 중심으로 철의 결속을 과시했다. 이런 신센구미는 시대의 변화를 바라는 개혁세력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로지 칼 한자루에 인생을 건 신센구미에게 걸리면 죽끝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조폭과도 같은 무사집단 신센구미는 구체제를 지키는 보루였다.
아무리 강철의 무사집단이라해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대의 흐름이 너무 거세어서 개혁세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신센구미는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개혁세력에게 패배했다. 전쟁에서 패한 신센구미 잔존대원들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에도(東京)로 철수하는 배에 탔다. 어둠 속에서 대원 중의 하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 드라마에서 본 것이다.
세상에 국민을 이기는 권력집단이 없다. 세상에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집단 역시 없다. 마치 전쟁에 패하여 쫓기는 신세가 된 패잔병이 말한 것처럼, 그 동안 권력남용으로 마음껏 칼을 휘두른 권력집단은 떨고 있을지 모른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라며.
검찰이 이기는지 국민이 이기는지
이런 말이 있다.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또 이런 말이 있다. 검찰이 수사하면 반드시 기소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기소할 때까지 수사하기 때문이다. 마치 가뭄 때 이밭 저밭 관정(管井)하듯이 끝까지 파는 것이다. 털고 또 털다 보면 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검사에게 잘못 걸리면 끝장이라고 볼 수 있다.
검사에게는 또 하나의 권한이 있다. 그것은 기소를 할 것인지 말것인지 결정하는 권한을 말한다. 기소는 검사의 마음에 달려 있다. 여기에 헛점이 있다. 전관예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고위직 검사가 퇴임하여 변호사가 되었을 때 기소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검찰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고, 더구나 기소 할 것인지 말것인지에 대한 권한도 가지고 있어서 대통령보다 권력이 더 센 집단임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다 보니 선출직 대통령마저 겁박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마침내 2019년 9월 28일 토요일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백만이나 되는 대폭발이다.
국민들은 이제 인디언식 기우제를 지낼 것이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 지내듯이, 국민들은 매주 토요일 서초동에서 검찰개혁이 될 때까지 촛불을 들 것이다. 마치 3년전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듯이. 검찰, 이번에 딱 걸렸다. 검찰이 이기는지 국민이 이기는지 한번 해 보자.
2019-09-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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