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육식동물의 굴욕과 초식동물의 위엄

담마다사 이병욱 2019. 9. 27. 10:59

 

육식동물의 굴욕과 초식동물의 위엄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물리법칙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뉴턴물리학에서 제3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런데 작용과 반작용은 인과의 법칙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과보는 언젠가의 원인에 의한 것이다. 원인이라는 씨앗이 조건을 만났을 때 과보로 나타난다. 현재 서초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그렇다.

 

 

 

절차가 정당한 것인지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직업이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귀천이 있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일이 된다. 사람을 잡아들이고 수사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검사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다. 옛날에는 정의롭게 보았다. 범죄자를 엄벌에 처하는 포청천과 같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요즘은 달라졌다. 아무래도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영향일 것이다. 검사의 이미지는 조폭과 오버랩된다. 아마 이와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본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최근 조국사태와 관련하여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것은 알고 지내는 사람이 견해를 표출했을 때이다. 페이스북에서 본 그 분이 대표적 케이스이다. 함께 재가불교운동을 한 그분은 어느 유튜버의 사이트를 매번 공유하고 있다. 매우 자극적인 제목이다. 아니면 말고식의 제목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재가불교활동을 해도 정치적 견해는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견해가 틀렸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나름대로 판단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견해는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견해는 견해일 뿐이다. 다만 절차가 정당한 것인지 공정한 것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불법적인 일이다.”

 

 

 

법집행이 아무리 공정하다고 할지라도 무리가 있다면 비난을 면할 수 없다. 그때 사람들은 너무 한 것 아냐?”라고 할 것이다. 이럴 때 숫따니빠따에서 본 한 구절이 생각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칼로 소들이 베어지자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 아수라, 나찰들은

 

불법적인 일이다.’

 

라고 소리쳤습니다.”(Stn.310)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바라문들이 거대한 제사를 지냈다. 동물희생제를 말한다. 왕들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 수천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았다. 칼로 소들이 베어지자 그 울음이 하늘에까지 미쳤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선신은 물론 악신에 이르기까지 불법적인 일이라고 소리친 것이다.

 

 

 

권력을 쥔자가 칼을 마구 휘두르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조직의 이익을 위하여 칼을 들었을 때 이것은 불법적인 일이다.”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서초동에서 들려 오는 뉴스가 그렇다.

 

 

 

육식동물의 굴욕

 

 

 

힘이 있으면 힘을 행사하고 싶어 진다. 특히 정의롭지 못한 집단이 그렇다. 주먹이 근질근질하여 가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넘쳐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권력기관에서도 볼 수 있다. 또 언론에서도 볼 수 있다. 조직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을 때 정의롭지 못한 집단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를 보는 듯 하다.

 

 

 

요즘 동물의 왕국을 즐겨본다. 매일 저녁 5시대에 KBS1에서 방영하고 있다. 이전에는 종편채널을 즐겨 보았으나 요즘은 동물의 왕국으로 채널이 고정 되어 있다. 그것은 종편채널의 패널들이 하이에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학을 즐기는 것 같다.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맞은 자를 또 때리는 것이다. 아마 그것이 직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춘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동물의 왕국에서 본 하이에나는 애처럽기 그지없다. 끊임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다니기 때문이다. 설령 어렵게 사냥했더라도 사자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러고 보면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도 초원에서는 치사한 동물이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초원에서 육식동물은 상위포식자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냥이 매번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먹잇감을 놓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굶어야 한다. 그렇다고 초식동물처럼 풀을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육식동물이 초식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다.

 

 

 

굶주린 치타가 있다. 사냥에 실패하여 허기진 치타가 민가로 침입했다. 우리에 가두어 기르는 가축을 잡아 먹었다. 이에 대하여 자연다큐에서는 치타의 굴욕라는 표현을 했다. 그 늠름한 기상이 사라진 것이 보잘것없음을 말한다. 이것은 다름아닌 육식동물의 굴욕이다.

 

 

 

비루한 육식동물

 

 

 

육식동물의 눈은 매섭다. 살생을 일삼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초식동물의 눈은 평화롭다. 풀만 뜯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육식동물과 초식동물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위엄 있을까?

 

 

 

동물의 왕국에서 본 바에 따르면 단연 초식동물이 더 위엄있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초식동물은 육식동물보다 더 크고 위엄 있게 생겼다는 것이다. 육식동물이 아무리 날카로은 이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초식동물의 뿔만 못하다.

 

 

 

 

 

 

 

초원에서 육식동물은 깡패나 다름 없다. 구역이 있어서 구역 내에서 초식동물을 잡아 먹고 산다. 그러나 그 대가는 매우 가혹한 것이다. 초식동물들이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때문이다.

 

 

 

육식동물은 평생 남의 살을 먹고 살아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을 먹이로 하였을 때 먹이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비굴해지지 않을 수 없다. 먹이를 가로 채거나 민가의 가축을 넘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초원에서 육식동물이 깡패라면 덩치가 우람하고 뿔이 멋있게 난 초식동물은 신사와도 같다.

 

 

 

황소로 묘사된 부처님

 

 

 

초원에서 육식동물은 몰래몰래 사냥이나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눈이 살기가 보이고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진 육식동물은 알고 보면 초라하고 비굴하고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초원에서 초식동물은 먹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풀만 뜯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눈망울도 평화스럽고 행동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을 황소로 묘사한 경우가 많다.

 

 

 

부처님을 황소로 묘사한 경우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사자나 호랑이로 묘사한 경우도 있지만 황소로 묘사한 것이 훨씬 더 많다. 숫따니빠따 날라까의 경’(Sn3.11)을 보면 지혜에 능통한 그가 싸끼야 족의 황소를 안고 인상을 살피더니 ‘이 분은 위없는 님,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났습니다!’라고 환성을 질렀다.”(Stn.690)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바셋타의 경’(Sn3.9)에서는 바라문 바셋타가 황소처럼 늠름하고 기품 있는 영웅이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소치는 다니야의 경’(Sn1.2)에서는 부처님이 “황소처럼 모든 속박들을 끊고, 코끼리처럼 냄새나는 넝쿨을 짓밟아, 나는 다시 모태에 들지 않을 것이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Stn.29)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비루한 권력기관과 언론기관

 

 

 

동물의 왕국에서 본 초식동물은 늠름했다. 특히 뿔이 있는 우람한 초식동물은 기품있어 보였다. 이에 반하여 초식동물을 먹고 사는 육식동물은 비루하고 초라해 보였다.

 

 

 

육식동물을 보면 마치 오늘날 정의롭지 않은 권력기관과 언론기관을 보는 것 같다. 오로지 조직의 이익만 바라는 권력기관과 언론기관은 비루한 하이에나로 보인다. 나만 그런 것일까?

 

 

 

 

 

2019-09-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