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온 매가 그대를 때리리라”중상모략을 일삼는 종편과 유튜브
사람들은 하루라도 말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묵언수행을 하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해야 할 말이 있다. 심산유곡에서 나홀로 살지 않는 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소통이 있기 마련이다. 만나면 이야기하게 되어 있는데 여자는 2만단어, 남자는 만5천단어 말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나면 무슨 이야기 할까? 안부나 근황에 이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는 잡담이기 쉽다. 초기경전을 보면 왕에 대한 이야기, 도적에 대한 이야기, 대신들에 대한 이야기, 군사에 대한 이야기 등 28가지 잡담이 있다. 요즘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잡담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 그 다음이 없는 것이다. 그저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십이나 잡담은 백해무익한 것이다. 정치이야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잡담을 하게 되는데 대개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것이다. 이야기하다 보면 험담이 되기 쉽다. 술자리에서 상사를 안주로 삼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뒷담화 내지 험담은 요즘 케이블채널과 유튜브에서 아주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종편채널을 보았더니
오랜만에 종편채널을 보았다. 최근 10.5서초동촛불집회로 인하여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여전히 조국 한사람에 대하여 조리돌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종편에서는 휴일 관용차 탄 것 가지고 말하는가 하면 페이스북에 프로필 사진 바꾼 것까지 문제삼았다. 이렇게 보았을 때 종편사람들은 뒷담화내지 험담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중상모략하고 있다. 그것도 날이면 날마다 매일 하고 벌써 두 달째이다. 한편으로 불편하고 불쾌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측은하기도 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 중상모략한 과보는 매우 클 것이다.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큰 것이다. 그런데 본인 혼자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타지옥(同墮地獄)이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사람들도 함께 악처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매일매일 중상모략이라는 구업을 짓고 있다.
악마의 영역이 있는데
중상모략을 일삼는 채널은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보면 볼수록 불선법이 일어나 불선업을 짓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특정한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종편과 유튜브는 ‘악마의 영역’과 같은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악마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신으로서의 악마가 있고, 번뇌로서의 악마가 있고, 오온으로서 악마가 있고, 업으로서 악마가 있고, 죽음으로서 악마가 있다. 이렇게 다섯 종류의 악마가 있는데 번뇌가 일어났다면 악마가 된 것이나 다름 없다.
우리는 악마가 되기 쉽다. 화가 난다고 하여 화를 내면 ‘분노의 악마’가 된다. 욕망이 일어나 욕심을 낸다면 ‘탐욕의 악마’가 된다. 이렇게 악마가 되는데는 악마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마의 영역은 어디에 있을까?
번뇌가 악마라고 했다. 업도 악마라고 했다. 번뇌와 업은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생겨나기 때문에 오온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악마일 수밖에 없다. 오온이 악마인 것이다. 그런데 오온은 시각영역, 청각영역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감각영역은 사실상 ‘악마의 영역’과 같다.
시각의 바다에서
감각영역이 왜 악마의 영역일까?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악마 빠삐만이 “수행자여, 시각은 나의 것이고 형상도 나의 것이며 시각의식도 나의 것이다. 수행자여, 그대가 어디로 간들 내게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S4.19)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우리의 시각과 청각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은 악마의 영역과 같은 것이다.
시각이 악마의 영역이라면 깨어있지 않는 한 우리는 악마의 올가미에 걸려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시각영역에 대하여 ‘시각의 바다’라고도 한다. 왜 시각의 바다라고 했을까? 그것은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나찰이 많은 시각의 바다”(S35.228)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않으면 시각의 바다에 빠지기 쉽다. 그런 바다는 파도치고 소용돌이 치는 곳이라고 했다. 주석에 따르면 파도는 ‘분노의 번뇌’를 말하고, 소용돌이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五欲樂)’를 말한다. 이띠붓따까에서는 시각의 바다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보게, 어째서 그대는 희희낙낙하면서 강의 흐름을 따라 옮겨 가는가? 하구에는 호수가 있어, 파도가 있고 소용돌이가 있고 악어가 살고 나찰이 출몰한다. 여보게, 그대가 그곳에 도착하면 죽음이나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받는다.”(It.114)
시각능력을 단속하지 못했을 때 위험과 재난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위 문구에 대한 해석이 있다. 강의 흐름은 ‘갈애’를 뜻하고, 희희낙낙은 ‘여섯 가지 내적감역’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구의 호수는 ‘다섯 가지 낮은 결박’을 의미하고, 파도는 ‘절망적 분노’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 소용돌이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종류’를 지칭하는 것이고, 악어와 나찰은 ‘여인’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을 대조해 보아야
시각의 바다에 잘못 빠지면 헤어 날 수 없다. 청각의 바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모두 악마의 영역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의 영역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사띠함으로 인하여 감각의 문을 지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선법과 불선법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를 ‘택법각지(Dhammavicaya)’로 설명할 수 있다.
택법각지는 기본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상태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다.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착하고 건전한 것과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있고, 비난 받아야 할 것과 비난 받을 수 없는 것이 있고 열등한 것과 수승한 것이 있고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의 대조가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자주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생겨나게 하거나 이미 생겨난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증가시키고 확대시키는 자양분이다.”(S46.2)라고 설명되어 있다.
선법과 불선법을 잘 구별하려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의 대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없는데서 남의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이 험담이라면 불선법이 된다. 이것은 어두운 것이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은 멀리하고 버려야 한다.
“되돌아온 매가 그대를 때리리라”
오늘 늦은 오후에 종편채널에 갔었다. 세 개의 채널을 번갈아 보았다. 그 중에 두 개가 매우 심했다. 한마디로 중상모략하는 것이었다. 입에 칼을 물고 찌르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떨까?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난다.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네.”(S6.10)라고 했다. 결국 자신의 발등을 찍게 되어 있다. 인과의 엄중함을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이 한쪽 면만 보고 찌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돈이 되기 때문이다. 페널들은 돈을 받고 그들의 지지층 입맛에 맞도록 립서비스해준다. 회사에 소속된 자들은 녹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튜버라면 구독자와 조회수 때문에 입에 칼을 물 것이다. 이처럼 이득이 되기 때문에 중상모략이라는 구업을 일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종편과 유튜브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여섯 가지 감각영역은 악마의 영역이라고 했다. 특히 시각과 청각이 그렇다. 여섯 가지 영역중에서 시각과 청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70프로 가량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마의 영역에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한다. 그곳은 파도치고 소용돌이치고 상어와 나찰이 출몰하는 곳이다.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들에게 화를 내서는 안된다. 화를 내면 나만 손해이다. 그 대신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 왜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하는가? 그들은 엄중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자도 행운을 누린다. 악의 열매가 익으면 그때 악인은 죄악을 받는다.”(Dhp.119)라고 했다.
“아무에게도 거친 말을 하지 말라.
받은 자가 그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격정의 말은 고통을 야기한다.
되돌아온 매가 그대를 때리리라.”(Dhp.133)
2019-10-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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