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쓰면 약이 듣듯이, 제5회 정평불교포럼 청소년포교와 한국불교미래
청소년포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종립중학교에 다녔다. 종립중학교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접했다. 중학교 1학년때 ‘부처님의 일생’을 배운 것이 시발점이다. 그때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율장대품을 보면 야사가 부처님 설법을 들었을 때 “마치 청정하여 반점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처럼”(Vin.I.15)이라는 표현이 있다. 청소년기에 접한 불교는 마치 흰천에 물감이 스며 드는 것처럼 작용한 것이다.
제5회 정평불교포럼이 열렸는데
제5회 정평불교포럼이 서울시민청 워크숍홀에서 열렸다. 2019년 10월 23일 수요일 저녁에 열린 포럼에 사람들이 그다지 많이 오지는 않았다. 워크숍홀 정원이 60명인데 반가량 찬 것 같다. 청소년포교라는 주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그다지 끌어당기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일년에 포럼을 두 번씩이나 여는 것에 대한 피로감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유튜브시대이다. 포럼에서 발표되고 논의된 것은 인터넷에 공개된다.
이번 포럼에서 세 명의 발표자가 있었다. 중앙승가대 김응철교수는 ‘청소년포교의 교리와 방법’에 대하여 발표했고, 영석고 이학주교법사는 ‘청소년포교의 사례연구’에 대하여 발표했다. 한국전도학연구소 김남식소장은 ‘청소년을 위한 하인츠 코흣 자기 심리학으로 본 예수님의 동행전도’라는 주제로 발표하려 했으나 사정이 있어서 이도흠 정평불상임대표가 대독했다. 종합토론은 김광수 한양여대명예교수와 박병기 한국교원대교수가 맡았다. 사회는 박경준 동국대명예교수가 봤다.
포럼을 열면 준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발표집이다. 작은 소책자로 된 것이다. 포럼이 단지 발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기억하기 위하여 기록물로 남겨 놓는 것이다. 발표자들은 발표문과 파워포인트를 활용하여 알렸다. 그렇다면 발표자들은 현재 한국불교가 당면하고 있는 청소년포교에 대하여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을까?
김응철교수의 새로운 포교 패러다임
김응철교수는 포교와 관련하여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청소년포교 교리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포교 패러다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청소년포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소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눈높이 포교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응철교수에 따르면 청소년포교와 관련하여 초기경전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 한 예로서 맛지마니까야 ‘에쑤까리의 경’(M96)을 들었다. 이는 봉사대상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계급에 따른 봉사를 부정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정한 봉사일까? 이는 “어떤 사람에게 봉사할 때 그 봉사로 말미암아 그가 나빠지기만 하고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에게 봉사해서는 안된다고 나는 말한다.”(M96.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한 진정한 봉사는 상대방의 향상과 성장에 관계가 있다. 봉사를 해서 그가 좋아 진다면 봉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응철교수는 “부처님께서 제시한 봉사의 목표는 믿음이 성장하고, 계행이 성장하고, 배움이 성장하고, 보시가 성장하고, 지혜가 성장하도록 하는데 있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청소년포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응철교수는 청소년포교와 관련하여 문화포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했다. 이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설명했는데 그것은 교육포교패러다임, 복지포교패러다임, 문화포교패러다임, 국제교류패러다임, 청소년수행패러다임에 대한 것이다. 모두 문화포교의 범주 안에 들어 가는 것들이다.
청소년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딱딱한 교리만 강요해서는 안될 것이다. 재미를 곁들인 문화포교가 매우 효과적이다. 앞서 언급된 수 많은 패러다임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청소년 수행 패러다임이 눈에 띈다. 이에 대하여 김응철교수는 래퍼 ‘김하은’을 예로 들었다. 래퍼 김하은이 명상을 한다고 고백했다는데 이것이 청소년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김응철교수는 포교와 관련하여 전문가라고 볼 수 있다. 김응철교수에 따르면 더 이상 스님이나 사찰에 청소년포교에 의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직접 포교의 현장의 뛰어 들었는데 그것은 문화포교에 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화, 치유, 명상에 대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고 청소년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학주교법사의 다이돌핀 프로그램
이학주교법사는 청소년 포교의 사례연구에 대하여 파워포인트를 이용하여 발표했다. 현직 종립학교 교법사이기도 한 이학주교법사는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일종의 인성교육프로그램에 대한 것이다. 특히 ‘도토리카드’를 설명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도토리는 ‘도(道)’와 ‘스토리(Story)’의 합성어라고 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도표화하고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학주교법사의 도토리카드를 보면 팔정도에 대한 설명이 있다. 팔정도를 청소년들에게 교리적으로 설명하면 금방 질려 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 우리말을 사용하여 부드럽게 풀어썼다. 예를 들어 정사유에 대해서는 ‘따뜻하게 마음먹기’라고 했다. 이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용서하기로 설명된다. 지향하는 목적은 알아차림, 절제, 인내, 유연함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정업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베풀기’라고 했고, 정명에 대해서는 ‘보람있게 살기’라고 했고, 정정진에 대해서는 ‘좋은 습관 기르기’라고 했다. 이렇게 해석한 것은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학주교법사는 다이돌핀(Didorphin)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다이돌핀은 무엇일까? 그것은 감동할 때 나오는 호르몬이라고 한다. 마치 엔돌핀 같은 것이다. 엔도르핀이 붐비되면 마약보다 백배나 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을 감동시키면 그 이상의 효과가 있는데 이를 다이돌핀이라고 했다. 청소년포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래서 이학주교법사는 청소년에게 다이돌핀을 나오게 하면 ‘게임끝’이라고 했다.
청소년을 포교할 때는 그들의 입장에 서서 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려고 한다. 대표적으로 선적질문을 들 수 있다. 청소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선승이 절에 찾아 온 청소년에게 선문답과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몹시 당황한다는 것이다. 마치 다그치듯이 몰아 부쳤을 때 말문이 막히는데 이는 부정적 이미지만 심어 줄 뿐이라고 했다.
김남식소장의 스승닮기
김남식소장은 이날 포럼에 오지 못했다. 이도흠 정평불상임대표가 대독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김남식소장의 발표문을 보면 기독교의 청소년전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논문을 읽어 보면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주어만 바꾸면 한국의 불교현실을 보는 것 같다.
김남식소장은 현재 한국기독교의 문제점에 대하여 지적했다. 한국기독교는 전체 인구의 18.5%인데 교회수는 6만개에 달한다고 했다. 이는 공급과잉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전도를 하면 할수록 개신교는 신뢰를 잃어 가고 있다고 했다. 청소년 전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김남식소장은 개인전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했다. 흔히 말하는 길거리 전도 같은 것이다. 복음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아마도 ‘예천불지’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거리 전도사가 “예수믿으면 천당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라고 말하는 단순한 교리를 말한다. 이런 말을 접했을 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김남식소장은 죽음과 구원에만 초점을 맞춘 단순화된 교리보다는 현재 삶에 대한 문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폴 히버트의 책을 인용하여 어떻게 하면 불운을 피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미래에 대한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을 말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삶과 연결된 기쁜소식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김남식소장은 청소년전도에 대하여 동행전도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가는 것을 말한다. 스승과 동행함으로 인하여 스승을 닮아 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거울화(mirroring), 이상화(idealizing), 동일화(twinship)로 설명했다. 이런 이야기를 보니 초기경전에서 가르침이 생각났다. 그것은 최상의 모임에 대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 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최상의 모임이 한다.”(A3.93
최상의 모임의 조건에 대한 것이다. 훌륭한 스승이 있으면 제자들은 스승과 같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어쩌면 거울화, 이상화, 동일화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방식은 청소년포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약을 쓰면 약이 듣듯이
청소년은 하얀 도화지와도 같다.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일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 설법을 들었을 때 “깨끗한 천에 염색이 잘 드는 것처럼”이라는 정형구가 있는데, 이 말은 청소년포교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깨끗한 흰천에 염색을 하면 잘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본다. 종립중학교 3년동안 배운 부처님의 일생 등 불교수업시간에 배운 것이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미션스쿨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는데 기독교의 교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불교가 미리 선점한 것이다.
청소년에게 담마를 알려 주는 것은 약을 주는 것과 같다. 약을 주면 약의 효과가 있는 사람이 있다. 소위 약발이 잘 듣는 사람이다. 하얀 도화지와 같은, 흰색 천과 같은 청소년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환자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환자들 가운데 적당한 자양분을 얻어서 적당한 자양분이 결여되지 않고, 적당한 의약품을 얻어서 적당한 의약품이 결여되지 않고, 적당한 간병인을 얻어서 적당한 간병인이 결여되지 않으면, 그의 질병은 치유된다.”(A3.22)라고 했다.
병이 치유되려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적당한 자양분, 적당한 의약품, 적당한 간병인이라고 했다. 이 세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치유가 된다. 그러나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도 치유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약을 써도 약발이 들지 않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종교로 따진다면 이교도가 해당된다. 한번 견해가 확립되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하얀 도화지와 같은, 흰색 천과 같은 청소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치 약을 쓰면 약발이 있듯이, 담마를 알려주면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견해가 확립된 자들을 포기할 수 없다.
이교의 교리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담마는 보편타당한 가르침이다. 담마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적용이 될 수 있다. 지금 비록 이교의 교리의 견해에 치우쳐져 있지만 진리를 알려 주면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교의 교리에 빠져 있는 자들을 환자로 볼 수 있는데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환자들 가운데 적당한 자양분을 얻어서 적당한 자양분이 결여 되지 않고, 적당한 의약품을 얻어서 적당한 의약품이 결여 되지 않고, 적당한 간병인을 얻어서 적당한 간병인이 결여 되지 않으면, 그의 질병이 치유되는 그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환자의 음식이 결정되며, 환자의 의약품이 결정되며, 환자의 간병인이 결정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다른 환자들도 간호될 수 있다.”(A3.22)
위 문장에서 핵심은 “이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다른 환자들도 간호 될 수 있다.”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첫번째의 희망이 없는 환자도 간호를 해서 섭섭하게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때문에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때문에 괴로운 세계로 윤회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의 치료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환자도 간호해서 빨리 회복이 되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 (Mrp.II.191)”라고 설명했다.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청소년들에게 경전 한구절이라도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번째 부류의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지 않아도 올바른 길로 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달리 포교할 필요가 없다. 알아서 찾아가 배우고 수행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어도 변화가 없는 사람이다. 견해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을 때 약을 써도 약이 들지 않는 환자와도 같다. 세번째 부류의 사람은 약을 쓰면 들고 약을 쓰지 않으면 들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날 청소년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청소년포교를 하기 위해서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담마를 알려 주는 것이다. 알려 주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한마디로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동을 주면 다이돌핀이 솟는다고 했다. 하얀 도화지와 같은, 흰색 천과 같은 청소년에게 담마를 알려 주는 것과 같다. 마치 환자에게 약을 쓰면 약발이 듣는 것과 같다.
한국불교의 미래는 청소년포교에 달려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청소년포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돈만 들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간에도 청소년포교에 올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할 바를 다하는 사람들이다. 청소년들에게 경전 한구절이라도 알려 준다면 그것을 인연으로 언젠가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2019-10-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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