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노동해방의 그날을 위하여, 반농반선(半農半禪)의 노동관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1. 17. 23:46

 

노동해방의 그날을 위하여, 반농반선(半農半禪)의 노동관

 

 

일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일하지 않고 사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누구나 노동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적게 일하고도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루에 반만 일하고 나머지 반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 노동중독에서 벗어나야

 

정평불 11월 법회가 16일 우리함께빌딩 6층에서 열렸다. 이번 달 법사로서 중앙승가대 유승무선생이 초대 되었다. 사회학자이면서 동시에 불교사회학자로 알려져 있다. 정평불에서 추진하고 있는 불교사회교리 중에서 불자의 노동관에 대하여 법문했다.

 




유승무선생에 따르면 이제 노동중독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말했다. 역사이래 이렇게 일을 많이 하던 시대는 없었다는 것이다. 농업시대 때는 하루에 너댓시간 일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산업시대로 넘어오면서 하루 종일 일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일을 많이 해서 좋은 면도 있긴 하지만 일 중독으로 사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이다. 현재와 같은 경제시스템에서는 일을 줄일 수도 없고 또한 일을 늘일 수도 없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일자리만들기는 구조적으로 어렵고 또한 가능하지도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동중독에서 해방되고 일자리도 나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유승무선생은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반농반선(半農半禪)에 대하여

 

반농반선은 문자그대로 반은 농사짓고 반은 수행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반농반선은 백장청규에서 말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 개념과도 다른 것이다. 선농일치 개념은 노동하는 것도 좌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반농반선에서는 노동하는 것이 반드시 수행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승무선생은 반농반선에 대하여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라고 말했다. 하루 일과 중에 반은 노동하고 반은 수행하는 것이다.

 

반농반선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오는 용어일까? 놀랍게도 일제시대때 등장한 용어이다. 오로지 한국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노동관인 것이다. 그래서 유승무선생은 반농반선의 두 가지 사례를 소개 하고 있다. 하나는 백용성 스님의 화과원 선농사업이고, 또 하나는 백학명의 내장선원 반농반선이다.

 

반농반선을 가장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백양사 내장선원의 청규에 나타나 있다. 청규를 보면 오전 학문, 오후 노동, 야간 좌선 이렇게 세 가지 단계로 되어 있다. 하루 일과 중에 반은 육체노동으로 보내는 것이다. 육체노동이 수행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생계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육체노동이라면 학문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은 정신노동이 될 것이다. 이렇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병행하는 것이 반농반선이라고 볼 수 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유승무선생에 따르면 미래 불자의 노동관으로 가장 적합한 시스템으로서 반농반선을 들었다. 하루 일과 대부분을 노동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루 일과 대부분을 자기계발로 보내는 것도 아니다. 하루 일과 중에 반은 노동을 하고 반은 자기계발 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하루 일과 중에 반만 일하는 것이다.

 

요즘 직장에서는 나인투 파이브(9 to 5)’라고 하여 보통 하루 8시간 일한다.그런데 반농반선 개념을 도입하면 노동시간은 4시간으로 줄어든다. 오전만 일할 수도 있고 오후만 일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남는 시간에 자기계발도 되고 또한 일자리 나누기도 될 수 있다.

 

남는 시간은 자기계발시간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행이 될 수도 있고 봉사활동이 될 수도 있고 여가활동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일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다.

 

옛날 농경시대 때는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많이 일하지 않았다. 농번기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농번기 때는 쉬었다고 볼 수 있다. 농번기때라 해도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날씨가 더울 때는 새벽에 논에 가서 두 세시간 집중적으로 일하고 더운 오후에는 쉬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유년시절 농촌에서 목격했던 것이다. 반농반선개념을 도입하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도 실현될 수 있다.

 

기본소득보장이 전제되어야

 

반농반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본소득제이다. 이에 대하여 유승무선생은 기본소득보장이 전제되어야 반농반선이 실현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빠른 속도로 기본소득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유승무선생은매우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한국사회를 포함한 선진산업사회의 생산력 수준은 모든 국민의 기본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라고 했다.

 

기본소득제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2017년 가을 정평불 눈부처학교에서 장성우선생이 강연 한 것에 대하여 후기를 작성한 바 있다. 이를 기본소득제가 대안이다, 신자유주의에서 불교적 평등주의’(2017-11.11)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올렸다. 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소득제 개념은 가난한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공평하게 일정금액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매월 천만원을 번 자에게 소득의 50% 5백만원을 세금을 내게 하고, 5백만원을 버는 사람에게는 40% 200만원을 세금을 내게 하고, 150만원을 번 사람에게는 30% 45만원을 세금을 내게 합니다. 총 걷힌 세금은 745만원입니다. 이를 세 명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3분하여 248만원 지급하는 것이 기본소득제의 개념입니다. 이렇게 일률적으로 248만원씩 공평하게 지급하면 천만원 버는 사람은 748만원의 수입이되고, 5백만원 번 사람은 548만원, 150만원을 번 사람은 353만원이 실소득이 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소득이 늘어납니다. 더구나 가난한 자는 번 돈 보다 기본소득제로 가져 가는 돈이 더 많아 생계걱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기본소득제는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을 기본개념으로 합니다.” (‘기본소득제가 대안이다, 신자유주의에서 불교적 평등주의’, 2017-11.11)

 

 

 

기본소득제를 보면 많이 버는 사람이나 적게 버는 사람이나 모두 세금을 내게 되어 있다. 많이 버는 사람들은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지만, 중요한 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소득이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윈-윈하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즐거움

 

유승무선생은 이제 노동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예를 들어 하루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책이 하나 생각났다. 그 책이름은 일하지 않는 즐거움이다.

 

책을 산 것은 1997년도의 일이다. 한창 직장에서 일할 때이다. 일반적으로30대떄 일을 가장 많이 한다고 말한다. 책을 산 것은 30대 후반때이다. 그 때 당시 밤낮없이 일했다. 주말도 거의 없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저녁늦게 퇴근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일했던 것 같다. 그때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책이 일하지 않는 즐거움이다.

 




가장이 일하지 않는 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다. 직장을 떠나면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책에서는 직장을 떠나라고 했다. 지금 당장 사표 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그것도 하루 일과 중에 반만 일하라고 했다.

 

일하지 않는 즐거움1990년대 북미에서 베스트셀러였다. 영어로 ‘The Joy of Not Working’ 이다. 책 겉표지에는 혹시, 당신은 아침에 누가 깨워야만 일어납니까? 인생이 고달프고 사는 게 재미없습니까?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까?”라며 물어보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경고문을 내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을 읽고 어떤 결정을 하시든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책임입니다. 저자와 출판사는 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라고 써 놓았다. 이 책을 읽고서 다니고 있는 직장에 사표 내도 저자와 출판사는 책임이 없음을 미리 공지한 것이다.

 

능동적인 삶과 수동적인 삶

 

일하지 않는 즐거움에서는 일 중독자가 되지 말자고 했다. 하루 일과 중에 반만 일하고 나머지 반은 자기실현할 수 있는 일에 쏟으라고 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 책에서는 친절하게도 매우 상세하게 알려 주고 있다.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글쓰기, 독서, 운동, 공원산책, 그림그리기, 악기연주, 춤추기, 강습받기”(222p)와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능동적인 생활방식이라고 했다.

 

능동적인 생활방식이 있다면 수동적인 생활방식도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TV시청, 술이나 마약에 취하기, 습관적으로 먹어대기, 드라이브, 쇼핑, 돈쓰기, 도박, 운동경기관람”(221p)라고 했다. 이 중에서 TV시청은 대표적인 수동적인 삶이다. TV를 바보상자라고 하는데 이는 TV를 시청하면 바보처럼 멍청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수동적인 삶은 무기력하고 게으르기 쉽다.

 

수동적인 삶은 어떤 성취감도 얻을 수 없다. 또한 수동적 삶의 특징은 편안하게 즐기는 삶이라는 것이다. 좀처럼 움직임이 없어서 죽은 자와 같다. 좀비와 같은 삶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능동적인 삶은 강한 성취욕을 바탕으로 한다. 늘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글쓰기 등 능동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일인사업자로 살다 보니

 

책에서 언급된 글쓰기 등은 오늘날 한국인들도 하고 있는 것이다. 악기연주의 경우 섹소폰이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요즘 어디를 가든지 섹소폰동호회가 있고 또한 길거리연주회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취미활동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것은 글쓰기였다.

 

1990년대 후반기에는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글이라는 것은 소설가나 쓰는 것인 줄 알았다. 그때 당시 회사에서 기안서나 쓸 정도였지 글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책에서는 여가시간에 글쓰기를 강력하게 추천한 것이다.  만약 미래 취미를 갖는다면 글을 쓰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책에서는 글쓰기에 대해서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책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동시에 하라고 했다. 먼저 책을 사서 읽으라고 했다. 독서를 취미로 하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가라고 했다. 그것은 글쓰기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책에서는쓰기는 읽기보다 좀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을 내서 편지나 글을 써 보면 자신의 의견과 창의성을 표현하게 된다. 아무래도 할 수 있는 것은 편지쓰기일 것이다.”(241p)라고 했다.

 

인터넷이 거의 없던 시기에는 편지 쓰는 것이 글쓰기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글쓰기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편지부터 쓰라고 했다. 오늘날이라면 블로그를 만들어 쓰라고 했을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파격적인 일하지 않는 즐거움을 읽고서 그대로된 것 같다. 책을 읽은지 8년후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 이곳 저곳 20년 동안 옮겨 다녔는데 퇴출로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직장인은 아무리 지위가 높고 잘 나가는 사람도 퇴출로서 끝난다.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직장을 그만 두고 나서야 책 대로 삶이 실현된 것 같다. 직장을 그만 두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시간부자가 되고 나서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글쓰기이다. 글이라 것은 작가만 쓰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인터넷시대를 맞이하여 보통사람도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일하는 날 보다 노는 날이 더 많다. 평균을 내 보면 하루 일과중에 반만 일하는 셈이 되었다. 나머지 일과는 글쓰기 하고 있다. 어쩌면 책대로 된 것 같다. 그런데 유승무선생의 반농반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개인적으로는 이미 반농반선을 실현하고 있는 것 같다.

 

노동해방의 그날을 위하여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 없다. 여가시간도 있어야 인생의 행복도 맛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은 노예나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귀족들은 가능한 여가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불교에서도 일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수행승이 일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탁발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대신 정신적인 일을 했다. 수행을 하는 것이 정신적인 일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의 밭을 간다고 했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탁발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백장청규와 같은 제도가 생겨나서 선농일치제도가 등장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생겨난 반농반선은 부처님 당시의 노동관과 다른 것이고 또한 백장청규제도와 다른 것이다.

 

반농반선은 생계라는 육체노동과 수행이라는 정신노동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하루 일과 중에 반만 일하고 나머지 반은 정신적 향상을 이루는데 힘을 쏟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미래 사회의 노동관이 아닐까? 물론 기본소득제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과연 노동해방의 그날은 올 수 있을까?

 



 

2019-11-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