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완전한 계급평등을 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2. 2. 14:54

완전한 계급평등을 위하여

 

 

한 진보지식인의 고뇌에 찬 글을 읽었다. 최근 조국관련 검란사태로 인하여 사분오열된 진보진영의 안타까움에 대한 글이다. 진보진영은 현정부에 대하여 비판적 지지를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점차 보수화 되어 감에 따라 실망감도 커져 간 것 같다. 현정부가 소외된 계층을 돌보기 보다는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현재의 집권여당에 대하여 사실상 보수정당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계급평등은 요원한가

 

보수정당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기득권의 유지에 있다. 한마디로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굳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 만일 바꾸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면 불온시한다. 그래서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한국적 현실에서 온건 진보라 불리우는 정당도 집권을 하자 보수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혁을 과감히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촛불로 이루어낸 승리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동안 쌓였던 적폐를 현정부가 해소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만 2년이 지난 현재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이는 정치권과 관련이 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의회권력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년 4월 총선에서 압승하자고 말한다. 그래야 진정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검찰권력이다. 최근 검찰의 행태를 보면 이 나라의 권력은 검찰에 있는 것 같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가지고 있는 막강한 검찰권력 앞에 청와대도 힘을 못 쓰는 것 같다. 한 청와대 비서관이 얼마나 검찰이 무서웠으면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진보진영에서는 소외된 자들이나 소외계층을 대변한다. 그리고 계급평등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기득권을 해체하고 모두가 잘사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말한다. 누구나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다.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세상이 평등하지 않음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완전한 계급평등은 인간이 탐욕을 가지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계급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언제부터 계급이 생겼을까? 놀랍게도 초기경전에서는 네 가지 계급이 생겨난 것에 대한 유래가 설명되어 있다.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aggaññasutta)’(D27)이 바로 그것이다. 경에 따르면 최초로 계급이 생겨난 것은 쌀을 둘러 싼 다툼에 대한 것이다. 농사지은 쌀을 훔쳐 가는 사람이 생겨나자 이런 사람을 추방할 사람을 세운 것이다. 마침내 왕이 출현한 것이다. 선출된 왕은 법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세습되고 고착화되었다. 고대인도에서 말하는 크샤트리아, 즉 무사계급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계급이 생겨난 것은 오계중의 하나인 불투도계를 어겼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에 따른 것이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는 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고 계급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계급없는 사회는 요원한가? 그렇지 않다. 부처님의 상가(sagha)가 계급없는 세상의 대표적 케이스에 해당된다.

 

네 가지 계급이 없는 상가(sagha)

 

상가는 네 가지 계급에서 평등했다. 누구나 상가에 들어가면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을까? 율장소품을 보면 여섯 명의 싸끼야 족의 출가이야기가 있다.

 

싸끼야족의 왕 밧디야는 왕족 일곱 명과 함께 출가했다. 그런데 왕의 이발사 우빨리도 출가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왕족들이 출가하고 자신만 혼자 궁전으로 돌아 갔을 때 살아 남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싸끼야의 왕 밧디야는 우빨리에게 함께 출가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놀라운 제안을 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이시여, 저희 싸끼야 족들은 교만합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는 오랜 세월 우리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를 먼저 출가시켜주십시오.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 싸끼야족들의 싸끼야족 교만이 제거될 것입니다.(Vin.II.184)

 

 

싸끼야족의 왕 밧디야는 자신의 이발사 우빨리를 먼저 출가시켜 달라고 부처님에게 청원했다. 상가는 네 가지 계급이 평등한 곳이기 때문에 평민이나 노예출신이라도 상가에 들어가면 먼저 들어가면 선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인을 먼저 출가시켜 달라고 했다.

 

상가에서는 모든 계급이 평등하다. 하루라도 먼저 들어온 사람에게 존중의 예를 표하게 되어 있다. 하인 우빨리가 하루라도 먼저 상가에 들어 갔다면 왕족출신이라도 먼저 인사하고 합장 공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상가는 계급평등이 이루어진 곳임을 말한다. 이렇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자만(māna)’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왕족출신이라는 자만을 제거하기 위하여 하인을 먼저 출가시킨 것이다.

 

기득권의 전유물 같은 자만(māna)

 

자만은 기득권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이다. 세 가지 자만이 있다. 태생의 자만, 배움의 자만, 부자의 자만을 말한다. 태생의 자만은 브라만이 대표적이다. 요즘 같으면 가문의 자만과도 같은 것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자만을 갖기 쉽다. 학위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부자들 역시 자만을 가지기 쉽다. 가난한 자에 대하여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경멸하는 경향도 있다.

 

흔히 말하길 끼리끼리 논다고 한다. 한자어로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탁월한 자들은 탁월한 자들끼리 어울리고, 저열한 자들은 저열한 자들끼리 어울린다. 가문이 좋은 사람들은 가문이 좋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많이 배우 사람들끼리 어울린다. 또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어울린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며 자녀도 같은 학교에 보낸다. 그리고 통혼이 이루어진다. 이는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우월적 자만이라고 볼 수 있다.

 

우월적 자만이 있다면 열등적 자만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월적 자만을 가진 자들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열등적 자만을 가진 자들은 우월적 자만을 가진 자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자만을 버리라고 했다. 그래서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Stn.799)라고 말했다. 이처럼 부처님이 설한 자만을 보면 놀랍게도 동등도 자만에 해당된다고 했다.

 

우월이 자만인 것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열등도 자만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더욱 더 모르는 것은 동등도 자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동등의 자만은 같은 그룹내에서 느낄 수 있다. 같은 연령층이나 같은 학교, 소속회사나 단체에 속해 있을 때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스포츠에서 응원하는 것도 일종의 동등의 자만이라고 볼 수 있다.

 

자만을 가지게 되면 하나의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 대게 내가 누군데!”라고 나타나는 것이다. 더 심하면 내가 누군데, 감히!”라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기득권층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자만과 기득권층은 뗄레야 뗄 수 없다. 우월적 자만이 생겨난 것은 기득권층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경멸하기 쉽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힘 있는 자가 인내할 때

 

진보진영에서는 계급평등을 이야기한다. 완전한 계급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제도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요즘 핫이슈가 되고 있는 공수처설치나 선거법개정 같은 것이다. 기득권을 해체하려면 진보적 가치를 지닌 정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

 

계급평등을 이루려면 제도개혁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의식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계급평등은 쉽지 않다. 인간은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이익에도 집착한다. 아주 작은 기득권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상가는 계급평등이 이루어진 세상이다.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 상가는 네 가지 계급이 평등했다. 이는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소똥 말린 것을 태워서 생겨난 불이나 고급 전단향을 태워서 생겨난 불이나 화염, 광체, 빛깔 등에서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네 가지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가르침을 배워서 실천하면 성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생명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고귀하다. 태생이 좋다고 하여, 많이 배웠다고 하여, 부자라고 하여 자만을 가진다면 불공평한 세상이다. 가문이 좋은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부자가 먼저 자만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힘 있는 자가 인내할 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된다. 과연 이 욕망의 세상, 욕계에서 계급평등은 가능한 것일까? 한 진보지식인의 잠 못 이루는 고뇌가 느껴진다.

 

 

2019-12-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