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불편과 자발적 가난을 위하여
또다시 고강도의 부동산규제정책이 발표되었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정책을 보면 아직도 사람들은 부동산으로 한몫 잡으려는 환상에 젖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과거 70년대부터 시작된 부동산투기에 따른 부의 축적에 대한 학습효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불로소득이라고 볼 수 있다. 불로소득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해이 내지는 도덕불감증을 야기 했다. 그로 인하여 전국민이 투기와 불로소득의 대열에 합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기와 불로소득의 대열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한없이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경제도 성장을 멈추었다. 이른바 저성장의 시대에 들어섰다. 성장율이 고작 1-2%에 지나지 않는다. 칠팔십년대 고도성장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두 자릿수에 달하는 고도성장의 시대가 있었다. 그때는 완전고용의 시대이기도 했다. 동시에 투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때 부동산투기로 한몫 잡은 사람들은 백만장자가 되어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불로소득으로 이룩한 부끄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물질적 부를 찾아서 불로소득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경제는 다시 한번 성장의 시대로 진입할까? 그 옛날처럼 불로소득의 꿈을 이루게 해줄까? 경제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앞으로 고도성장기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제 저성장기를 거쳐서 마이너스 성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마치 주식이 고점을 찍고 하락하는 것과 같다. 그것도 급격히 하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세분출한 주식의 그래프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저성장기 또는 마이너스 성장기에 어떻게 살아 가야 할까? 정평법회에서 김광수 선생이 살아 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김광수선생의 ‘소욕지족의 경제학’
정의평화불교연대(정평불) 12월 정기법회가 12월 21일 장충동 우리함께빌딩6층 우리는선우법당에서 열렸다. 이번달 법문 주제는 ‘소욕지족의 경제학’에 대한 것이다. 법문은 ‘서울치과’ 김광수원장이 해 주었다.
김광수선생은 동대문역 부근 창신동에서 치과를 개업했다. 치료받은 이에 따르면 발치하지 않고서도 치료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봉제골목으로 잘 알려져 있는 창신길은 외국인 이주민노동자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학교를 정년퇴임하고 예전의 개업의 경험을 살려서 새로 개업한 것이다. 돈을 많이 벌려고 하기 보다는 사회봉사차원에서 개업한 것이다.
김광수선생은 소욕지족(小慾知足)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했다. 먼저 소욕지족은 부처님 말씀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법구경에서는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 (Tuṭṭhī sukhā yā itarītarena)”(Dhp.331)라고 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것과 조금 모자란 것에 만족하는 삶이 소욕지족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소욕지족과 관련된 가르침이 많다. 소욕지족과 관련하여 “이러한 하잘 것 없어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삶의 고리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A4.27)했다. 이 말은 앙굿따라니까야 ‘만족의 경’(A4.27)에 실려있다. 여기서 하잘 것 없다는 것은 사대필수품을 말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수행자에게 있어서 탁발음식, 세 벌의 옷, 와좌구, 필수약품 외 더 이상 가질 것이 없다. 그렇다면 만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세 가지 만족이 있다. 그것은 주석에서 “1) 좋거나 거친 어떠한 것을 얻든, 소득에 따른 만족(yathalabhasantosa), 2)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만족하는, 기력에 따른 만족(yathabalasantosa), 3) 사치스런 것을 피하고 필수적인 것만을 취하는, 분수에 따른 만족(yathasaruppasantosa)이 있다.”(Srp.II.16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만족에는 크게 소득, 건강, 분수에 의한 만족이 있다. 이와 같은 세 가지에 만족하는 삶을 산다면 재벌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소욕지족에는 공식이 있다. 김광수선생은 이에 대하여 만족은 소유를 욕망으로 나눈 것(만족=소유/욕망)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소욕지족 공식은 김광수선생이 번역한 ‘붓다의 경제코칭’에서도 볼 수 있고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공식이다. 분자에 해당되는 소유가 어떤 것이 되었든 상관 없이 분모에 해당되는 욕망을 최소화하면 행복지수는 높아져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실천이 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불로소득을 바라며 투기대열에 합류한다면 욕망은 높아 질 것이다. 그럴경우 집을 여러채 가지고 있어도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불만이 가득하다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진정한 무소유(無所有)는?
천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탐욕이 가득하다면 결코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 집을 아흔아홉채 가진 자가 백채를 채우려고 하거나, 백억대의 자산가가 천억대를 꿈꾼다면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차라리 가난하지만 부자가 되기를 접은 자가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상의 행복에 있어서 ‘무소유(無所有)’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무소유는 문자그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을 말한다. 과연 이와 같은 무소유는 가능한 것일까? 출가수행자는 네 가지 필수품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밥은 먹어야 하고 옷은 걸쳐야 한다. 잠 잘곳도 필요하고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한다. 완전한 무소유를 실천하려면 이론적으로 사대필수품도 가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무소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적인 무소유일 것이다.
물질적으로 무소유가 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 무소유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오염원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번뇌를 소멸시켰을 때 진정한 무소유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김광수선생은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견(見)과 같은 번뇌를 소멸시키는 삶이 소욕지족이라고 했다.
소욕지족과 무소유가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재산가라 하더라도 번뇌가 없다면 그는 무소유자가 된다. 네 가지 필수품으로 살아 가는 수행자에게 번뇌가 가득하다면 그는 소유자가 된다. 소욕지족과 무소유를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광수선생은 수행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금전의 노예에서 벗어나 물질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돈 버는 시간을 줄이고 수행에 정진한다면 소욕지족과 무소유를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본의 폭주를 막아야
칠팔십년대 한없이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칠팔십년대는 완전고용의 시대였다. 경제성장률이 두 자릿수대인 시절, 십프로 가까이 고도성장이 유지되던 시절에 사람들은 투기대열에 뛰어 들었다. 그때 한몫 잡은 사람들은 평생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있다. 그때 투기대열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이는 사회가 잘못된 것이다. 불로소득이 판치는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불로소득을 바라며 투기대열에 합류했을 때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이제 저성장의 시대이다. 조만간 마이너스성장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앞으로 삶은 더욱 더 팍팍해질 것이다. 부동산 거품은 꺼지고 모든 것이 위축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에 대하여 김광수선생은 자발적 가난을 이야기했다. 앞으로 모두가 가난하게 사는 시대가 도래하는데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아끼고, 나누고, 바꾸어쓰고, 다시쓰자는 것이다. 이른바 ‘아나바다운동’을 말한다. 1998년 아이엠프(IMF)가 왔을 때 그런 운동을 했었다.
김광수선생은 자본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안쓰고 안먹고 안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여 그대로 살자는 것이다. 이렇게 안쓰기 운동을 하면 기업에서 생산한 것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기업이 망하게 되고, 기업이 망하면 자본주의체제가 무너져서 자본의 폭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극단이다. 다만 경제는 발전되어야 한다는 허상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탐욕과 이기심을 바탕을 한 것이다. 김광수선생은 자본주의에 종속되지 말자는 취지에서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광수선생은 가난하게 사는 방법에 대한 책을 소개했다. 그것은 ‘도시형 수렵채집생활’과 ‘가난뱅이의 역습’이라는 책이다. 일본에서 출간된 책으로 가난하게 사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자발적 불편과 자발적 가난을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 그리고 기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대로 자본의 폭주를 내버려 둔다면 인류는 한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절망적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은 여전히 불로소득을 바라며 투기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마치 끊임없이 성장할 것처럼 착각에 빠져 물질적 욕망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갈애와 같은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물질적 소유를 추구를 하는 삶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무소유라 하여 반드시 물질적 것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번뇌가 없는 정신적 무소유야말로 진정한 무소유이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할 알고 정신적 무소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한 자들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면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가면 되고 오천원 이상 되는 점심을 하지 않아도 만족하는 삶을 산다면 행복한 것이다. 현시대는 자발적 불편과 자발적 가난을 요청한다.
2019-12-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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