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마음을 다 잡으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1. 24. 12:31

 

 

마음을 다 잡으려면 

 

 

 

 

 

남겨진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보험회사에서 말하는 기대수명대로라면 불과 여십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은 광속처럼 빠른 것 같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고, 월초인가 싶으면 월말이다. 새해가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낙옆이 지고 있어서 연말이 가까워오고 있다. 한해 두해 지나는 것이 광속처럼 빠르다. 남은 기대연령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기대수명대로 산다는 보장이 있을까? 기대수명은 단지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은 알 수 없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기대수명 이상으로 살 수도 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고서도 자신만큼은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삶의 교만이다.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다면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급작스럽게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라고 말할지 모른다. 삶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것은 아마 주체적으로 살지 못한 아쉬움일 수 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한 것이다.

 

 

 

최근 조안 할리팩스의 죽음을 명상하다’(민족사)를 틈틈이 읽고 있다. 책에서 본 인상적인 문구가 있다. 그것은 모든 발자국 가운데 가장 최고의 것은 코끼리의 발자국이다. 모든 명상 중에서 최고의 것은 죽음명상이다.”(109p)라는 말이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말이라고 했다. 죽음명상(maraānusati:  死隨念)에 대하여 알고는 있지만 초기경전에 이런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검색해 보니 출처가 대반열반경이다. 대승경전에 실려 있는 문구인 것이다.

 

 

 

매일 죽음을 명상하는 것은 삶을 교만하지 않게 살게 한다. 10년 후에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다면 그때까지 목표가 실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5년후에 죽음을 맞는다면 그때 무엇을 실현했을까? 1년 후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완성될 수 있을까? 1개월 후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다음주에 죽는다면 마지막 순간에 남아 있을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밤 죽음을 맞이한다면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죽음명상을 하면 여러가지 이점이 있다. 가장 먼저 삶의 교만이 사라진다. 다른 사람들 다 죽어도 나 만큼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삶의 교만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삶의 목표가 정해진다. 무엇을 실현하고 무엇일 달성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용서할 사람은 용서하고 놓을 것은 놓아 버리는 것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죽음이 오기 전에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하루 하루를 헛되이 보낼 순 없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삶은 동물도 똑같이 한다. 감각에 의존하는 근본적 욕구로 산다면 동물의 삶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유할 수 있기에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다. 인간에게는 동물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신이 의도한 것이 실현되었을 때 자유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연이나 금주같은 것이다. 금연이나 금주에 실패하면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것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해로운 것인 줄 알면서도 계속 한다면 이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동물적 삶이다. 사람도 동물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 가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유의지가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세상사람들과 반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났을 때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청원했다.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해줄 것을 간청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했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의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M26)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는 역류도(逆流道)이다. 이는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가르침을 말한다. 세상사람들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살아 갈 때 이와 거꾸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하는 삶이다. 그래서 흐름을 거슬러가(paisotagāmī)”라고 말한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가는 가르침이라 하여 역류도라고 한다.

 

 

 

불교적 자유의지는 어쩌면 역류도에 있는지 모른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은 다름 아닌 의지가 없으면 실현되기 힘들다. 탐욕을 소멸하는 삶을 살아 탐욕을 소멸했다면 자유의지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골초가 수십년 피우던 담배를 끊어 버리는 것과 같고, 애주가가 수십년 동안 마신 술을 끊어 버리는 것과 같다. 모두 의지가 있어서 가능하다. 이렇게 내면의 탐욕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번 토한 것을 삼킬 수 없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자유가 있다는 것과 같다. 탐욕에 굴복하여 탐욕의 삶을 산다면 탐욕의 노예와 같은 삶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탐욕을 극복하여 무탐(無貪)의 삶을 산다면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주인으로서 삶을 살 수 있다. 탐욕 뿐만 아니라 성냄, 어리석음도 극복 되다면 자유를 넘어 대자유의 삶을 산다고 볼 수 있다.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

 

 

 

 

 

토한 것을 삼킬 수 없다. 황제식을 해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똥이 되고, 값비싼 포도주도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오줌이 되어 나온다. 감각적 쾌락은 음식같은 것이다. 그러나 넘기는 순간 더러운 것이 된다. 아무리 값비싼 음식도 토한 것을 먹을 수 없다. 대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다시는 감각적 욕망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는 자임을 말한다.

 

 

 

게송외우기로 자유의지를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대로 목표한 바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탐욕의 세상에서 반대로 가는 것도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수행(bhāvanā)’이라고 말한다. 무언가 되어감(becoming)’을 뜻한다. 향상을 위하여 되어감을 말한다. 본래 깨끗한 것이 있는 더러워져서 닦는다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수행은 한마디로 자유의지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가지 수행이 있다. 일반적으로 수행이라고 말하면 명상을 떠 올리기 쉽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수행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게송외우기일 것이다.

 

 

 

게송외우기를 할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자유의지가 실현되는 것 같다. 단지 보는 것으로 그치고, 단지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머리속에 게송이 저장 되어 있다면 굳이 책을 열어 보지 않아도 되고 인터넷검색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된다면 외운 것은 무형의 재산이나 다름없다.

 

 

 

흔히 사람들은 한평생 재산 모으는데 올인한다. 그러나 모은 재산은 죽었을 때 가져 갈 수 없다.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재산형성과정에서 지은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불법적인 것이라면 악업을 가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외운 게송은 무형의 재산이기 때문에 절대 손실되지 않는다.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저승갈 때 노자돈같은 것이다.

 

 

 

초전법륜경을 외웠는데

 

 

 

삶이 무료할 때, 삶에 교만이 생겨날 때 게송외우기를 하면 좋다. 실제로 많은 게송을 외웠다. 그것도 빠알리어로 외웠다. 가장 권장할 만한 것은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sutta)’ (S56.11)이다.

 

 

 

 

 

 

 

초전법륜경을 외운 것은 2012년도의 일이다. 그때 당시 중국성지순례를 앞두고 외워 보리라고 작정했다. 평소에는 여러가지 일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여행을 가면 시간이 많이 남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 외워 보기로 한 것이다.

 

 

 

초전법륜경은 매우 긴 경이다. 글자수로 본다면 천수경과 비슷하다. 천수경은 한문으로 된 것을 외웠지만 초전법륜경은 빠알리어로 된것이다. 거의 한달 보름에 걸쳐 외웠다. 집에서도 외우고 사무실에서도 외우고 길거리에서도 외우고 전철에서도 외우고 기다릴 때도 외웠다.

 

 

 

초전법륜경을 다 외웠을 때 마치 득도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매일 암송했다. 그런데 암송하면 할수록 기쁨과 환희가 넘쳐 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초전법륜경이라는 경 자체에 그런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이 최초로 설한 경이다. 사성제를 상세하게 설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세 번 굴려서 열 두가지 형태로 설했는데 세 번 굴린 것에 대하여 시전(示轉), 권전(勸轉), 증전(證轉)으로 설명되어 있다. 고성제를 예로 든다면 이당 둑캉 아리야삿짠띠라 하여, 이는 이것이 거룩한 괴로움의 진리이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이다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해차원이기 때문에 시전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땅 코 빠니당 둑캉 아리야삿짱 빠린네이얀띠라 하여, 이는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알려져야 한다(pariññeyyanti)’의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를 수행로 보아 권전이리고 한다. 마지막으로 땅 코 빠니당 둑캉 아리야삿짱 빠린냐딴띠라 하여, 이는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라는 뜻인데, 이는 알려졌다(pariññātanti)’의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수행의 완성으로 보아 증전이라고 한다. 이렇게 네 가지 진리를 시전, 권전, 증전으로 세 번 굴리면 열 두가지 형태가 되어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이라고 한다.

 

 

 

초전법륜경에서 가장 벅찬 순간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순간이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아꿉빠 메 쩨또위뭇띠, 아야만띠마 자띠 낫티다니 뿌납바워띠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말은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뜻이다. 이 부분을 암송했을 때 마음이 벅차오른다. 반야심경을 제대로 알고 독송하면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부분에서 감동한다고 하는데, 초전법륜경에서는 이른바 아라한선언이라는 이 게송에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초전법륜경을 독송하면 감동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성제가 설명되어 있고, 아라한선언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들의 세계까지 기쁜소식이 전파되는 과정이 있다. 말미에는 일만 세계가 진동하고 무량한 빛이 우주끝까지 이르렀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와 같은 초전법륜경을 읽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게송을 외우면 어떤 이득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백번 읽는 것보다 한번 쓰는 것만 못하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내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면 나의 재산이 될 수 없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읽는 것으로 그친다면 나의 것이 아니다. 확실하게 내것으로 만들려면 외워야 한다.

 

 

 

외울 때는 하루 한게송씩 외우면 된다. 욕심부리지 않고 매일 한게송씩 외우면 긴 길이의 경도 외울 수 있다. 천수경도 하루에 한 게송씩 외웠고, 금강강도 하루 한분씩 외웠다. 빠알리 경도 마찬가지이다. 초전법륜경이라면 하루에 한게송씩 외우면 두 달 이내면 외울 수 있다. 그런데 한번 외워 놓으면 내것이 된다는 것이다. 한번 외워 놓으면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무엇보다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있다. 저 세상에 갈 때 노자돈이 되는 것이다.

 

 

 

게송외우기하면 치매도 예방될 것이다. 단지 읽는 것,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겨 넣는 것이기 때문에 기억력이 증진된다. 그런데 외우는 과정 그 자체가 수행이라는 것이다. 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명상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르침을 외우는 것도 수행이다. 외운 것을 바탕으로 사유한다. 더구나 사유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모든 공부나 학문이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도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외우긴 외우되 원어로 외우는 것이 좋다. 우리말로 번역된 경을 외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빠알리원문으로 외우는 것이다.

 

 

 

빠알리원문으로 외우면 힘이 있다. 부처님당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빠알리어로 외웠기 때문에 힘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원문으로 외우면 보호받는다고 한다. 게송을 외우는 것이 수행의 목적도 있지만 보호의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라따나경(寶石經, Sn2.1), 멧따경(慈愛經, Sn1.8), 망갈라경(祝福經, Sn2.4)은 예불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호경이기도 하다. 이들 경을 모두 빠알리어로 외운 바 있다.

 

 

 

 

마음을 다 잡으려면

 

 

 

삶에 교만이 일어날 때 게송 외우기하면 좋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게송외우기에서 손 놓은지 오래 된 것 같다. 좋은 게송이 있으면 프린트하여 틈나면 외워야 겠다. 물론 빠알리원문으로 외우는 것이다. 마음을 다 잡으려면 게송 외우기만한 것이 없다. 그동안 너무 교만하게 산 것 같다.

 

 

 

 

 

 

 

2019-11-24

 

담다다사 이병욱